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60)화 (60/159)

60

그때였다. 갑자기 무언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흙 속으로 불쑥 들어온 그 손은 그녀를 잡고 힘껏 당겼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녀의 몸이 쑤욱, 위로 당겨지기 시작했다.

땅을 뚫고 올라온 그녀에게 다시 언데드의 손들이 달려들자 라이칸이 그 손들을 가차 없이 잘라냈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흙으로 뒤덮인 그녀를 번쩍 안아서 벤투스 위에 앉히자마자 급하게 달려오는 말 하나가 보였다.

“칸!”

오웬의 커다란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그가 곧바로 그녀의 뒤에 올라탔다.

그녀가 타고 다니던 하얀 말이 불안하게 머리를 흔들어댔다.

“하!”

벤투스가 달리기 시작했다.

제프리가 하얀 말의 고삐까지 움켜쥐고 뒤를 따랐다. 오웬이 그들의 뒤를 엄호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땅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팔이 튀어나오고 벌떡,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검은 물체들이 보였다. 라이칸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 무심코 돌아본 순간, 그녀의 눈은 공포로 얼룩졌다.

여기저기서 막 튀어나온 놈들이 어마어마한 수로 불어나더니 눈바람이 불어닥치듯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전속력으로 숲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캘리는 되도록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숲의 끝이 보이고 확 트인 광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기사들이 말한 벙커도, 그 위용을 드러냈다.

작은 회색 창고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웬만한 규모의, 작은 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건축물이 들판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 있었다. 생긴 건 그냥 네모반듯한 모양이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튼튼한 돌로 견고히 쌓아 올린 것이었다.

“칸!”

뒤따라오던 오웬이 소리를 질렀다. 캘리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라이칸의 검이 공기를 갈랐다. 순간, 옆에서 달려들던 언데드의 머리가 댕강 잘려나가면서 피가 솟구쳤다. 캘리는 비명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꽉 잡아.”

머리 위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캘리는 말의 갈기를 움켜잡았다. 죽은 자들이 다시 달려들며 기이한 비명 소리를 쏟아냈다.

끼이익, 으허헉, 우허어어어.

하늘은 완전히 어둠으로 뒤덮였다. 이젠 뒤에서 쫓아오는 것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라이칸과 제프리, 오웬의 검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놈들의 목을 쳐내고 있었다. 그 수가 너무 많아서 피가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파앗, 팟.

으허어어어어어.

목이 잘려나간 후에도 비명 소리는 이어졌다. 몸에서 분리된 대가리가 입을 쩍쩍 벌리며 울부짖었다. 그 끔찍한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벙커에서 기사들이 달려 나와 엄호를 하자 라이칸과 제프리는 더 빨리 내달렸다.

그때였다.

“으악!”

언데드 하나가 제프리에게 달려들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져 미처 대처를 못 한 제프리가 말에서 떨어졌다. 그걸 본 라이칸이 고삐를 세게 당기자 벤투스가 히이잉, 비명을 지르며 앞발을 쳐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달려드는 언데드 두 개의 목을 순식간에 잘라버렸다.

오웬이 달려와 몰려드는 시체들의 목을 끊임없이 쳐내고 있었다. 그 틈에, 라이칸은 그녀에게 소리쳤다.

“고삐를 잡아!”

캘리는 곧바로 고삐를 잡았다. 그가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제프리를 잡아서 그녀의 뒤에 올렸다. 제프리가 그녀의 허리를 잡는 순간, 또다시 달려드는 놈들의 목을 라이칸이 쳐내기 시작했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바로 눈앞에 있는 걸 봤는데, 눈 한 번 깜박이면 뒤에 있을 정도였다. 오웬이 달려와 그녀의 옆에서 지원에 나섰다.

“달려!”

그가 고함을 쳤다.

그녀는 갈 수 없었다. 그를 두고는.

하지만 라이칸이 다시 소리쳤다.

“가!”

그리고 다시 달려드는 놈들에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떠오른 달빛에 반짝이는 검이 공기를 가르자 핏빛 선율이 사정없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

벙커에서 달려 나온 와이엇이 커다란 검을 휘두르며 지원에 나섰다. 오웬이 캘리를 향해 소리쳤다.

