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59)화 (59/159)

59

회랑을 걸어가던 왕세자는 기둥 뒤에서 걸어 나오는 그림자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전하.”

그림자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만달루테는 차가운 얼굴로 기사를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는가?”

그림자의 얼굴은 어두웠다. 만달루테의 얼굴이 더욱더 굳어졌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만달루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시, 그림자를 못마땅하게 응시하다가 다시 물었다.

“지금, 그들의 위치는?”

“조금 전에 받은 보고에 의하면, 와일더니스를 통과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곧 언데드 지역으로 들어가겠군.”

“예.”

시간이 없다. 그들이 언데드와 협곡을 통과해 버리면 베아투름이다. 거기로 들어간 후에는 일이 더 어려워진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들이 영지로 들어가기 전에, 일을 끝내야 돼.”

만달루테가 차갑게 말하자 그림자가 즉각, 고개를 숙였다.

“카리우스(자객 집단)에게 명을 전하겠습니다.”

“보상금을 더 올려.”

단호히 명령을 내린 왕세자는 몸을 돌려 왔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베아투름. 그곳은 워렌 공작의 영역이었다. 그 안에서 검은 늑대의 소유물을 해하려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하리라. 그러니, 그에 상응하는 액수로 보상금을 올리는 건 합당한 처사였다.

***

토르 기사단은 쉬지 않고 달렸다. 두두두두, 말들이 지나는 곳마다 뿌연 먼지구름이 생기고, 지축이 흔들릴 만큼 땅이 울렸다. 그리고…… 늑대들이 있었다. 회색늑대는 처음엔 한두 마리씩 보이다가 나중엔 무리들이 군데군데 나타났다.

놈들의 울음소리가 말발굽 소리와 같이 어우러져 공기를 뒤흔들었다.

캘리는 처음에 두려웠다. 당장이라도 늑대들이 공격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잠깐 쉬었을 때, 라이칸의 목소리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공격 소리가 아니야. 경고하는 거지.’

그 후론, 더 이상 늑대 울음소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말을 더 빨리 몰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늑대의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됐다. 마침내 드넓은 와일더니스를 통과해 언데드 지역으로 들어온 거였다.

시야가 뻥 뚫렸던 와일더니스와는 완전히 달랐다. 울창한 나무와 들판이 번갈아 나타나긴 했지만 온통 썩은 시체 냄새가 진동을 했다. 가는 곳마다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를 뼈들이 굴러다녔다. 하늘에 해는 뜨겁게 떠 있는데도 땅 주변은 회색빛 안개가 자욱하고 습했다.

먼저 달려갔던 정찰병들 중 한 명이 달려오는 게 보이자 라이칸이 한 손을 들어 무리를 멈추게 했다. 라이칸이 정찰병을 향해 달려가고, 줄곧 그녀의 오른쪽 옆에서 달리던 오웬도 달려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라이칸이 말에서 내리자 캘리는 눈을 좁혔다.

숲속이었다. 작은 계곡이 있는. 이상한 새소리가 기이하게 울렸다. 바람 소리조차 을씨년스러웠다. 건물 비슷한 건, 보이지도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벙커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그토록 몰아붙여 놓고선, 왜 갑자기 멈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벌써 해가 지기 시작하고 있는데.

으슬으슬, 이상하게 기분이 바닥으로 내려가고 묘한 불편함이 주위를 감싸고, 마치 누군가 몰래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음산함이 사방에서 조여왔다.

라이칸이 다가와 그녀를 말에서 내려주었다. 그 순간,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정찰병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건, 라이칸과 그녀, 그리고 제프리. 셋뿐이었다.

모두가 가버리자 적막함까지 더해져 숲이 아니라 마치 저승으로 가는 입구인 것처럼 어두운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캘리는 묻는 듯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여기서 기다릴 거야.”

라이칸은 알 수 없는 말로 그녀의 의문에 대꾸했다.

“왜요?”

그녀는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캘리는 다시 물었다.

“어째서, 우리만 여기서 기다려요?”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어.”

답답하다. 이 남잔, 제대로 설명을 해주면 머리에 뿔이라도 생기는 줄 아는 걸까?

캘리는 인상을 쓰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변수요?”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성질머리하고는.”

기가 막혔다. 먼저 답답하게 군 게 누군데.

그녀가 뭐라고 하기 전에 그가 먼저 대답했다.

“누군가 벙커 문을 열어놓고 철수했어.”

짧은 설명을 이해하고,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유추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그 말이 의미하는 상황을 완벽히 이해했다.

“벙커 안에 언데드가 있군요.”

겁먹은 그녀의 목소리에 라이칸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이 치울 거야. 우리가 가기 전에.”

그래서 우린 여기서 기다리는 거였다. 기사들이 먼저 가서 벙커 안의 언데드들을 다 치울 때까지.

나 때문일까? 내가 언데드를 무서워하는 걸 알고.

아니, 생각하지 말자.

어쨌든 난 언데드를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다. 비록, 그것들이 지금은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해도.

“그것들이 어떻게 벙커 안에 들어갔을까요?”

“누군가 머물고 떠나면서 문을 열어뒀겠지.”

그 경솔한 누군가에게 화가 치밀었다.

“누가요?”

