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캘리는 그의 뒤쪽으로 시선을 더 멀리 던졌다. 거기엔 회색의 무거운 기운이 서려 있는 서쪽 탑이 있었다.
이 밤에 거긴 왜?
그녀는 서쪽 탑 쪽으로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갈 일이 없었다. 이 층부터는 기사들의 숙소가 있고, 지하에는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과 고문실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라이칸이 서쪽 탑에 갈 때는 주로…… 누군가를 심문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이젠 안다.
누굴까? 이 밤에, 눈길을 밟으며 라이칸을 저기로 불러낸 자는.
캘리는 다시 눈길을 내려 바로 아래까지 온 라이칸을 보았다. 그가 주탑으로 들어오는 걸 본 그녀는 몸을 돌려 침대로 갔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 옆으로 누워서 모피를 턱 끝까지 끌어 올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조용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철컥, 검을 벽에 세우는 소리, 스륵 스륵, 옷을 벗는 소리.
잠시 후, 침대가 기울었다. 그리고 조용히 몸이 겹쳐온다.
흠칫, 캘리는 피부를 스치는 냉기에 몸을 움찔했다. 그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불이 꺼졌었군.”
귓속으로 그의 속삭임이 밀려들었다. 몸은 차가워도 입김은 따스했다.
캘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 남잔, 정말 예리하다. 잠든 척해 봐야 소용이 없다. 매번 들킨다.
“어디 갔다 와요?”
그녀가 묻자 그가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고 웅얼거렸다.
“밖에, 잠깐.”
더 묻고 싶었다. 무슨 일인지, 심각한 일인지.
하지만 캘리는 묻지 않았다. 그 어느 질문에도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는…… 라이칸은 내가 걱정하거나, 고민할 수 있는 빌미를 주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모든 걸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고 싶어 한다. 가끔은 그게 나를 답답하게 하고 불만스럽게 하지만, 지켜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아니까, 뭐라고 할 수도 없다.
그녀를 안은 손길이 깊어졌다. 가슴을 움켜쥐고 더 바싹 닿는 몸이 이젠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잠들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던 정열이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캘리는 기꺼이 남편의 손길에 반응했다. 척추를 휘고, 엉덩이를 그에게 붙이면서 가쁜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
“로이.”
말리는 선술집 안, 구석에서 엎어져 자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다가가서 등짝을 두드렸다. 하지만 술에 취한 남자는 살짝 두드리는 것 가지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로이!”
말리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손을 내려찍었다. 고함 소리는 술집 안의 왁자한 소리에 묻혔지만 등짝을 때린 매서운 일격은 결국 남자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젠장. 뭐야? 어떤 놈이 감히…….”
마족 남자가 게슴츠레한 눈을 들어 올렸다. 순간, 앞에 있는 얼굴을 보고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 말리 님.”
“잘하는 짓이다. 심부름 좀 하랬더니, 여기서 술이나 처먹고 있어? 내가 준 은은 술 마시는 데 다 쓴 거냐?”
“아, 아닙니다. 저는 딱 한 잔만…….”
“망할 놈. 아이까지 딸린 놈이라 살림살이에 보태라고 심부름꾼으로 썼더니……. 이제부터 심부름값은 네 마누라에게 줘야겠다.”
“말리 님…….”
“내가 전달하라고 한 약초와 편지는 공작부인께 갖다드린 것이냐?”
“아, 제가 지금 갖다드리려고…….”
말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게 언제 말한 건데 아직도 안 갖다 줬어! 망할 놈! 당장 움직여!”
“예!”
말리의 서슬에 놀란 남자가 허겁지겁 일어나서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말리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여자가 주저하는 목소리로 부른다.
“말리 님. 저희 남편한테 가보셔야…….”
“아, 그렇지. 내 정신 좀 봐. 자네 남편 상처를 봐주려고 여기까지 와놓고…… 어디 있다고 했지?”
“이 층에 있습니다. 이쪽입니다.”
여자의 안내를 받으며 말리가 물었다.
“어쩌다 다친 것이라 했나?”
