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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웬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든 숲을 보았다. 눈에 닿는 곳마다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안개가 피비린내와 뒤섞여 진동했다. 그 한가운데에 칸이 있었다.
칸의 손에는 이제 막 베어낸 머리통이 들려 있었다.
“허억.”
놈들의 본거지에서 인질로 잡아온 놈들 중 하나가 공포에 질린 숨을 들이켰다.
몸에서 분리된 대가리를 들고 칸이 다가왔다.
핏발이 선 눈빛과 은빛으로 번뜩이는 머리카락을 본 인질들이 공포에 질려 낮은 신음을 흘렸다.
오웬이 인질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객으로 보이는 자들은 모두 죽였고, 이놈들은 본거지에서 잡일을 하던 하인들입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희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벌벌 떠는 놈들의 앞에 우뚝 선 칸이 머리통을 들어 보였다.
“주인이냐?”
음산한 목소리가 울렸지만 제대로 눈을 드는 놈이 없었다. 오웬이 한 놈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놈이 고개를 들었다. 칸을 쳐다본 놈의 가랑이에서 오줌 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오웬은 놈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윽박질렀다.
“똑바로 봐! 너희들의 주인이냐?”
놈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리고 억눌린 신음 소리를 냈다.
“예에, 마, 맞습니다.”
라이칸이 머리통을 던져버렸다.
목적을 이룬 눈에서 서서히 핏발이 걷히고 광채가 흐려지고 있었다.
갑자기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말이 채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린 기사는 거친 숨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황급히 말했다.
“할리 성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오웬의 눈이 커졌다.
“와이엇이 전령을 보냈다고?”
“예. 대사가……. 왕의 대사, 길스가……. 공작부인을 데려갔다고 합니다.”
살기가 다시 피어나 칸의 몸을 휘돌기 시작했다.
***
시녀가 드레스 위에 가운을 입혀주었다.
캘리는 슬쩍 눈을 감았다.
방금 들어갔다가 나온 목욕물은 향기롭고 뜨거웠다. 아직 나른함이 채 가시지도 않은 몸 위에 실크가 닿자 그 감촉에 신음을 흘릴 뻔했다.
옷감이 너무나 부드러워서 살짝 쥐기만 해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이런 건 만져 본 적도, 입어본 적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상인들이 다 모인다는 소르테에서도 이런 옷감을 파는 이는 없었다.
시녀가 짧은 머리칼을 정돈해 주는데, 그 솜씨가 감탄스러웠다.
옆으로 얇게 땋아서 뒤로 두르고, 중간중간 진주알을 꽂아서 마치, 보석으로 만든 화관을 쓴 것 같았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시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지만 캘리는 미소 한 자락 보일 수 없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낯설었다. 하나같이 반짝이는 장신구로 치장되어 있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창밖 너머를 응시했다.
궁은 아름다웠다.
몇 시간 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에 도착했을 땐 그 진가를 몰랐다. 해가 뜨고 제 모습을 훤히 드러낸 궁은 사방이 꽃이고 초록의 향연이었다. 궁전 주위를 흐르는 강물과 드넓게 펼쳐진 들판, 저 멀리 보이는 청록의 산맥까지.
엘프 여왕이 사는 궁전은 투명하고 환하고 맑은 화려함이었다면 여기, 디콘스의 왕궁은 묵직하면서도 위엄 있고 웅장했다.
똑, 노크 소리에 시녀가 ‘네’ 하고 대답을 하자 길스 경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캘리를 본 길스의 눈이 슬쩍 휘었다.
“아름다우십니다. 공주 전하.”
캘리는 길스를 곱게 볼 수 없었다.
“폐하는 언제 뵐 수 있는 거죠?”
“공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 한숨 못 자고 밤 내내 말을 타고 오면서 왕을 바로 만날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녀를 씻기고 꾸미는 게 먼저라고 했다.
‘왕을 알현하기 위해선 예의를 갖춰야 합니다.’
원하지도 않았던 알현이다. 그런데 한껏 꾸미기까지 해야 한다니, 배알이 꼬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여긴 궁이고, 왕은 왕인데.
그리고, 한 번은 만나야 하는 사람이다.
그분에게 어떤 의도가 있다면 반드시 만나서 확인해 봐야 했다.
***
왕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왔다. 지팡이를 쿵, 찍었다가 발을 찌익, 끄는 듯 걸었다.
넓은 홀 한가운데에 선 캘리는 왕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눈물이 날 만큼 기쁘거나, 원망이 치솟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덤덤하다.
엘프 여왕을 만나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부모님은 누구인지, 묻고 싶어서 기를 쓰고 소르테에 가려고 했었다. 한때는, 부모님을 만나는 것이 유일한 바람이었는데…….
눈앞에 나타난 왕이 내 아버지라니,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까?
화려한 옷을 입었지만 어딘가 초췌해 보이는 모습도 그렇고, 디콘스의 왕이라는 사실도 그렇고.
이 모든 것이 깨버리면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
우뚝, 왕이 그녀의 앞에 섰다. 그리고 바라본다. 아무 말 없이 빤히.
정적이 흘렀다.
“닮았구나.”
왕의 첫마디였다.
“네 어머니를…… 빼다 박았어.”
