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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칸 (79)화 (79/159)

79

라이칸은 모포로 그녀를 완벽히 감쌌다. 찬 공기가 최대한 살에 닿지 않도록 꽁꽁 싸맨 후, 가볍게 안아 들고 방을 나가서 계단을 내려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와이엇이 다가왔다.

라이칸은 곧장 와이엇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와이엇이 걸음을 멈추고 먼저 밖으로 나가서 다른 기사들과 위병들에게 거리를 넓히라고 신호를 보냈다.

푸른빛이 옅게 감도는,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베아투름의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이니만큼 공기가 살을 찢을 것처럼 차가웠다.

라이칸은 그녀를 먼저 말에 앉히고 곧바로 뒤에 올라탔다. 모포에 둘둘 말린 그녀의 몸을 한 팔로 강하게 끌어안으며 망토 자락으로 한 번 감쌌다. 그리고.

“하.”

옆구리가 차인 벤투스가 곧바로 튀어나갔다. 그 뒤로 와이엇과 위병들이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르기 시작했다.

라이칸과 함께 탑으로 돌아온 그녀는 침대에 눕혀져도, 따뜻한 모포를 덮어줘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손으로 하얀 뺨과 이마를 어루만져 보았다. 열은 없었다. 약초의 기운은 전부 사라진 듯했다.

밤을 하얗게 지새운 덕에, 그녀는 오늘 하루 종일 기운을 차릴 수 없을 것이다.

라이칸은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이불을 꼼꼼히 덮어준 다음 돌아섰다. 그때였다. 갑자기 자신의 손을 잡는 희미한 기운을 느낀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하얀 손이 그의 손가락 끝을 잡고 있었다.

라이칸은 시선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 그녀가 희미하게 웅얼거린다.

“죽이지…… 말아요.”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녀가 다시 힘없이 중얼거렸다.

“불쌍한…….”

여자예요.

잦아드는 목소리의 끝은 라이칸의 머릿속에서 완성됐다.

나탈리.

그는 가만히 손을 올려 그녀의 뺨을 천천히 쓸었다. 허리를 굽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걱정 마.”

라이칸은 캘리의 숨이 깊어지는 걸 확인한 후 돌아서서 벽난로의 불을 살폈다. 활활, 타오르는 것이 해가 뜰 때까지 꺼질 염려는 없었다.

침대를 다시 한번 본 그는 검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자 스리디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나탈리 아가씨 문제는 제가 더 확실히 조치를 취했어야 했는데…….”

“어디 있나?”

라이칸이 서늘한 목소리로 묻자 스리디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빅토가 서쪽 탑,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갔습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라이칸은 홀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

어둡고 습한 계단을 내려가자 평소보다 많은 횃불이 곳곳에서 환한 빛을 뿜어냈다.

라이칸이 들어서자 앞에서 횃불을 들고 걷던 위병이 코너를 돌았다. 그러자 너른 공간이 나타났다.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은 파리했다.

“칸.”

어둠 속에서 빅토가 걸어 나왔다.

“성벽 밖 마을에 있는 친구의 집에 숨어 있었습니다.”

“공작님…….”

나탈리의 눈빛은 절박했다. 하지만 라이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나탈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미약하게나마, 아주 조금이라도, 동정하는 마음이라도 있다면, 저렇게 무심한 표정일 순 없었다.

죽일 수도 있겠구나.

내 어머니와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믿음이 순식간에 깨져버리고 공포가 밀려왔다.

“살려 주세요…….”

나탈리의 목소리는 어둠에 휩싸였다. 희망의 불빛이 꺼지고 싸늘한 아픔이 심장을 누른다.

라이칸은 나탈리를 곧게 응시했다. 여자의 크고 반짝거리던 눈은 서리가 내린 것 같았고, 입술은 푸른 기가 감돌았다. 북부의 추위에 길들여진 어둡고 단단한 피부는 햇살 한 줌 없는 이곳에서 초라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왜 그랬지?”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지만 낮게 울렸다. 나탈리가 눈꼬리를 내리며 울먹인다.

“부인이 미웠습니다. 내게서 공작님을 뺏어간 그 여자가…….”

“너는 아직도 망상에 사로잡혀 있군.”

“전 그저 공작님을 사랑한 죄밖에 없습니다. 공작님은 제게 유일한 분이십니다.”

“헛꿈을 꾸었군.”

나탈리의 눈이 공허함으로 가득 차올랐다.

“제겐 헛꿈이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유일한 바람이었습니다. 공작님이 저를 어여쁜 아이라고 해주었을 때부터. 공작님은 저를 누이라고 하셨지만 저는…… 여인으로 곁에 있고 싶었습니다. 공작부인이 되지 못해도 저를 찾아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게 잘못인가요?”

라이칸은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나는 분명히 말했다. 너는 내게 여자가 될 수 없다고.”

“절 아끼셨잖아요.”

“네 어머니를 봐서 너를 보살펴준 거지.”

“그럼 저를 계속 보살펴주세요. 제 어머니를 봐서라도.”

