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72)화 (72/159)

72

“왜, 날 여기로 데려왔어요?”

“사람들은 새로운 공작부인이 빛의 정원의 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은 공작부인이니까…….”

“그래.”

캘리는 시선을 살짝 내렸다가 들면서 물었다.

“빛의 정원? 이곳의 명칭인가요?”

“그래.”

“어울려요.”

캘리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화초들이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잡초들도 무성하고. 조금만 손을 대면 더 멋진 화원이 될 것 같았다.

“내가 할게요. 어차피, 여기 있는 동안은 내 역할을 잘하기로 했으니까.”

그의 눈빛이 굳는 게 보였다.

왜? 당신이 원하는 게 이런 거잖아.

공작부인 노릇.

캘리는 시선을 피하며 괜스레 중얼거렸다.

“여긴 덥네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캘리는 허리를 굽혀 힘없이 축 처진 줄기를 손으로 받치며 말했다.

“해는 충분하니 물을 더 자주 줘야겠어요. 잡초도 제거하고.”

“도와줄 사람을 붙여주지.”

캘리는 몸을 일으켜 그를 보았다.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어요. 더 넓은 마당도 관리해 봤어요.”

그가 물끄러미 본다.

“수녀원에서?”

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

그녀가 눈을 가늘게 좁히자 그가 다시 말한다.

“마을 구경을 하고 싶어 했다던데.”

일부러 말을 돌린다. 왜?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네. 그러고 싶어요. 마을 구경도 하고 싶고, 뜨거운 호수에도 가보고 싶어요.”

“축일이 지난 후에 데려가주지.”

“그 전에도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줬으면 좋겠어요. 빅토와 호위 기사들이 있으니까.”

“아직 드나드는 여행자들이 있어서 위험해.”

“자주 나가지 않을게요.”

“…….”

“성안에만 있으니 답답해요.”

안 된다고 할 것 같았다. 그가 안 된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알았어. 빅토에게 말해 두지.”

캘리는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이 꿈틀,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는 밝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정원 관리, 잘할게요.”

***

“누구?”

의자에 앉아 있던 캘리는 라일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탈리 아가씨가 뵙기를 청합니다.”

“나탈리?”

“네. 나탈리 아가씨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워렌 공작부인의 먼 친척인데, 영주님께서 어릴 때 어머니처럼 돌봐주신 분입니다. 나탈리 아가씨는 그분의 따님입니다.”

“그럼, 칸과 함께 자랐겠군.”

“예. 이 성에서 함께 생활하시다가 얼마 전, 성 밖 마을로 나가서 살고 계십니다.”

“왜 나갔지?”

“그건…….”

라일라가 망설이는 걸 본 캘리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라일라.”

“예. 마님.”

“난 여기 와서 라일라에게 의지를 많이 하고 있어. 라일라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아닌가?”

라일라의 얼굴이 흐려진다.

“예. 전 진심으로 마님을 좋아합니다.”

“그럼, 뭐든 숨김없이 말해 줘. 날 위한다는 생각으로 뭔가를 숨기면, 그게 나를 더 해하는 거야.”

잠시 망설이던 라일라가 고개를 살짝 들고 입을 열었다.

“나탈리 아가씨는 영주님의 부인이 되기를 고대하셨습니다.”

캘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라일라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영주님께 나탈리 아가씨는 그저 여동생 같은 존재였습니다. 항간에선 두 분이 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꽤 오랫동안 떠돌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마님이 여기 오신 후로 더 확실히 깨달았고요.”

“그게 무슨 소리지?”

“영주님께서 부인을 대하시는 걸 보면 그동안 나탈리 아가씨는 정말 여자로서 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난 아직 이해를 못 하겠어. 칸은 나를 특별대우 해주는 것도 없는데…….”

“아닙니다. 마님. 영주님은 마님을 아주 깊이 위하고 계십니다.”

라일라가 단호하게 말했지만 캘리는 속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이곳에 와서 라이칸은 전혀 다정하지 않은데…… 라일라는 뭘 보고 저러는 걸까? 얼마 전, 집무실에서 나를 대하던 그의 모습을 봤다면 저런 말은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그럼 나탈리는 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몹시 실망했겠군.”

“예……. 그래도 현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왕의 명이셨고, 영주님은 그 명을 어길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성 밖으로 나간 건가?”

“나탈리 아가씨가 원해서 나간 건 아닙니다. 오히려 아가씨는 이곳에 남아서 새로 오실 공작부인의 말동무라도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영주님께서 스리디오에게 명을 내려 성 밖에 집을 마련해 주라고 하셨죠.”

“그럼 그 아가씨는 날 미워하겠군.”

라일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탈리 아가씨는 하녀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편이라…….”

캘리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직접 만나보면 알겠지.”

치맛자락을 살짝 든 캘리는 방을 가로질러 나갔다. 그 뒤를 라일라가 따르고 있었다.

***

“그래, 그쪽으로 옮겨라.”

작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캘리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름다운 여자였다. 적갈색 머리칼이 허리까지 내려오고 옅은 하늘색 드레스가 하늘하늘, 몇 겹이나 겹쳐져 있는 풍성한 치맛자락까지.

“그래. 거기가 좋겠어.”

응접실 한쪽에 놓여 있던 장식품이 창가로 옮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걸 옮기라고 지시한 이는 적갈색 머리칼의 여자였다.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뒤에 있던 라일라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나탈리 아가씨. 공작부인이 오셨습니다.”

