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82)화 (82/159)

82

“이쪽은 동물의 뼈가 기록된 것입니다. 가축이나 짐승들에 대한 것은 뼈와 함께 특성들을 기록했죠.”

맙소사.

캘리는 진심으로 존경하는 눈으로 말리를 보았다.

“이걸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겠군.”

말리가 웃는다.

“오래 걸렸죠. 아주 오래.”

캘리는 말리를 유심히 보았다. 하얀 머리칼과 주름진 얼굴을 보면 나이가 많아 보이긴 했다. 나이가 들었어도 여자는 여자였다. 여자에게 나이를 물어보는 실례를 할 수 없어서 선뜻, 물어볼 수가 없었다.

“평생이 걸렸겠어.”

“예. 평생이 걸렸죠.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것이고. 아, 저쪽은 약초에 관련된 기록입니다. 아이고, 저런. 또 헤집어놨네.”

말리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흐트러져 있는 양피지를 다시 차곡차곡 쌓는다.

“누가 헤집어놨다는 건가?”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여길 드나드는 건, 저와 제프리밖에 없는걸요.”

“제프리? 칸의 견습 기사, 제프리?”

“예. 그 제프리죠. 하지만 그 앤 견습 기사로 불리는 것보다 종복으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할 겁니다.”

“난 제프리가 이런 걸 좋아하는 줄은…….”

말끝이 희미해져 갔다. 그러고 보니.

‘저는 제프리가 제 뒤를 이어서 성안의 관리를 맡아줬으면 하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스리디오도 그렇게 말했고, 제프리 본인도 서임을 받고 정식 기사가 될 생각이 없다고 했었다. 그럼 왜 칸의 견습 기사가 된 걸까?

의문을 갖던 그때였다. 조용히 뒤에 서 있기만 하던 빅토가 나직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제프리는 부친의 강요로 견습 기사가 된 겁니다. 집안에 기사가, 그것도 토르 기사단의 기사를 배출하는 것이 제프리 부친의 꿈이거든요. 스리디오는 원하는 대로 살라고 했지만, 조부보다는 부친의 영향력이 더 크니까요.”

순간, 캘리의 눈이 다시 커졌다.

“조부라고?”

빅토가 눈을 끔벅거렸다.

“모르셨습니까? 제프리는 스리디오의 손잡니다.”

“아. 몰랐어요. 아무도 그런 얘길 해주지 않아서…….”

“스리디오는 원래 입이 무겁죠. 전 칸이 말씀해 주셨을 거라고……. 하긴. 스리디오보다 입이 더 무거운 이가 칸이니까…….”

빅토가 웃었다. 캘리도 그 말에 공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제프리도 치료에 대한 관심이 있나?”

“예. 제프리는 온갖 것에 배움의 욕심이 있습니다.”

“기사가 되는 것 빼곤 다 하고 싶어 하지요.”

빅토가 덧붙이자 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분명하고, 가야 할 길을 정했다면, 그것도 행운이죠.”

“부인도 그러신 것 같은데요? 이렇게 기록지에 흥미를 보이시는 걸 보면.”

빅토가 말하자 캘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빅토의 말이 맞네요. 나도 배움에 대한 욕구가 있어요.”

“그건 좋은 거지요.”

말리가 웃으며 칭찬해 준다. 문득, 캘리는 말리를 보았다.

“스리디오 말로는 자네가 베아투름에 오기 전에도 대륙 곳곳을 다녔다던데……?”

“예. 그랬지요.”

“혹시 나와 같은 머리칼을 가진 사람을 본 적 있나? 아니면, 다른 종족이라도.”

“아니요. 못 봤습니다.”

“그럼…….”

캘리는 슬쩍 빅토를 보았다. 그러자 빅토가 눈치를 채고 묻는다.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잠시 망설이던 캘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있어요. 빅토도 알고 있는 게 좋겠어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싫었다. 하지만 이젠 두려운 것이 없어졌다. 라이칸이 버티고 있는 한은, 세상의 어떤 불행과 어려움도 그를 넘어서지 못할 테니까.

캘리는 말리를 보았다.

“불을 다룰 줄 아는 종족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있나?”

옆에 선 빅토의 눈이 커졌다. 캘리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와이엇을 비롯한 정예 기사들의 충심이 깊다는 걸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공작부인이 불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절대 함구하라는 지시를 그 누구도 어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빅토도 지금 이 얘기를 처음 듣고 놀라는 것일 테고.

말리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는 게 전부였다.

“불을 다루는 종족에 대해선 압니다.”

순간, 캘리의 눈이 화악, 커졌다.

“안다고?”

“예.”

“어떤 종족이지?”

말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신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라고들 하더군요.”

“신의 선택? 사제 같은 거?”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사제는 신을 모시는 인간이지만 신족은…….”

“신족?”

“예. 신족은 신을 모시는 사람이 아니라 신의 선택을 받아서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인간이라고 합니다.”