캘리는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전혀 아무 느낌도 없이 덤덤했는데, 어머니라는 단어에 울컥, 무언가가 치솟았다. 뜨거운 덩어리가 치고 올라 서러운 세월을 일깨운다.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외로움, 악몽을 꾸고 깨어난 밤에 혼자 울던 두려움,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기를 쓰고 버텨냈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려 머릿속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왕이 다가섰다. 지팡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커다란 팔이 그녀를 당기더니 이내 품에 안는다.
순간, 왈칵 치솟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왕인지, 뭔지 모르겠다. 실감도 나지 않고.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
“지금 바로 폐하의 처소로 들라고 명하셨습니다.”
시녀의 말에 탈리아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져나갔다. 옆에 서 있는 만달루테의 얼굴도 굳었다.
“알았다.”
탈리아는 시녀를 내보내고 몸을 돌려 아들을 보았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만달루테는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는 어머니를 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아이가 왕궁으로 들어왔지만 당장 제 자리를 넘보거나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낙관하지 말아라. 그 아이의 뒤에는 워렌 공작이 있어. 궁 안까지 들어왔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제약을 받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기 전에 막으려고 기를 썼는데…….”
“어차피 벌어진 일입니다.”
“너는!”
탈리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만달루테가 인상을 쓰자 왕비는 짧게 숨을 몰아쉬며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아일 없애야 해. 그게 너를 위해서도…….”
“어머니.”
만달루테의 목소리가 살짝 거칠어지자 탈리아는 말을 멈췄다.
“어머니. 섣불리 나서지 마십시오.”
“뭐?”
“코르키를 너무 믿어서도, 의지해서도 안 됩니다. 그자는 우리 편이 아닙니다.”
“만달루테. 너에겐 그자가 힘이 될 거야.”
“아니, 그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음흉하고 욕심이 많은 자입니다. 분수를 모르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어머니와 제가 놈을 너무 키웠습니다. 이제는 거리를 둬야 합니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만달루테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놈과 엮여 있는 일이 많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놈을 부리느라 우리의 약점까지 다 잡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도 끊어내야 할 것은 끊어내야 합니다. 아니면 놈이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왕이 된다 한들, 허수아비 왕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건 네가 왕이 된 다음의 일이야. 지금은 왕이 되는 일이 무엇보다 중하고 급해.”
“제가 왕이 될 것입니다. 코르키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저는 왕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니께서도 마음을 놓으세요. 코르키와 거리를 두시고 자중하십시오. 아니면,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될 겁니다.”
“…….”
“제 말을 명심하십시오. 저를 믿고 기다려주세요.”
탈리아는 손을 뻗어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는 너를 믿는다. 디콘스의 왕이 될 자는 너밖에 없어. 넌 반드시 왕이 될 거야.”
만달루테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예. 그럴 것입니다.”
***
캘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주색 비단 드레스를 사락거리며 걸어오는 왕비가 보였다.
우아한 몸짓, 턱을 들고 등을 빳빳이 세운 채 얼굴은 기품이 흘렀다. 걸을 때마다 조금씩 드러나는 금박 샌들조차 고귀한 그녀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캘리는 그 뒤에 따라오는 남자를 보았다.
만달루테 왕세자.
굳이 누군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왕세자는 왕보다는 왕비를 더 많이 닮았다. 하얀 얼굴과 옆으로 긴 눈매, 그리고 얇은 입술까지.
왕세자가 움직일 때마다 가슴팍에서 흔들리는 황금 사슬 목걸이에 자꾸만 눈이 갔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이라 그런 듯했다.
“탈리아.”
왕의 입술을 비집고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왕비의 차가운 눈빛은 왕을 한 번 보았다가 이내 아래로 내려졌다. 굳은 턱과 입매가 마치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하는 듯 차가운 냉기를 뿜는 듯했다.
왕세자도 마찬가지였다. 캘리를 보는 눈빛이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아르 왕은 그런 부인과 아들의 기색 따위 상관없다는 듯,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잃어버렸던 내 딸이오.”
왕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각오했으나, 막상 닥치니 동요하는 것이다. 왕세자의 눈길이 이제 대놓고 분노를 머금은 채 캘리를 향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평온한 사람은 오직 아르 왕뿐이었다.
“길스 경.”
“예. 폐하.”
“내 딸을 어찌 찾았는지 설명해 보시오.”
“예. 폐하.”
길스가 왕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래전, 폐하께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당시에는 낮은 신분의 여인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서역의 고귀한 집안의 따님이었습니다. 활달하고 호기심 많은 성격 탓에 여행자들 틈에 끼어 디콘스로 왔다가 폐하를 만나셨고, 그 기간이 아주 짧았고, 그 여인은 다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새빨간 거짓말.
이 방에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스 경은 말을 이었다.
“집으로 돌아간 여인은 아이를 가진 걸 알았고, 집안에선 그것을 불명예스럽다 하여, 여인을 오스피아로 보내버렸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아이를 낳은 여인은 얼마 가지 않아 죽었고, 그 딸은 수녀원으로 보내졌습니다. 폐하는 최근에 서역에서 온 상인을 통해 그 모든 사실을 전해 듣고 따님을 찾기 위해 저를 남쪽으로 보냈습니다.”
캘리는 아르 왕을 보았다. 마치, 이 지어낸 이야기가 진짜고, 몰랐던 딸의 존재를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웃고 있었다.
이런 얘기를 다 지어내 놓고 나를 데려온 것이다. 황금 소녀니, 마녀니, 그런 얘기가 나올 틈도 주지 않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