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83)화 (83/159)

83

어둠이 내리고 붉은 빛이 내몰리듯 밀려나면서 밤하늘이 자리 잡았다.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의 별들이 촘촘하게 박힌 검은 장막이 머리 위에 드리워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웠고 별비가 쏟아질 것처럼 장엄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라이칸이 말없이 가리킨 손끝으로 고개를 돌리자 캘리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해가 지기 전에는 하얀 설산이었던 그곳 너머에서 에메랄드빛 그림자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길어지고 넓어지면서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눈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수천 마리의 말들이 거대한 녹색 비단을 물고 달려오는 것처럼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들의 머리 위까지 찬란한 빛이 드리워졌다.

밝은 녹색의 밤하늘에 분홍과 보라색 빛이 잔물결을 일으키며 형형색색의 빛줄기를 그리는 것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 빛은 별들이 수놓아진 밤하늘을 가르며 끊임없이 움직였다.

아름답다라는 표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황홀했다.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고,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감동이었다.

“내가 장담했었지. 베아투름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머리 위에서 울리는 나지막한 속삭임이 그녀의 멍한 의식 속을 파고들었다.

캘리는 몸을 돌려 그와 마주 섰다. 에메랄드빛이 그의 검은 머리칼을 물들이고 깊은 눈빛을 영롱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가 쓰다듬듯 올려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두껍고 단단한 팔이 가느다란 그녀의 몸을 감싸서 품속으로 당겼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마주쳤다. 이제 호수의 수증기가 아니라 그들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로 주변이 뜨겁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캘리는 열정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뻐근하게 차오르는, 벅찬 감동이 심장을 빠르게 채우고 머릿속을 빠듯하게 메웠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순간,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다.

“왜 우는 거지?”

캘리는 미소를 지었다.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다. 목이 메어 겨우 입 안의 말을 뱉어냈다.

“아름다워서…… 너무 좋아서…….”

모든 것이.

벅차오르는 숨을 가다듬은 그녀는 다시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베아투름은 너무나 멋진 곳이에요. 그리고…… 당신도.

캘리는 그의 얼굴을 두 손을 감싸 쥐고 아래로 당겼다. 고개를 들고 입술을 겹치며 뜨겁게 속삭였다.

“나의 공작님.”

흠칫, 그가 멈췄다. 그녀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는 라이칸의 눈빛이 녹색의 밤하늘처럼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으스러질 듯, 힘껏 안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모든 것이 꿈같았다.

캘리는 그 순간 다짐했다.

이 순간을, 이 아름다운 꿈을 가슴에 새길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남자를 놓지 않을 것이다. 어떤 위험이 닥쳐도, 반드시 내가 찾은 행운을 지켜낼 것이다.

***

“왜 그렇게 넋을 잃고 있어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빅토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부드러운 모피로 덮여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리안나가 보였다. 아기에게 젖을 물린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네?”

빅토는 멍하게 물었다. 리안나가 인상을 쓴다.

“고민 있어요? 먹을 거 앞에 두고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 거, 처음 봐요.”

빅토는 그제야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음식들을 내려다보았다. 손에는 갈색으로 잘 익혀진 닭 다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빅토는 닭 다리를 내려놓고 물었다.

“와이엇은요?”

뜨거운 호수에서 늦게 돌아와서 저녁 식사가 늦은 탓도 있지만, 그래도 집 안에서 와이엇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리안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뻔하죠, 뭐. 검술 연습을 하러 간다고 나갔는데, 지금까지 안 들어오는 걸 보면 또 오웬하고 술이나 퍼마시고 있겠죠.”

“화 좀 내요. 리안나가 너무 순하니까, 와이엇이 막 노는 거예요. 리안나가 한번 화나면 어떻게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러나 몰라. 하여튼 단순하다니까.”

“그 단순한 면이 좋아서 결혼하고 애 낳고 살잖아요.”

리안나가 웃으며 대꾸하자 빅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년의 반은 전쟁터에 나가 있고 나머지 반에서 반은 술집에서 사는 남자가 뭐가 좋다고.”

“술집은 괜찮은데, 전쟁터는 안 나갔으면 좋겠어요. 근데, 다들 그러더라고요. 이제 칸이 전쟁터에 나가는 걸 줄일 거라고.”

리안나의 눈이 기대와 희망으로 빛났다. 빅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도 그래요. 사실, 그동안 칸은 너무 자주 출정했죠.”

“이젠 달라질 거예요.”

“맞아요. 오늘도 칸과 부인을 모시고 뜨거운 호수에 다녀왔는데, 두 분이 서로 바라보는 눈빛이 정말 뜨겁더라고요. 그런 부인을 두고 전쟁터에 나갈 수 있겠어요? 한번 나가면 몇 달을 못 볼 텐데.”

“그렇죠? 그럼 우리 아이들도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아도 되겠네요.”

빅토는 짐짓 고개를 갸웃했다.

“빈자리는 계속 느낄 것 같은데요? 낮에는 검술 연습하러 나가고, 밤엔 술집에 나가니까.”

“매일 그러는 건 아니니까 괜찮아요. 심하면 제가 저지할 거고.”

빅토는 리안나의 부드러운 미소를 감탄하듯 보았다.

