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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요. 말리 님.”
난쟁이 여자, 앤의 재촉을 받지 않아도 말리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치맛자락을 정강이가 보일 정도로 들어 올리고 계단을 빠르게 뛰어올랐다.
쾅.
문을 세차게 열고 들어가자마자 말리는 침대에 누워서 이쪽을 보고 있는 캘리와 눈이 마주쳤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말리는 진심으로 속삭였다. 눈앞이 흐려질 정도로 기뻤다.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해, 결국 숨이 끊어질 줄 알았던 캘리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부인…….”
말리는 침대로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캘리의 손을 잡았다.
“말리…….”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아직 기력이 회복되지 않아서인지, 힘이 없었다. 말리는 주름진 손으로 캘리의 손과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제가 틀렸습니다. 가망이 없을 거라고…….”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되었지?”
캘리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다시 물었다.
“베아투름을 떠나온 지, 얼마나 됐지?”
말리의 눈빛이 다시 흐려졌다.
“한 달이 조금 넘었습니다.”
“한 달…….”
그렇게나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독이 온몸에 퍼졌었습니다. 뭐든지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오래전에 공부했던 걸 썼는데…….”
캘리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말리가 말을 이었다.
“독을 다른 독으로 몰아내는 치유법이었죠. 워낙에 위험한 방법이라 시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저도 한 번도 안 해봤던 거였고.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죠. 그래서 써봤는데, 화살에 묻은 독은 몰아냈지만 제가 넣은 독이 그대로 남아 부인이 혼수상태에 빠진 거였습니다. 정신을 잃은 상태로 너무 오래되면 그 또한 목숨과 직결되는 거라…….”
한 달이나 깨어나지 못했으니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말리의 야윈 얼굴만 봐도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알 것 같았다.
“칸은…….”
캘리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을 입 밖으로 내놓았다. 말리가 고개를 젓는다.
“소식을 모릅니다. 베아투름에서 온 여행자를 수소문해서 들은 바로는, 공작께서 부인을 찾기 위해 추격대를 이끌고 떠났다는 것밖에는……. 그리고 저희가 현상금 사냥꾼들에게서 도망친 직후에 공작님이 그들을 따라잡았던 모양입니다. 그 후로는 어찌 되었는지 아는 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탈리는 죽었습니다.”
말리가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캘리의 눈빛도 서늘해졌다.
동정할 가치가 없는 여자였다. 하지만 궁금했다.
“누가 죽였지?”
“제가 만나본 여행자 말로는 칸이 직접 처단했다고 말하더군요. 베아투름에선 다들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그렇게 됐구나. 사랑하는 남자의 손에 죽임을 당했어.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기어이 마음을 못되게 먹고 남을 해하려 한 죄의 대가를 그렇게 치렀구나.
“말리.”
캘리는 노파를 보았다.
“예. 공작부인.”
“쉴라는? 그 아이의 생사는?”
말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때 화살에 맞은 후로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캘리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그 애가 화살을 맞고 추락하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눈물이 주룩,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전엔 쉴라가 보이지 않아도 그 애가 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건 다른 이에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캘리는 얼른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살아 있을 거야. 그 앤 강한 애야.”
그녀가 단호하게 말하자 말리가 미소를 지었다.
“예. 살아 있을 겁니다. 특별한 새니까요.”
“그래. 그 앤 특별해. 분명히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야.”
“예.”
그때였다. 갑자기 밖이 소란해지더니 문이 와락, 열렸다. 하얀 얼굴에 붉은 머리칼의 여자였다. 여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캘리를 내려다본다. 옅은 푸른 눈동자가 캘리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드디어 깨어났구나.”
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시죠?”
“난 다미아다.”
“날 아나요?”
“그래. 나는 너를 알지. 네가 태어나는 순간을 지켜봤으니까.”
순간, 캘리의 눈이 커졌다.
“내가 태어나는 걸 봤다고요?”
“그래.”
자신을 다미아라고 밝힌 여자의 눈을 보며 캘리는 물었다.
“내가 누구죠?”
“너는…….”
잠시 숨을 들이켠 여자가 말한다.
“디콘스의 하나뿐인 공주다.”
세상이 멈춰버렸다.
***
여관의 하녀가 나무 쟁반을 가지고 내려오는 것을 본 와이엇은 재빨리 다가가 물었다.
“좀 드셨나?”
하녀가 고개를 젓는다.
“아뇨. 거의 안 드셨습니다.”
하녀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내린 와이엇은 인상을 썼다. 과연, 음식이 접시에 쌓인 채 그대로였다. 하녀가 가버리자 와이엇은 인상을 쓰며 계단 위를 보았다.
먹을 건 가리지 않고 잘 먹던 칸이 지난 한 달간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있었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문드러지고 있을 게 뻔했다.
“저렇게 누르고 참기만 하다가 언제 터져버릴지…….”
“뭐가 터져?”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와이엇은 고개를 돌렸다. 오웬이었다. 표정이 좀 밝다.
“뭐, 좋은 일 있어?”
와이엇이 퉁명스럽게 묻자 오웬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아투름에서 전령이 왔어.”