순간, 여자가 뒤를 돌아본다. 드레스 자락이 나풀, 휘날렸다. 캘리는 가슴이 도드라지게 드러난 여자의 앞모습을 보고 놀라서 눈을 크게 뜨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인형처럼 예쁜 얼굴에, 피부는 살짝 어둡다. 몸매는…… 남자들이 환장할 정도로 육감적이다.

“공작부인.”

여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새침한 얼굴이 웃으니 그나마 조금 인간다워 보였다.

“나탈리 소이렌입니다. 뵙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여자는 정말 환영하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가워요. 소이렌 양.”

“나탈리라고 불러주세요. 라이칸도 그렇게 부르는걸요.”

여자가 그를 스스럼없이 라이칸이라고 불렀다. 그게 캘리의 신경을 자극했다. 불쾌하다. 여자는 이쪽의 안색이 흐려진 걸 모르고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진작 찾아뵈려고 했는데 부인께 안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내내 참고 기다렸답니다. 늦었지만, 그런 일을 겪어서 안됐습니다. 몸은 괜찮으세요?”

“네. 나아졌어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라이칸은 아들을 참 원했는데…….”

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자기가 라이칸과 특별한 관계라도 되는 양 말한다.

한숨을 푹, 내쉬던 여자가 갑자기 다시 밝은 미소를 지었다.

“꼭 뵙고 싶어서 얼마 전 직접 오기도 했었답니다. 인사를 여쭙기만 하고 가겠다고 했는데…… 스리디오가 그러더군요. 라이칸이 성 안팎의 경계를 강화하라는 명을 내려서 안 된다고. 사실, 라이칸이 여기 있었다면 저는 들여보내 줬을 텐데……. 아실지 모르겠지만, 스리디오는 융통성이 없답니다.”

부드럽고 친절한 말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 속을 긁는다.

캘리는 창가에 장식장을 옮겨놓고 나가려는 하녀를 보았다.

“마리. 그건 왜 거기다 놨지?”

놀란 하녀가 나탈리를 한 번 보더니 대답했다.

“나탈리 아가씨께서 이건 여기 놓는 게 좋다고 하셔서…….”

“제가 옮기라도 했습니다. 부인. 저 장식품은 돌아가신 공작부인이 아끼시던 건데, 빛을 받으면 더 아름다워 보이거든요. 오래전부터 저 자리에 있던 거랍니다.”

마치, ‘너는 나만큼 이곳을 몰라.’라고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도 같았다.

정했다. 저 여자완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

“참. 방금 지나오다 보니까 빛의 정원에서 사람들이 일을 하더군요. 혹시 부인이 시키신 건가요? 거긴 돌아가신 공작부인과 공작님이 아끼던 곳이라 아무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곳이랍니다. 그래서 라이칸도 그곳을 다른 이가 손대는 걸 싫어합니다.”

실소가 나온다. 이 여자는 대체 자기가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라일라의 말대로라면 라이칸과 성에서 함께 자랐을 뿐이지, 그 어떤 관계도 아니라고 했는데.

‘나탈리 아가씨는 영주님의 부인이 되기를 고대하셨습니다.’

라일라가 한 말이 떠올랐다. 편견을 가지고 싶지 않았지만, 이젠 그게 불가능할 것 같다.

라이칸의 고모인, 네이스 백작이 해준 말이 떠오른다.

‘영주의 부인은 영지 내의 모든 여자들을 제압할 필요가 있어. 그래야 쓸데없는 분란이 일어나지 않아. 서열은 신분이 높다고 해서 저절로 정해지는 게 아니야. 첫 만남에서 확실한 기선제압. 그게 아주 중요해.’

캘리는 턱을 들어 올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그렇군요. 하지만 이제 이곳의 주인은 나예요. 그러니 이 성안의 모든 사소한 일은 내가 결정하죠.”

말을 멈춘 캘리는 뒤에 서 있는 하녀를 불렀다.

“라일라.”

“예. 마님.”

“장식품을 원래 자리로 옮겨.”

“예. 마님.”

라일라가 얼른 달려가서 장식품을 들어서 있던 자리로 가져갔다.

캘리는 나탈리의 굳은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알다시피 지금은 내가 공작부인이에요. 그리고, 이제 빛의 정원의 주인은 나예요. 라이칸이 내게 직접 그렇게 말했죠.”

나탈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라이칸이 직접? 그럴 리가…….”

“그의 허락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그 귀한 정원의 주인이 됐겠어요?”

“…….”

“오늘은 내가 정원 정리를 하는 일정이 빠듯해서 소이렌 양을 오래 접견할 수가 없군요. 나중에 또 오고 싶으면 미리 기별을 넣으세요. 그땐 여유롭게 차를 마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돌아서던 캘리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탈리.”

“예…… 부인.”

“앞으론 영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랫사람들도 있는데, 아무나 영주님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면 좋게 보이지 않을 것 같거든요.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건, 부부 사이엔 당연하지만 그대는…….”

아니지. 내가 그의 부인이고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캘리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탈리도 그 의미를 알아채고 얼굴을 굳혔다.

캘리는 하얗게 굳은 나탈리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재빨리 쫓아온 라일라가 조용히 속삭인다.

“마님. 약을 드실 시간입니다. 빛의 정원으로 가져가겠습니다.”

그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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