“모르지. 우리보다 앞서간 기사들일지도…….”

라이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순간, 제프리가 얼른 끼어들었다.

“저희 기사들은 절대 아닐 겁니다.”

토르 기사단에 대한 자부심 하나만은 대륙 최고인 제프리는 그런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마, 겁이 많은 여행자들 중 하나일 겁니다. 빨리 이 지역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나가다가 문단속을 안 한 거겠죠. 아니면, 이 지역을 처음 통과하는 상인이거나.”

제프리는 자신의 생각이 맞을 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캘리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동의해 주었다.

“맞아요. 제프리의 생각이 맞을 거예요.”

캘리가 동조해 주자 제프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중얼거렸다.

“구름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예상보다 해가 더 빨리 질 것 같습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자 제프리가 재빨리 말했다.

“걱정 마세요. 지금 당장 언데드가 나타나도 여긴 걱정 없습니다. 여차하면 이 물속으로 들어가면 되니까요. 언데드 놈들은 물을 싫어하거든요.”

캘리는 고개를 돌려 작은 계곡물을 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더러워 보였다. 썩은 통나무가 둥둥, 떠 있었다. 부러진 나뭇가지, 누런 이파리, 그리고…….

물속을 들여다보던 캘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너무 급하게 뒷걸음질 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걸 라이칸이 재빨리 잡아주었다.

그걸 본 제프리가 황급히 물속을 들여다보더니 라이칸을 쳐다보았다.

“시쳅니다. 형체가 아직 완전히 남아 있는 걸로 봐서, 죽은 지 하루도 채 안 된 것 같습니다.”

라이칸이 눈살을 찌푸리자 제프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벙커 문을 열어두고 간 무리들 중 하나일까요?”

캘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라이칸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사위가 시커멓게 변했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본 그녀는 갑자기 몰려온 먹구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거대한 구름 떼는 지고 있던 해를 단숨에 가려버리고 빛을 차단했다.

아직, 한 시간 정도는 더 남았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어둠이 삽시간에 숲을 뒤덮었다.

“젠장.”

라이칸이 낮은 욕설을 지껄였다. 마치, 그게 신호가 된 것처럼 숲의 공기가 일제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바람은 삽시간에 퍼져서 숲 전체로 번져나갔다.

갑자기 라이칸이 그녀를 등 뒤에 세우더니 검을 빼 들었다. 제프리가 달려와 뒤를 경계하듯 섰다. 캘리는 불안한 눈빛으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스산한 바람과 음침한 정적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목을 죄는 악마의 손길처럼 사방에서 조여오고 있었다. 순간,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꿀렁, 꿀렁 움직이고 있었다. 말들이 히히힝, 소리를 내며 앞발을 쳐들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캘리의 눈이 커졌다. 라이칸의 바로 앞 땅바닥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자 그녀는 기겁하며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겨우 삼켰다.

작은 둔덕이 무너지며 그 속에서 얼굴 반이 썩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여기저기, 흙이 덮여 있는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죽은 자도 아니고, 산 자도 아닌, 그들이 바로 언데드였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이리라.

캘리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공포스러운 장면에 속이 뒤틀렸다.

갑자기 놈들이 달려들었다. 라이칸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뻗어오는 손들을 쳐내고 이를 드러내고 달려드는 놈들의 목을 빠르게 베기 시작했다. 점점 수가 많아졌다. 어디선가 자꾸만 튀어나와 접근해 오는 놈들은 눈알을 까뒤집고 침을 흘리며 짐승처럼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말에 타!”

라이칸이 그녀를 벤투스를 향해 밀었다. 캘리는 재빨리 몸을 돌려 뛰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뭔가가 발목을 홱 잡아채자 그녀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옆의 나무를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발목을 잡고 있는 앙상한 손아귀의 힘이 거세게 그녀를 당긴다. 캘리는 딸려 가지 않으려고 나뭇가지를 움켜잡았다. 동시에 돌을 집어 놈의 손등을 내리쳤다.

끄덕도 하지 않는다. 놈들은 고통을 모르는 것 같았다.

캘리는 단검을 꺼내서 손목을 내리쳤다. 잘린 손목이 그대로 발목을 잡고 있자 미친 듯이 떼어냈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키던 그때였다.

아!

그녀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발밑이 꺼진다고 느끼는 순간, 그녀의 몸이 땅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땅을 움켜쥐었다.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잡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몸은 빠르게 땅속으로 들어가고 머리 위로 흙더미가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죽는구나. 이렇게 허무하게.

안 돼! 이렇게 죽을 순 없어!

그녀는 다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발을 버둥거리며 흘러내리는 흙더미 위로 손을 뻗었다.

제발, 제발.

눈으로, 코로, 흙이 들어오며 그녀는 마치 산 채로 묻히듯 그렇게 땅속 깊이 빨려 들어갔다. 땅속에 있던 언데드들이 그녀를 향해 마구 손을 뻗어왔다. 머리칼을 움켜쥐고, 팔과 다리를 잡는다.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어깨를 비틀고 몸을 젖히려고 해봐도 뜻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숨이 막혔다. 숨이 쉬어지지가 않아!

라이칸!

소리 없이 그를 절규했다. 오직 그의 이름만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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