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98)화 (98/159)

98

캘리는 멀어지는 세 남자를 유심히 보았다. 루센을 데리고 정원에서 안뜰로 나오자 오웬과 와이엇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언가, 심각해 보였다.

“부인?”

캘리가 고개를 돌리자 빅토가 있었다.

“무슨 일이죠?”

“네?”

“오웬과 와이엇. 표정들이 너무 진지해요.”

“아, 그게…….”

망설임이 느껴진다.

“언젠가 내가 말했었죠? 만약, 베아투름에 문제가 생긴다면, 나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빅토의 얼굴빛이 슬쩍 흐려지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그리고 눈길을 돌려 세 남자를 보더니 다시 캘리를 보았다.

“이미 왔어야 할 전령이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캘리의 미간이 좁혀졌다.

“전령?”

“네.”

“어떤 전령이요? 누가 보낸 전령을 기다리는 거죠?”

“음…… 기다리는 전령이 하나가 아닙니다.”

캘리가 빤히 쳐다보자 빅토가 말을 이었다.

“우선, 겨울이 끝나고 첫 여행자들이 들어오기 전에 시타가 보낸 전령이 도착했어야 합니다.”

“시타라면……?”

“네. 칸이 펠리키로 보낸…….”

“하울의 전사.”

“네. 작년 겨울이 시작될 때, 칸은 시타를 펠리키로 보냈습니다.”

“기억나요. 우리가 베아투름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는 보이지 않았어요.”

“네. 시타는 그때 펠리키로 가서 겨울을 거기서 보냈습니다.”

“시타는 여기에 가족이 없나요?”

“네. 시타의 부족은 오래전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혼자예요. 자신이 원해서 칸의 정보수집가 역할을 하죠. 그래서 가끔 겨울을 펠리키에서 보내곤 했어요. 그렇게 펠리키에서 한겨울을 지내면서 모은 정보를 가지고 직접 베아투름으로 오거나, 아니면 전령을 보냅니다.”

“그건 좀 위험해 보이네요. 누가 중간에 가로채기라도 하면…….”

빅토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중간에 가로채는 놈이 있다고 해도 문자를 해석할 수는 없을 겁니다. 시타와 칸, 그리고 몇몇 기사들만 아는 비밀 문자를 사용하니까.”

“아.”

캘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빅토가 말을 이었다.

“시타는 겨울이 끝날 즈음에 반드시 전령을 보냅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칸이 기다리고 있을 걸 알고 있을 테니, 분명히 전령을 보냈을 겁니다.”

“근데, 아직 안 왔군요.”

“예. 그래서 칸이 얼마 전에 펠리키로 전령을 보냈습니다. 시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보려고요.”

캘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전령도 소식이 없군요.”

“네. 그래서 지금 좀 심각한 겁니다.”

“중간에 전령을 막는 자들이 있다는 건가요?”

“그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베아투름으로 올 때, 공격했던 자객들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또 다른 집단일 수도 있고…… 아직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캘리는 고개를 돌려 이젠 너무 멀어져버린 칸을 보았다. 그리고.

“빅토.”

“예. 부인.”

“왕이 칙사를 보낼까요?”

잠시 침묵하던 빅토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그럴 겁니다.”

캘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언제쯤일까요?”

잠시 망설이던 빅토는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겨울바람이 빠르게 물러가고 있습니다. 여행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곧이요. 부인.”

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봄은 새로운 시작이었고, 활기차고 싱그러운 계절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심기를 굳건히 하고 다가오는 봄을 맞아야 했다.

***

어둠이 짙게 뒤덮인 거리를 검은 망토 하나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차가운 돌바닥을 재빠르게 걸어간 남자는 몇 번이나 코너를 돌면서 굽이굽이, 복잡한 골목길을 꺾으며 도시 깊숙이 들어갔다.

매 순간, 주변을 경계하며 혹시나 쥐새끼가 따르는 것은 아닌지 살피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남자가 멈춰 섰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커다란 나무 문 앞이었다.

후드를 깊이 눌러쓴 남자는 문 앞에 서서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한 번 더 살핀 후에야 비로소 나무 문을 두드렸다.

딱, 딱, 딱딱, 딱, 딱, 딱딱.

마치, 암호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두드리는 소리에 잠시 후 문이 삐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을 연 사내가 후드를 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이내 텅 빈 거리를 살폈다. 역시나 떠돌이 개 한 마리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몸을 비켜섰다. 검은 후드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순간, 건너편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려 있던 시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타는 검은 후드의 사내를 쫓아 왔던 것처럼 빠르고 소리 없이 움직였다. 지붕 위를 새처럼 날아서 건너편 지붕에 착지하는 몸놀림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사위를 정확히 판별하는 것처럼 정확한 발놀림으로 움직였다.

시타는 울퉁불퉁한 벽을 타고 올라 불이 환하게 켜진 창가에 위태롭게 섰다. 발을 디딜 곳이라곤 벽체에서 조금 튀어나온 틈뿐이었다. 하지만 시타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창문 안을 들여다본 순간 시타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사?

검은 후드의 사내와 마주 보고 서 있는 남자는 시타가 아는 얼굴이었다.

현재 디콘스에서 권세를 누리는 마법사의 수장이었다.

“코르키.”

검은 후드의 사내가 마법사의 이름을 불렀다.

“그분께선 이 사태를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싶어 하시오.”

하울의 전사는 벽에 붙은 채 미동도 없이 안쪽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네. 우리에게도 그 여자는 절대 살아 있어선 안 될 존재야.”

“그럼, 뭘 망설이는 거요?”

“이미 손을 써놨어.”

“손을 썼다고? 자객을 이미 보냈다는 거요?”