“아니. 난 너를 충분히 봐줬어.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네가 성의 안주인 노릇을 하는 것도 묵인했고, 네가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줬다. 그만하면 네 어머니에 대한 보답은 충분히 했어.”

“아뇨. 충분하지 않아요. 내 어머니는 나보다 공작님을 더 자식처럼 아끼고 위했어요.”

“너는 꼬여도 한참 꼬였군. 네 어머니는 너를 위해서 내게 잘한 거야. 네가 평생 내 보살핌을 받기를 바랐지. 그분이 내게 직접 한 말이다.”

나탈리의 눈이 커졌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고요? 하지만 난…….”

“넌 선을 넘었어. 이제 넌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죄인일 뿐이야.”

“결혼하기 전엔 저를 다정하게 대해주셨잖아요! 그 여자가 오기 전까진 저를 누이로라도 대해주셨어요! 근데, 그 여자 때문에……. 공작님은 온통 그 여자만 보셨죠. 저 같은 건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고!”

나탈리는 발악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라이칸의 눈이 서늘한 칼을 머금었다.

“너는 아직 모르는군.”

한겨울 바람처럼 서슬 퍼런 목소리가 낮게 울리자 나탈리가 움찔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공작부인보다 제가 먼저였습니다.”

훗.

라이칸은 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너를 죽여야 한다.”

나탈리의 눈이 커졌다.

“저를…… 죽이신다고요?”

“너는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를 해하려고 했어.”

나탈리는 고개를 저었다.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라이칸이 눈짓하자 옆에 서 있던 위병이 나탈리의 드레스 뒤쪽을 잡고 쫘악 찢었다.

여자가 거칠게 신음했다. 하지만 라이칸은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죄를 지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그는 조용히 한 발 물러섰다. 그러자 위병이 팔을 크게 움직이며 차가운 채찍을 내려쳤다. 가느다란 가죽이 공기를 가르고 매끄러운 등을 후려쳤다.

“아악!”

여자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라이칸은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채찍이 몇 번이고, 사정없이 여자의 등에 내려꽂혔다. 흠집 하나 없이 부드러웠던 등은 칼날이 스치며 난도질을 한 것처럼 검붉은 선을 그리고 그 틈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아악, 아악!

비명을 지르다 결국 정신을 잃고 무너진 나탈리를 보고서야 위병이 채찍질을 멈췄다.

라이칸이 눈짓을 하자 위병이 구석에 놓여 있던 물을 퍼서 나탈리의 얼굴에 뿌렸다. 순간, 여자가 날카로운 숨을 뱉으며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는 나탈리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고통으로 탁해진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본 라이칸은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공작부인에게 감사해라. 너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내 아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니까.”

툭, 턱을 놓자 고개가 푹, 꺾였다.

라이칸은 몸을 바로 세웠다.

“빅토.”

“예. 칸.”

“여자를 성벽 밖으로 내보내고, 봄이 오는 즉시 베아투름에서 영원히 추방한다.”

“예. 알겠습니다.”

라이칸은 나탈리를 보았다.

“이 시간 이후로, 나와 내 아내 앞에 다시 나타나면 내가 직접 너를 죽일 것이다.”

***

라일라가 등 뒤로 쿠션을 두툼하게 받쳐주자 캘리는 거기에 기댔다. 움직일 때마다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옷을 입는 것도 힘에 부칠 정도였다.

“이거, 드세요.”

라일라가 컵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마님이 주무시는 동안, 말리 님이 다녀가셨습니다. 원기를 회복하는 데 좋은 약초랍니다. 이거, 드시고 나면 야채로 끓인 스튜도 드셔야 돼요. 몸이 너무 무리를 했다고 말리 님이 걱정을 하셨습니다.”

캘리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붉어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얼른 컵을 받아서 약초 물을 마셨다. 쓴맛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하지만 라일라를 빨리 내보내고 싶어서 억지로 들이켰다.

빈 컵을 받아 든 라일라가 환하게 웃는다.

“잘하셨어요. 이제 스튜를 가지고 올게요.”

“아니. 생각 없어. 그냥 좀…… 더 자고 싶어.”

“안 됩니다. 뭐라도 드셔야죠. 드시고 주무세요.”

라일라는 단호하게 말하고 방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마침 하녀가 스튜가 올려진 쟁반을 가지고 왔다. 그 쟁반을 건네받은 라일라는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다 드셔야 해요.”

캘리는 어쩔 수 없이 숟가락을 들고 스튜를 한 입 떠먹었다. 배가 고픈 줄 몰랐는데, 적당히 간이 잘된 스튜 한 입을 먹자 배 속이 요동을 치며 반긴다. 허기가 밀려들었다. 그녀는 열심히 숟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순식간에 그릇을 비운 캘리는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배가 고팠던 모양이야.”

라일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침대에서 푹 쉬세요.”

캘리는 문득 물었다.

“혹시, 그 여자는 어찌 됐는지 알아?”

라일라의 얼굴이 단박에 험악해졌다.

“나탈리 말씀입니까?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 감히, 공작부인께 그런 불순한 짓을 하려 하다니 그 여잔 엄벌로 다스리는 게 맞습니다.”

캘리의 눈이 커졌다.

“죽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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