“와이엇이 어떻게 리안나 같은 여자를 만났을까요? 리안나가 없었다면, 그 인간은 주정뱅이로 살았을 거예요.”

“어머.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와이엇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눈 삔 여자들.”

빅토가 단호하게 말하자 리안나가 곱게 눈을 흘겼다.

“설마,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니죠?”

“처음에, 리안나는 와이엇한테 눈길도 안 줬잖아요. 와이엇이 혼자 반해서 목숨 걸고 쫓아다녔지.”

“맞아요. 그랬죠.”

리안나가 옛일을 떠올리듯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빅토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 와이엇은 리안나가 세상 전부인 양, 돌격했죠. 와이엇의 인생을 둘로 나눈다면, 리안나를 만나기 전과 후예요. 그건 제가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음…… 제 생각엔, 칸도 그런 것 같은데요?”

리안나의 말에 빅토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맞아.”

두 여자는 마주 웃었다.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와이엇이라는 남자로 인해 피를 나눈 자매처럼 가까워진 두 여자는 그렇게 편안한 침묵을 즐겼다. 그러다 문득, 빅토의 미소가 흐려졌다.

“리안나.”

빅토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리안나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네?”

“리안나는 궁과 가까운 도시에서 살았잖아요. 혹시…… 마녀를 본 적 있어요?”

“마녀요?”

“네.”

“직접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여러 가지 소문을 많이 들었죠.”

“어떤 소문인데요?”

“뭐, 나쁜 소문들이죠. 마녀가 주술을 걸어서 인간을 해한다거나, 돌연변이를 만들어서 종족의 근간을 흐트러뜨렸다는 것들. 마녀가 궁에 불을 질렀다고도 했고.”

“저도 그 얘긴 들었어요. 왕비의 처소가 있는 곳이었다죠?”

“네. 그 사건이 마녀를 사냥하고 몰살시키는 계기가 됐죠. 한편에서는 마녀를 옹호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마녀도 결국 마법사와 같은 부류라고. 하지만 승리한 건 결국 마법사였어요. 난 어렸을 때라 잘 모르지만, 마녀를 잡으러 군사들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마녀를 숨겨준 백성들도 같이 화형을 당하고……. 수년간, 정말 끔찍했다는 얘길 들었어요.”

“리안나는 마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요……. 전, 잘 모르겠어요. 마법을 부리는 건, 마녀나 마법사나 비슷한 것 같아요. 근데, 갑자기 마녀는 왜요?”

“그냥요. 좀 궁금해져서…….”

“빅토.”

“네?”

리안나가 희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말리는 마녀일까요? 마법사일까요?”

순간, 빅토의 얼굴이 굳었다.

“말리가 불을 다룰 수 있어요?”

그러자 리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하지만 주술을 부리잖아요. 마녀들이 전부 불을 다룰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들었어요. 불을 다루는 건 분명히 마녀라고 하지만…….”

빅토는 리안나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리안나 생각엔…… 마녀나 마법사나, 다 같은 종족이다?”

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빅토는 다시 물었다.

“만약…… 베아투름에 불을 다루는 마녀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리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베아투름에 불을 다룰 줄 아는 여자가 있단 소린 못 들어봤는데요?”

“그러니까 만약에요. 여행자들 중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글쎄요……. 다른 지역이었다면, 당장 처형당하겠죠. 하지만, 여긴 베아투름이고, 그 마녀가 주술을 걸어 다른 종족을 해하는 짓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 칸은 죄를 짓지 않은 이에게 무작정 벌을 내리는 영주는 아니니 처형까지는 시키지 않겠죠. 어쨌든, 베아투름도 디콘스의 일부로서 왕의 명을 따라야 하니까…… 추방하는 걸로 처리하지 않을까요?”

“마녀를…… 숨겨주면, 어떤 벌을 받게 되죠?”

“화형.”

순간, 빅토의 눈이 일그러졌다. 리안나가 품속에서 칭얼거리는 아기를 어르며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바로는 그래요. 예전에 마녀를 숨겨준 귀족 얘길 들었어요.”

“어떻게 됐어요?”

“작위와 영지. 재산까지 전부 박탈당하고 화형됐다고 들었어요.”

리안나는 아기에게 다시 젖을 물리느라, 빅토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

아침 일찍 나갔던 라이칸은 해가 질 즈음에 성으로 돌아왔다. 집무실에서 스리디오에게 재정 상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던 캘리는 그가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지체하지 않고 홀로 나갔다.

성큼성큼, 긴 다리로 홀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그를 보자, 새삼스럽게 가슴이 쿵쾅거린다.

“오셨어요? 곧 저녁 식사가 준비될 거예요. 오늘은 요리사가 특별히 절인 청어를 구워서……!”

가솔들이 지켜보는 자리라 한껏 우아하고 고상하게 말을 이어나가던 캘리는 갑자기 그가 손목을 움켜잡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당황한 그녀의 물음에도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계단 아래에 있는 라일라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저녁 식사는 방에서 하겠다. 준비되는 대로 가져와.”

빠르게 말을 마친 그가 다시 그녀를 이끌고 나머지 계단을 올랐다. 너무 빠른 걸음에 숨까지 거칠어진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끌어안는 그의 품에서 헐떡였다.

“라이칸.”

그녀가 불렀지만 그는 대꾸도 없이 드레스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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