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96)화 (96/159)

96

“네.”

캘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없어. 전혀.”

“수녀원에 가기 전의 기억도 전혀 없고요?”

“응.”

“수녀원에 갔을 때가 여덟 살 때였다고 했나요?”

“그랬지.”

“어릴 때 부모와 떨어져 다른 곳으로 간 거라면, 기억이 강렬히 남았을 것 같은데…… 혹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닐까요?”

캘리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근데, 가끔 꿈을 꿔.”

“어떤 꿈이요?”

잠시 망설이던 캘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화형당하는 꿈.”

“…….”

“사실은 그게 나인지도 확실하진 않아. 어떨 땐 나로 보이다가, 또 어떨 땐 내가 구경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화형당한 장소는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광장 한가운데였어. 주변엔 건물이 많고, 화형당하는 곳 뒤에 아주 크고 웅장한 건물이…….”

캘리는 자신이 꿈속의 배경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랐다. 설마, 하는 눈빛으로 말리를 응시했다. 그러자 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직접 목격하신 걸 꿈으로 꾸시는 듯합니다.”

“그럼…… 화형당하는 여자는…….”

내 어머니일까?

캘리는 차마 묻지 못했다. 말리도 거기에 대해선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 광장에 대해 더 말씀해 보십시오. 기억나는 건, 다 말해 보세요.”

“왜?”

“어쩌면 제가 알고 있는 곳일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제가 아는 곳이라면 이번에 떠날 때, 가보겠습니다. 혹시 그 광장에서 정말 화형이 일어났다면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캘리의 눈이 커졌다.

어쩌면…… 그래, 말리라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불에 타 죽은 여자가 내 어머니라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을 테고.

“광장은 굉장히 넓었어. 주변 건물도 아주 많았고…… 아, 교회 탑도 있었는데, 아주 높은 탑이었어. 그리고…….”

캘리는 오랫동안 반복해서 꿨던 꿈속의 이야기를 열심히 기억해 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말리가 창밖을 보더니 웃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성으로 돌아가셔야죠.”

“그래.”

“방금 말씀하신 광장은 제가 펠리키에 가면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떠나기 전에 연락 줘.”

“예.”

캘리는 혹시라도 마지막이 될지 몰라서 말리를 꼭 껴안았다.

“자네가 가면 난 많이 서운할 거야.”

“아주 가는 것도 아닌걸요.”

“그래도…….”

말리는 말을 준비하고 이쪽을 보고 있는 칸을 보고 웃었다.

“칸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캘리는 포옹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갈게.”

말리는 마주 웃어주고 캘리와 함께 밖으로 향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뜨거운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에 붉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라이칸과 오웬이 서쪽 탑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테드가 다가왔다.

“이쪽입니다.”

테드는 탑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겁에 질린 얼굴의 남자가 바닥에 꿇어앉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라이칸을 본 남자는 철퍼덕 엎드리며 울먹였다.

“죄송합니다, 공작 전하. 전 몰랐습니다. 맹세코, 그 양피지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몰랐습니다.”

라이칸은 천천히 다가갔다.

“고개를 들어라.”

남자는 공포에 질려서인지, 말을 듣지 않았다. 보다 못한 테드가 나서서 윽박질렀다.

“공작께서 고개를 들라 하지 않는가.”

그제야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범벅인 얼굴로 입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음유시인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라이칸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 시인의 망설임이 길어진다. 그러자 테드가 다시 나섰다.

“묻는 말에 바른대로 고하지 않으면 너를 불손한 세력으로 알고 그에 상응한 벌을 줄 것이다.”

순간, 남자의 눈이 커졌다.

“불손한 세력이라니요! 전, 그냥 음유시인일 뿐입니다.”

“그래서? 어디서 왔냐고!”

테드가 다시 윽박지르자 남자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페, 펠리키에서 왔습니다.”

남자의 대답에 라이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겨울을 왕궁에서 보냈는가?”

남자가 놀라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왕궁이요? 아닙니다. 절대.”

남자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거리의 악사들과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는 음유시인입니다. 가끔 선술집이나 매음굴에도 불려가긴 하지만 궁에는 들어가 본 적도 없습니다.”

라이칸의 매서운 눈이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가 한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양피지에 뭐가 적혀 있는지도 모르면서 왜 여기까지 들고 왔지?”

“그런 게 짐 보따리 안에 있는 것도 몰랐습니다. 베아투름에 도착해서 짐을 풀다가 발견한 겁니다. 생전 처음 보는 글자들이 적혀 있기에, 이게 뭐냐고 사람들에게 물었을 뿐입니다. 그러자 어떤 오드아이 노파가 다가와서 그걸 뺏어간 겁니다. 그게 전붑니다.”

침묵이 흘렀다. 라이칸은 다시 남자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그러자 오웬이 슬쩍 다가와서 중얼거린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습니다.”

라이칸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도 쉽게 믿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사내에게서 위험의 냄새가 나진 않았다.

“테드.”

“예. 칸.”

“이자를 돌려보내.”

“예. 알겠습니다.”

명을 내리고 돌아서서 걸어가던 라이칸은 갑자기 멈춰 서서 다시 음유시인을 돌아보았다.

“펠리키에서 겨울을 지냈다고 했나?”

“예. 공작 전하.”

“황금 소녀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가?”

순간, 남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또다시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걸 보니, 뭔가 있는 듯했다. 라이칸은 완전히 몸을 돌려 시인을 차갑게 응시했다.