“불을 다루는 것 같은 능력 말인가?”

“예. 간혹, 예지력을 가진 신족도 있습니다.”

“예지력? 앞날을 본다고?”

“예.”

“그런 사람이 진짜 있단 말이야?”

“세상은 넓고 여러 종족이 존재하죠. 그런데 가끔은 종족의 구분을 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가령, 하프 엘프나 시타 같은 하울족은 종족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렵죠. 신족도 그런 인간 중 하나라고 보면 될 겁니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인간.”

“아.”

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말리가 가만히 물었다.

“부인은 마법사와 마녀를 어찌 구분하십니까?”

“그건…….”

말리의 질문에 캘리는 말문이 턱, 막혔다.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그녀가 아는 건, 마녀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종족으로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악이라는 거였다.

“마녀는…….”

입술을 뗐지만 역시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다른 종족에게 해를 끼친다는 소리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를 끼쳤다는 것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었다.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모르는 거였다.

“사실, 난 마녀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나쁘다는 소린 수도 없이 들었지만…….”

“어떻게 나쁘다고 하던가요?”

“다른 종족에게 해를 끼치는 주술을 펼치고, 돌연변이를 만들고, 불을 지르고…….”

캘리는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선명한 장면 때문에 말끝을 흐렸다.

나무 기둥에 묶여 있는 한 여자. 발밑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그 붉은 화염 사이로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슬픈 눈빛. 바람에 나부끼는 금빛 머리칼…….

“부인. 부인?”

캘리가 미동도 없이 서 있자 빅토가 걱정스럽게 불렀다. 캘리는 얼어붙은 눈으로 빅토를 보았다가 이내 말리를 보았다.

걱정 어린 빅토의 눈과 달리 말리의 눈은 평온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캘리는 속에서 일렁이다가 솟구쳐 오르는 말을 내뱉지 않기 위해 입술을 꼭 깨물어야 했다. 하지만, 그 불길한 의문이 피를 타고 심장과 머릿속을 온통 점령해 버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내가…… 정말, 마녀일까?

의문이었지만, 그건 이미 확신에 가까웠다.

***

뜨거운 호수는 들었던 대로, 신의 내린 축복이었다.

우윳빛의 푸른 물결의 온천수는 주변이 온통 검은 용암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검은색과 연푸른색의 물결이 신비로운 대조를 이루고 거기에서 피어나는 수증기가 마치 신의 영역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저길 봐.”

바로 뒤에 서 있던 칸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캘리는 고개를 돌렸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하얗게 눈이 덮인 설산 위로 푸른 아지랑이가 넘실거렸다.

“곧 날이 저물 거야.”

칸의 목소리가 꿈결인 듯 들려왔다. 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눈빛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렇듯 뿌듯하고 환한 그의 얼굴은 처음 본다.

더 보여줄 것이 남았다는 듯, 기대와 즐거움이 넘실거렸다.

갑자기 그가 옷을 벗어 던졌다. 캘리는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이칸.”

“걱정 마. 아무도 안 보니까. 그 누구도 접근하지 않도록 경계를 서게 했어.”

실오라기 하나 없이 알몸이 된 그의 몸은 눈이 부셨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넓은 어깨와 우람한 어깨 아래로 돌처럼 딱딱해 보이는 가슴팍과 배.

그는 거대했다. 거칠고 장엄한 자연 경관에 완벽히 어울리는 전사였다.

“벗겨줘?”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아뇨. 내가 벗을게요.”

입고 있는 망토를 천천히 벗었다. 그리고 드레스를 벗기 시작했다. 라이칸이 성큼 다가왔다. 그는 오늘 인내심이 없었다. 빠른 손길로 옷 벗는 걸 도와준다. 마침내 두 사람은 태어날 때의 그 모습처럼 알몸이 된 채 서로를 보았다.

냉혹한 한기가 그녀의 여린 살을 긋고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호수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발끝에 닿는 온기가 종아리와 허벅지를 타고 순식간에 심장까지 다다른다. 그리고 조금씩, 천천히, 몸이 뜨거운 물속으로 잠겨들었다.

아.

찰랑이는 물살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에워싸자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캘리는 라이칸을 돌아보았다. 바로 뒤에 붙어 서서 두 팔로 그녀를 감싸고 있는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완벽하게 안전했고, 더할 수 없이 따뜻했다.

돌이켜 보면, 북부의 추위에서 결코 견뎌낼 수 없을 거라고, 그토록 두려워했었다는 게 민망할 정도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

그가 뒤에서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설산을 보았다. 푸른 아지랑이가 희미해지고 붉은색이 사방을 온통 물들이고 있었다.

“아름다워요.”

“곧 더 좋을 거야.”

더 기대해도 좋다는 듯한 목소리에 캘리는 미소를 지었다.

이 남자가 안달하고 있다. 내게 자신의 영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리고, 그의 안달엔 이유가 있었다. 잠시 후, 캘리는 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황홀한 광경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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