“뻔하죠. 술 취한 사내들끼리 싸우다가 얻어터진 겁니다. 내가 술을 그렇게 작작 마시라고 했건만. 아까 그 사내도 그렇고, 술이 원숩니다. 원수.”
“그러게 말이네. 적당히 마셔야지, 원.”
여자와 말리가 이 층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둘을 지켜보고 있던 그림자 하나가 사람들 무리에서 걸어 나왔다. 검은색 망토를 입은 그림자가 천천히 후드를 벗자 얼기설기 땋아 내린 적갈색 머리칼이 늘어졌다.
계단 위를 노려보던 여자는 갑자기 몸을 홱 돌려 선술집을 빠져나갔다.
술집을 나가서 주변을 둘러보던 여자의 입꼬리가 늘어졌다. 역시, 조금 전 말리에게 혼쭐이 난 사내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졸고 있었다.
“로이.”
여자는 남자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든다. 말리가 쫓아온 게 아닌 걸 깨달은 남자가 배시시 웃었다.
“어…… 나탈리 아가씨.”
남자가 자신을 알아보자 나탈리는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서 잠들면 얼어 죽어. 안으로 들어가자.”
“안 돼요. 안엔 말리 님이 계세요. 난 말리 님 심부름을 해야 돼요.”
“그럼 내가 머무는 곳으로 가자. 여기서 가까워. 거기서 잠깐 몸만 녹이고 가. 내가 고급 시드르를 따뜻하게 데워줄게.”
고급 시드르라는 말에 남자는 혹했다.
“정말요?”
“응. 얼마 전에 펠리키에서 온 여행자들이 가지고 온 거야. 잘 익은 포도로 담근 거라는데, 맛이 기가 막혀.”
남자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나탈리는 그런 남자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어서 가자. 오늘 밤은 맘껏 시드르를 마실 수 있어.”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
나탈리는 웃어 보이고 후드를 다시 썼다. 그리고 남자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
“안 돼. 루센. 기다려.”
사냥개보다 훨씬 커진 루센이 캘리가 들고 있는 닭고기를 보고 달려들었다. 안 된다고 소리쳐도 루센은 자꾸만 앞다리를 들어 그녀를 쳤다. 그 힘에 밀려 휘청거리면서도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루센의 끈질김에 결국 항복한 캘리가 고기를 주자, 그걸 보고 있던 라이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좀 더 엄하게 해야지. 그런 식으론 절대 길들일 수 없어. 주인을 우습게만 여기지.”
하지만 캘리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얜 날 우습게 보지 않아요. 어딜 가든 날 지켜준다고요.”
그리고 어차피 무리로 돌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입 안에 맴도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하루라도 더 미루고 싶었다. 그가 잊고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열흘 후에 빙벽으로 갈 거야. 그때 루센도 데려갈 거고.”
라이칸의 말에 캘리의 눈이 굳었다가 이내 흐려졌다.
“열흘 후요?”
그렇게 빨리?
“지금도 늦었어. 더 늦어지면 이 녀석은 그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존재가 돼.”
잠시 망설이던 캘리는 줄곧 생각하고 있던 걸 결국 입 밖으로 냈다.
“여기서 우리와 계속 살면 어때요? 다른 이들을 위협하지도 않고, 날 지켜주잖아요. 이 녀석을 훈련시키는 건 다른 이를 시켜서…… 라이칸. 당신이 해도 되죠. 루센도 당신은 무서워하니까. 당신이 엄하게 하면 얘도 훈련이 될 거예요.”
안 될 거라는 건 알지만 한 번쯤 말을 해보고 싶었다.
라이칸이 나직한 한숨을 쉬더니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안 돼. 녀석은 은빛 늑대야. 지금은 어려서 인간들이나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지만 조만간 늑대의 본성을 드러낼 거야.”
“하지만…….”
“무리의 리더가 돼야 할 놈이야. 인간들 틈에서 개처럼 살 순 없어. 은빛 늑대의 특성이지.”
캘리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당신처럼?”
“뭐?”
그가 눈빛을 좁히자 캘리는 일부러 웃었다.