“부인. 가야 합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캘리는 벤투스의 허리를 걷어차며 제프리에게 소리를 질렀다.

“꽉 잡아요!”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오웬이 그녀의 옆에서 달려드는 시체의 목을 잘라내고, 벙커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그녀를 위해 두 갈래로 갈라져 입구를 텄다.

벤투스는 빠르게 벙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말을 세우자마자 테드가 달려와 제프리를 부축해 내렸다. 캘리도 빠르게 말에서 미끄러지듯 뛰어내렸다. 절박한 눈빛이 입구를 향했다. 칸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와이엇과 기사들이 말을 타고 뒤따르고 있었다. 포기를 모르는 언데드들은 그 뒤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문을 내려라!”

테드가 소리를 지르자 육중한 돌문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캘리는 치맛자락을 꼭 쥐고 심장을 움켜쥐었다.

아.

그를 본 캘리는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라이칸에게서 빛이 났다. 그를 감싸고 있는 동그란 빛의 띠는 마치 달의 주변에 생기는 달무리 같았다. 그 자신이 빛을 내는 것도 아닌데 사방에서 빛이란 빛은 다 모여들어 그를 감싸는 것처럼 보였다.

빨랐다. 라이칸은 달리는 말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뛰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기사들보다 앞서서 달려오는 그의 모습은…… 인간이 아니었다. 마치…… 보름달이 떴을 때, 그 특유의 하얀 빛을 뿜는 늑대와 같았다.

라이칸이 내려오는 돌문 아래를 통과하자 뒤이어서 기사들도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맨 마지막으로 와이엇이 달려왔다. 허리를 숙여야 할 만큼 좁아진 돌문 틈으로 겨우 통과한 순간, 언데드들이 한꺼번에 딸려 들어왔다.

쿵!

뒤늦게 들어오려던 시체들 위로 돌문이 내려앉았다. 허리가 잘린 채, 버둥거리며 기어오는 언데드들을 본 와이엇이 검으로 사정없이 목을 찍어 내렸다. 나머지 언데드들도 기사들의 날렵한 검에 목이 잘려나갔다.

모든 것이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했다.

캘리는 마지막 한 놈까지 목을 잘라내고 돌아서는 라이칸을 보았다. 피를 뒤집어쓴 채, 붉게 물든 검을 쥐고 있는 그는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그 모습, 지옥의 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가 무섭지 않았다.

경이로웠다.

그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사람이라는 걸 안다. 따뜻한 피와 살을 가지고, 여인을 뜨겁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사내였다. 그리고……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전사 중의 전사였다.

***

벙커 안은 성채와 거의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진짜 벙커를 가운데에 두고 뜰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뜰을 높은 성벽이 감싸고 있는 형태였다. 기사들은 벙커에 붙어 있는, 길쭉하게 마구간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 공간에 말들을 몰아넣고 문을 닫았다.

언데드들이 높은 담을 넘어온다고 해도 사방이 막힌 벙커 안으론 절대 들어올 수가 없었다. 제프리의 말에 의하면, 모든 문이 닫히는 밤에는 벙커 안의 굴뚝만이 유일하게 바람이 들어오는 통로라고 했다. 하지만 불을 싫어하는 언데드들은 굴뚝 근처도 오지 않을 것이다.

캘리는 바닥에 누운 제프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상처를 입은 탓에 추위를 더 심하게 느끼는 게 분명했다. 테드가 임시방편으로 독한 술로 상처를 씻어내고 약초를 발라주긴 했지만…… 제프리는 계속 떨고 있었다.

그녀도 추웠다. 이가 딱딱 부딪칠 만큼.

벙커는 들어설 때부터 온통 물기가 가득했다. 누군가 일부러 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지금은, 불을 피우는 게 제일 급선무다. 그런데, 그 누구도 불을 피우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캘리는 라이칸과 와이엇, 그리고 오웬이 서 있는 곳을 보았다. 다들, 꽤 심각한 표정들이었다.

언데드 말고, 다른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이건, 누군가 의도적으로 한 짓이 분명합니다.”