시타는 마법사, 코르키에게 묻는 검은 후드의 사내를 보았다. 얼굴의 흉터가 횃불 아래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왕세자의 그림자.

저자가 행하는 모든 것은 왕세자의 명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은밀한 밀회 또한 왕세자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고.

소문이 사실이었다. 마법사들이 왕궁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른다더니…….

코르키가 피식, 웃으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물론 자객도 보냈지. 하지만 이런 쪽으로는 현상금 사냥꾼이 더 효과가 커. 그들은 돈을 준다고 하면 물불을 안 가리거든.”

“그건 자객도 마찬가지 아니오?”

“그래, 카리우스도 돈을 벌기 위해 죽이지. 하지만 그들도 기본적으론 전사야. 자기들 나름대로 규칙과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반면, 현상금 사냥꾼들은 규칙이나 명예 따윈 없지. 놈들은 그 여자를 잡는 즉시, 저울질을 할 거야.”

“돈을 많이 주는 쪽으로.”

“그렇지. 그럼, 놈들이 여자를 잡으면 이쪽에도 돈을 요구할 것이고. 놈들이 여자를 잡았다는 걸 아는 즉시, 카리우스가 일을 처리하게 만들어놨네.”

“실수가 없어야 하오. 혹시라도 일이 틀어져서 여자가 펠리키로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그림자의 말에 코르키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거야. 그전에 여자는 죽을 테니까.”

“타르엔은? 그쪽에서도 가만있지는 않을 텐데.”

“마녀들도 조만간 모조리 잡아들일 것이네.”

“은신처를 찾은 것이오?”

“거의.”

“확실하진 않군.”

“펠리키에 매음굴이 몇 군데나 되는 줄 아나? 거기를 다 헤집고 다니려면 마법사들만으로는 안 돼. 그러니 왕세자 전하께 말씀드려서 군사를 내어달라고 해.”

그림자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하오. 군사를 움직이면 왕의 귀에도 들어가게 될 거요. 그럼, 왕세자 전하의 입장이 곤란해져. 하지만 그대의 뜻은 전하께 전하겠소.”

그림자 기사가 후드를 다시 뒤집어썼다. 코르키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린다.

“마녀들의 규모가 커지고 있어. 더 두고 보다간 왕이 모르게 해결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고. 전하께 그 점을 꼭 강조해 주게.”

“그리 전하겠소.”

그림자 기사가 문을 향해 움직이자 시타는 벽에서 물러나 옆 건물의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마침, 검은 구름이 몰려와 밝은 달을 감추어 지붕을 타고 움직이는 시타의 모습을 완전히 삼켜주었다.

***

이른 새벽, 해가 뜨기 시작할 즈음의 하늘은 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베아투름과 달리 왕궁 도시, 펠리키는 완연한 봄이었다. 사방에 꽃이 피고, 나무마다 푸른 새싹을 파릇하게 피워대는 그런 봄의 아침이지만 하울의 전사에겐 그저 똑같은 날일 뿐이었다.

“시타.”

인적이 없는 뒷마당에서 말 위에 짐을 올리고 고정하고 있던 시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엘레나. 아니…….

“자작부인.”

시타는 굳은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후드를 벗으며 다가온 여자의 눈빛은 어두운 습기가 가득했다.

엘레나는 떠날 차비를 마친 말과 그 위에 올려져 있는 짐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난 네가 펠리키에 온 걸 이제야 알았는데…… 넌 다시 가는구나.”

시타가 묵묵히 있자 엘레나가 흐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날 보러 오지 않았어?”

시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넌 왜 아직 자작부인이야?”

일부러 상처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뱉어놓고 곧바로 후회했다.

“젠장. 무슨 상관이야. 빌어먹을.”

하울의 전사는 욕설을 지껄이며 말에 올라탔다.

“시타.”

엘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부른다. 시타는 눈길도 주지 않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시간이 없어. 지금 출발해야 돼.”

“베아투름으로 가는 거야?”

“…….”

“다시 올 거야?”

그제야 시타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오는 게 중요한가?”

돌아온다고 한들, 우리 사이가 변할까?

엘레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난 왕비 전하께 청을 드릴 거야. 자작과 이혼하게 해달라고…….”

순간, 시타의 얼굴이 굳었다. 엘레나의 눈에 물기가 차오른다.

“이혼할 거야. 더 이상은…… 죄를 짓고 싶지도, 기다리고 싶지도 않아.”

죄…… 그건 남편이 빨리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게 죄라면 난 벌써 화형당했어야 옳다. 네가 나보다 간절할까? 그 늙은 자작이 빨리 죽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나보다 더할까?

이혼. 믿고 싶다. 그녀가 늙은 자작에게서 벗어나 혼자가 된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시타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대로 해. 단,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러 올 시간에 이혼할 궁리나 해. 물론 이혼할 생각이 있다면 말이야.”

엘레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타는 고삐를 잡고 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뒤꿈치로 말 허리를 힘껏, 찼다.

“하!”

두두두두두. 새벽의 정적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젠 안 믿는다.

엘레나.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네가 자작과 결혼을 했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시타. 난 자작과 결혼해야 해. 너도 알잖아. 우리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걸.’

그때, 끝냈어야 했다.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이유로 늙은 자작과 결혼하겠다던 그때.

‘이혼할게. 기다려줘.’

여러 번의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는 기대라는 형태로 나를 고문했다.

‘미안해. 시타. 이번엔 어렵겠어. 어머니 병환이 너무 깊어져서…… 미안해. 시타.’

넌 한 번도 내게 신뢰를 주지 않았지.

이제 끝이다. 더 이상 못 믿을 여자에게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다.

나를 속이고 기만한 여자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순식간에 도시를 벗어난 시타는 광활하게 펼쳐진 들판을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젠 전령도 믿을 수 없다. 내가 직접 칸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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