“당신도 그렇잖아요. 베아투름의 영주로 태어났고, 영주로 자랐고, 영주가 된 남자, 그 어떤 전쟁에서든 승리로 이끄는 무적의 기사. 당신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남자죠.”
라이칸의 입꼬리가 슬쩍 휘었다.
“그리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 살아야 할 남자지.”
그가 입술을 내려 키스했다. 캘리는 눈을 감았다.
그래도…… 베아투름의 영주로서, 워렌 공작으로서의 의무가 더 중한 사람이죠.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고.
잠시 후, 그가 놓아주었을 때, 캘리는 다시 루센을 보았다.
그래, 이 아이도 라이칸과 같다. 내 욕심을 채우려고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있게 된다면, 불행한 삶일 것이다.
캘리는 라이칸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알았어요. 대신, 부탁이 있어요.”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캘리는 눈에 힘을 주고 강하게 말했다.
“나도 빙벽에 같이 가겠어요.”
“안 돼.”
그가 돌아서서 걷기 시작하자 캘리는 재빨리 따라갔다.
“왜요?”
“위험해.”
“빙벽 밖으로 나가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안쪽은 위험하지 않다면서요?”
“거긴 금녀의 구역이야.”
“설마, 거기 있는 병사들이 나 때문에 동요할까 봐 그래요?”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내려다본다.
“어떤 놈이 감히 공작부인을 보고 다른 마음을 품어.”
“그러니까요. 그 어떤 남자도 감히 내게 눈길조차 주지 못하죠. 그러니까 문제없잖아요. 난 그냥 루센이 무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을 뿐이라고요.”
“빙벽에 간다고 해서 루센이 무리로 돌아가는 걸 보진 못해. 우린 빙벽 밖으로 나가서 디아르고 숲속까지 들어갈 거야.”
“그쪽으로 가는 모습만이라도 보게 해줘요.”
라이칸은 인상을 썼다.
캘리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이길 재간이 없다.
“알았어.”
“고마워요!”
그녀가 와락 안겨들었다. 때를 맞춰서 와장창 소리가 났다. 퍼뜩, 뒤를 돌아본 캘리가 루센이 떨어트린 물건을 보고 맙소사, 하더니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달려간다.
라이칸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눈빛이 서늘해졌다.
며칠 전에 서쪽 탑에 잡혀왔던 음유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 펠리키에선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마녀에 대한 소문이 파다합니다. 겨울이 완전히 지나가면, 디콘스 전역. 아니, 대륙 전체로 퍼져나갈 겁니다.’
‘공작부인에 대한 소문은?’
‘그건 아직 소문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도 여기에 들어오고 나서야 공작부인이 황금빛 머리칼을 가졌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베아투름의 폐쇄적인 지형 덕이었다. 오는 길이 험하고 척박해서 드나드는 이가 적은 탓에 여기 일이 밖으로 퍼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이곳을 다녀간 여행자들이 다니는 곳마다 소문을 내는 것이 전부지만 그들의 말은 원래 과장되고 거짓이 많이 섞여 있어서 믿는 이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소문이 나는 건 시간문제다. 무엇보다, 왕과 왕세자가 알고 있다. 엘프 여왕도.
그의 눈이 차가운 빛을 머금었다.
무작정 그녀를 숨긴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이칸.”
그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렷다. 그녀가 이쪽을 보며 손을 흔든다. 햇살에 부딪쳐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머리칼. 하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건, 맑고 환한 미소였다.
문득, 뜨거운 것이 치솟아서 심장 아래까지 뻐근하게 차올랐다.
그녀가 루센과 술래잡기라도 하듯 깔깔, 웃으며 이쪽으로 달려온다. 라이칸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웃음 섞인 비명을 지르는 그녀를 양팔에 꼭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뛰어노느라 가빠진 숨이 그의 입 안으로 섞여 들었다.
입술을 떼자 가쁜 호흡을 내뱉고 있는,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하늘을 품은 눈동자, 매끄럽고 하얀 피부, 웃음이 감도는 미소.
그녀의 모든 것이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라이칸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지킬 것이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