오웬이 심각하게 말하자 와이엇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벙커 안을 치울 때, 죽은 지 얼마 안 된 상인들 시체가 있었습니다. 검 자국이 선명하고 깊은 걸로 봐선, 검을 잘 다루는 자들에게 살해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놈들이 상인들을 죽이고 일부러 벙커 문을 열어놓은 겁니다.”

“숲속 웅덩이에도 사람 시체가 있었다던데, 가까스로 벙커에서 도망친 상인이 거기서 살해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라이칸이 침묵으로 동의하자 오웬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떤 놈들인지, 물 저장고를 열어서 벙커 안을 완전히 헤집어 놓고, 장작들도 완전히 젖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해 질 녘에 도착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일부러 한 짓일 겁니다. 놈들이 일부러 벙커 안으로 언데드들을 옮겨 놓은 거죠. 우리가 언데드를 치우는 데 시간을 허비하느라 장작이 젖어 있는 것도 모를 거라는 걸, 예상한 겁니다.”

“누군가 우리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

오웬이 중얼거리자 와이엇이 다시 욕설을 뱉었다.

“젠장. 지금은 언데드가 중요한 게 아니야. 젖은 장작으로 불을 땔 수가 없으니……. 이대로 있다간 다 얼어 죽어. 그렇다고 장작을 구하러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밖엔 언데드 수천 마리가 진을 치고 있을 것이다. 내일, 날이 밝기 전에는 나갈 수 없었다.

“제프리가 걱정입니다. 상처를 입어서…….”

와이엇이 중얼거리자 오웬도 고개를 끄덕였다.

“체온이 계속 내려갈 겁니다. 그리고 부인도…….”

셋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제프리와 캘리가 있는 곳을 보았다.

밤이 깊어지고, 기온이 확 떨어지면, 이곳은 벙커가 아니라 얼음 저장고가 된다. 그러면 가장 약한 자들부터 저체온증으로 심장이 멈춰버릴 것이다.

그 약한 자들은 부상을 당한 자와, 남부의 따뜻한 곳에서 자라 피부가 여린 여자. 그 둘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칸.”

세 남자는 고개를 돌려 테드를 보았다. 한 걸음 더 걸어온 테드가 주저하는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리자 와이엇이 벌컥, 재촉했다.

“뭐야? 뭔데 그래?”

테드가 결심한 듯 라이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부인에게 불을 피우게 하시지요.”

순간, 라이칸의 눈빛이 서늘하게 굳었다. 하지만 테드는 멈추지 않았다.

“제프리가 분명히 봤다고 했습니다. 부인이 젖은 나뭇가지를 가지고 불을 피우는 걸.”

라이칸의 시선이 저쪽에서 떨고 있는 캘리를 향해 날아갔다.

“다른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있다간 다 죽습니다.”

라이칸이 고개를 돌렸다. 그 눈길을 받은 와이엇은 주저하며 동조하고 나섰다.

“말 안 되는 건 아는데…… 그래도 뭐든 해봐야 하니까…….”

이번에는 오웬을 쳐다보았다. 오웬마저 굳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해보시죠.”

라이칸은 서로에게 붙어서 온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기사들을 보았다. 베아투름에서 나고 자란 기사들조차 오늘 밤을 불 없이 버티는 건 힘들 것이다.

그녀가 정말로 불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면…… 그 후폭풍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마녀와 마법사.

하나의 종족 안에서 불거진 권력 다툼이든, 두 개의 종족 간의 생존 본능 전쟁이든, 상관없다.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선 마법사가 우위에 있고, 마녀는 패배해서 그 존재만으로도 가차 없이 제거되어야 하니까.

그녀가 불을 다루는 능력이 있다면…… 마녀로 몰린다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라이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가 마녀이든 아니든, 자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디콘스의 백성들은 그녀를 불에 태워 죽이려 할 것이다. 왕에게도 명분이 생길 것이고, 그녀를 노리는 자들 또한…….

하지만 당장 얼어 죽는 것은 면해야 한다. 살아남아야 뭐든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까.

결단을 내려야 했다. 모두가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칸은 성큼성큼 걸어가서 캘리의 앞에 섰다. 그녀가 뭔가를 짐작한 것처럼 천천히 일어서서 마주 본다.

그를 올려다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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