“말하라.”

시인이 겁에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자, 작년에, 겨울이 시작될 즈음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소문?”

오웬이 재촉했다. 머뭇거리던 시인이 다시 웅얼거린다.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마녀에 대해서…….”

“마녀?”

테드가 험악한 인상을 쓰자 남자가 재빨리 덧붙였다.

“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그런 소문이 빠르게 돌기 시작하더니 겨울을 지내는 동안 펠리키 전체에 퍼졌습니다. 술집에 모인 사람들이 내내 그 얘기를 하고, 아이들이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고 다니고, 어디를 가도 그 얘기가 떠돌았습니다. 저와 함께 온 여행자들에게 물어보시면 제가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실 겁니다.”

“정확히 어떤 소문인지, 상세히 고하라.”

라이칸의 목소리는 서늘하고 날카로워서 잘 갈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시인의 얼굴은 겨우내 펑펑 쏟아지던 눈처럼 하얗게 질렸다.

“마녀가 다시…… 나타나서 인간과 다른 종족을 해할 거라고…… 불을 일으켜 세상을 태울 거라고…… 전하! 저는 몰랐습니다. 공작부인이 황금빛 머리칼을 가졌다는 건, 이곳에 들어온 후에야 알았습니다. 진짭니다. 믿어주십시오!”

시인이 다시 바닥에 엎드리며 몸을 떨었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라이칸의 눈이 깊은 어둠을 품고 지옥의 불처럼 푸르게 빛나는 것을. 하지만 오웬과 테드는 보았다.

그들은 모두 불안한 기운을 감지했다.

베아투름에 어두운 그림자가 차츰 드리워지고 있다는 것을.

***

캘리는 잠결에 한기를 느끼고 눈을 떴다.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다. 내내 옆에 있었던 라이칸의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았다가 다시 창문을 응시했다. 달이 휘영청 떠 있는 걸 보면, 아직 한밤중인데…… 라이칸은 어딜 간 걸까?

그보다.

캘리는 몸을 일으켜 벽난로를 보았다. 불이 꺼져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이 방의 벽난로는 아침까지 불이 꺼진 적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네.

그녀는 침대에서 다리를 내렸다. 순간, 냉기가 다리를 타고 심장까지 차오른다.

후우, 춥다.

살을 찢는 것 같은 한기.

봄이라지만 아직 추위는 남아 있었다. 캘리는 맨살을 찢을 듯 달려드는 추위에 몸을 떨며 벽난로로 걸어갔다. 아직 불에 타지 않은 장작이 꽤 남아 있었다. 불이 꺼진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다 문득, 아차, 하는 생각에 벽난로 안을 뒤적였다.

역시.

숨구멍을 안 내놨네.

캘리는 자신이 한 실수를 발견하고 머쓱하게 웃었다.

“잘한다, 캘리. 라이칸한테 할 수 있다고 큰소리쳐 놓고…….”

결국 방 안을 얼음장으로 만들어버렸네. 라이칸이 이걸 못 봤으니 망정이지.

한심한 듯 혀를 몇 번 찬 그녀는 아무도 없는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고 굳게 닫힌 문까지 확인한 후에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눈을 감자 손끝으로 어떤 힘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화륵, 불길이 솟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캘리는 눈을 떴다. 빨간 불빛이 푸른 기운을 머금고 활활 타오르는 걸 묵묵히 응시했다. 얼음장이었던 방 안도 금세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녀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젠 잘하시네요.’

말리는 불의 기운을 다스리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처음엔 그 말에 저항했다. 불을 다루고 싶지 않다고.

‘불을 만들기 위해 훈련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본인이 가진 재능이라도 그걸 다룰 수 없다면, 재능이 재앙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공작부인께서 그 능력을 숨기고 싶다면, 일단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능력부터 키워야 합니다.’

난 내가 가진 능력을 숨기고 싶었다. 그래서 말리의 충고대로 겨우내, 불을 다루는 연습을 했다. 이젠, 사람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불을 만들 일은 없게 됐다.

“말리 덕분이지.”

캘리는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중얼거렸다.

말리 덕분에 약초에 능통해졌고, 약한 병과 상처 정도는 봐줄 수 있는 치료술도 익혔다. 게다가 베아투름의 살인적인 추위를 뚫으며 약초를 캐러 다닌 덕분에 피부도 제법 단단해졌고, 한겨울 내내 빅토와 함께 활과 검술을 연습한 덕분에 어리숙하지만 제법 여전사 흉내를 낼 수 있게 됐다. 실전에 닥치더라도 허술한 기사 한둘쯤은 이길 수도 있으리라.

겨울 동안 꽤나 많은 일을 했다. 그러면서 나는 몸과 마음이 조금 더 강해졌지.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간 그녀는 눈이 쌓인 안뜰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겁도 없이 수녀원을 뛰쳐나왔을 때가 엊그제처럼 가까운데, 지금의 나는 그때의 캘리가 아니다.

아리안 수녀님이 살아 있었다면, 지금의 날 보고 뭐라 하셨을까?

‘어른이 됐구나.’

대견한 듯 그렇게 말씀해 주셨을 것이다.

캘리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였다. 눈 끝에 무언가가 움직이는 걸 느꼈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에서 익숙한 인영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성큼성큼, 당당한 걸음걸이와 아무리 먼 거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풍채.

라이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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