순간, 와이엇의 눈이 커졌다.
“그래? 리안나는? 우리 애들은 다 잘 있대?”
오웬이 인상을 쓴다.
“여동생 소식은 안 궁금해? 우리가 떠나올 때, 심각한 부상을 입었었는데.”
와이엇은 손을 휘저었다.
“그 앤 전혀 걱정할 거 없어. 그 녀석이 우리보다 더 튼튼할걸? 다리에 그깟 자상 좀 입었다고 안 죽어.”
오웬이 피식, 웃었다.
“남매라 뭐가 통하긴 통하는 모양이네. 맞아. 빅토가 상처도 완벽히 나았다는군. 펄펄 뛰어다닐 정도라면서 여기로 오고 싶어 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죄책감이 들겠지. 부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그건 우리 모두가 다 느끼는 거야. 한 달이 넘도록 부인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오겠다는 거지. 빅토도 부인을 찾고 싶다고…….”
“거기나 잘 지키라고 해!”
와이엇이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잠깐만. 뭐야? 베아투름에서 온 전령이 아니라 빅토가 보낸 전령이야?”
오웬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베아투름에서 온 거나 다름없지.”
“그럼 다른 소식은?”
“다들 잘 있다는군.”
오웬이 슬쩍 편지를 감추며 얼버무리자 와이엇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입술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입을 꾹 다문다. 와이엇은 빅토와 오웬의 관계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칸이 오늘도 식사를 제대로 안 했어.”
와이엇이 다시 계단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리자 오웬도 시선을 올렸다가 내렸다.
“아마…… 부인을 찾기 전까진 상태가 나아지지 않을 거야.”
“그래서 걱정이라는 거야. 혹시라도…….”
와이엇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오웬의 얼굴도 서늘해졌다. 둘 다, 감히 입에 담지 못하는 가능성.
이미 늦은 것은 아닌지……. 공작부인이 이미 죽은 거라면…… 칸이 어떻게 될지, 둘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쉴라도 안 보이고…….”
와이엇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자 불길함이 배가된다. 공작부인을 찾지 못하는 것도 그렇지만, 말하는 새를 보지 못한 것도 불길함에 불을 지폈다.
‘바보들아. 공작부인이 죽으면 나도 죽어!’
그 시끄러운 새가 늘 하던 말이었다. 만약 쉴라가 나타난다면 공작부인이 살아 있다고 희망이라도 가질 텐데……. 그 새는 공작부인이 사라진 직후부터 지금까지 깃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길하고 불안한 것이다.
“안 되겠어. 내가 올라가서 말 좀 해야겠어.”
와이엇이 계단을 오르려 하자 오웬이 재빨리 잡아챘다.
“관둬.”
“왜?”
“말한다고 들을 분이야?”
“그렇다고 그냥 저렇게 둬? 저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오웬이 콧방귀를 뀌었다.
“칸이 쓰러져? 말도 안 되는 소리.”
“모르는 일이야. 칸은 지금 예전과 다르다고.”
“그래도 정신이 강한 분이야. 자기 몸 상태가 어떤지는 알고 있을 거라고.”
“나 참. 그래, 관두자. 관둬. 내가 말한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고. 오웬. 네 말이 맞기를 바라야지.”
다시 긴 한숨을 쉬던 와이엇은 몸을 돌렸다.
“가서 잠이나 자야겠어. 내일 새벽엔 북쪽에 있는 여관들을 뒤지러 가려면 잠을 자둬야지.”
“그래, 그렇게 해.”
와이엇이 가버리자 오웬은 고개를 들어 계단 위를 보았다. 와이엇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믿고 있었다.
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사내라는 걸.
***
캘리는 얼어붙은 눈으로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어둡고 낡은 드레스를 입었지만 붉은 머리카락 탓에 결코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눈빛 때문이다. 차갑고 서늘한 회색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여자가 결코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캘리에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 했죠?”
여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너는 디콘스의 하나뿐인 공주다.”
캘리는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잘못 아신 것 같네요. 전 그런…….”
“어머니를 전혀 기억 못 하니?”
순간, 캘리의 눈이 차갑게 굳었다.
“내…… 어머니를 알아요?”
“그래.”
“그분은…… 어디 있죠?”
“사라는 죽었어.”
캘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어머니에 대한 상상은 많이 했다. 그중에서 하나였다. 이미 돌아가시고 없을 거라는.
다만, 상상만 하던 것과 실체를 마주한 지금의 기분은 좀 다르다. 하지만 그리 슬프지도 않다. 어차피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라는 존재라 애초에 없는 것과도 같았다.
“내 어머니 이름이 사라인가요?”
“그래. 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니?”
“네. 수녀원에 가기 전의 기억은 전혀 없어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캘리는 그런 여자를 향해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여자가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네 어머니의 동생이야.”
순간, 캘리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여자의 미소가 흐려졌다.
“아름답게 자랐구나. 언니가 지금 네 모습을 봤다면…….”
여자는 목이 메는지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다시 고개를 든 여자는 캘리를 보며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너는 아르 왕의 딸이다. 너는 내 언니가 왕을 사랑해서 낳은 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