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50)화 (5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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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지.”

“그래……. 난 그렇게는 못 살아.”

“당연하지. 그건 안 되지. 뭐, 지금까지 정부가 아니었다고는 못 하지만 외부적으로 부인으로 알려진 것과 대놓고 정부로 사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그래, 맞다. 우리가 베아투름으로 갈 수 없는 이유 중에 그것도 포함이네.”

캘리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넌 어떻게 해서든 베아투름으로 안 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당연하지. 우린 거기 가면 얼어 죽는다니까. 난 절대 그렇게 추운 곳에선 못 살아. 너도 그렇잖아.”

“모르겠어. 가본 적이 없으니까.”

“나도 가본 적 없어. 하지만 너와 내가 살 만한 곳은 아니야. 확실해.”

캘리는 다시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런 대화가 다 무슨 소용인가. 난 그를 따라가지 않을 건데.

“아, 그러니까 좀 빌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놓아달라고 싹싹 빌란 말이야. 그깟 자존심이 밥 먹여줘? 자존심 내세우고 덤벼들다간 진짜 죽는단 말이야. 공작이 널 좋아하긴 하지만 결국 사람이야. 욱해서 검이라도 휘두르면 너만 손해지. 죽으면 너만 죽냐? 나도 죽잖아. 그러니까 잘 좀 얘기해 봐. 엎드려서 애원이라도 하라고.”

쉴라가 떼를 쓴다. 캘리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아버렸다.

속에서 불길이 일어난 것처럼 일렁이는 것 같았다.

***

끼이이.

조심스럽게 문을 연 캘리는 숨을 길게 들이켜고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조심조심, 뒤꿈치를 들고 한 발씩 걸을 때마다 나무 바닥이 삐걱삐걱 소리를 냈지만 최대한 숨죽이며 걸은 탓에 소리는 크게 울리지 않았다.

계단에서는 사뿐, 사뿐, 가볍고 빠르게 내려갔다.

등 뒤에 멘 봇짐이 덜렁거리는 걸 한 손으로 잡고 마침내 아무도 없는 홀을 지나 건물 밖으로 나갔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한꺼번에 그녀를 덮쳤다. 지붕 위에 있던 쉴라가 휘익, 날아와 가까운 나뭇가지 위에 앉았다.

캘리는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다음 쉴라에게 말했다.

“마구간에 가서 사람이 있는지 봐줘. 난 주머니에 물을 채워서 갈게.”

“난 아직도 모르겠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들키면 죽을지도 몰라.”

“죽는다는 소리 그만해. 나도 충분히 아니까. 어쨌든 이미 나왔잖아. 그러니까 가보자.”

최대한 멀리. 할 수 있다면 그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드는 거야.

캘리는 마당 구석에 있는 우물로 달려가고 쉴라는 마구간을 향해 날았다.

주머니 두 개에 물을 가득 채우고 일어선 캘리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상하다. 오늘은 경계를 서는 이도 없다. 보통은 번갈아 가며 보초를 세우던데.

캘리의 눈길이 여관 밖의 길 쪽을 향했다.

마을 안이 아니라 입구 쪽에 보초를 세웠을지도 모른다. 그럼 우린 뒤쪽으로 가야 한다.

마을을 벗어나기 전까진 말을 타지 말아야지.

캘리는 얼른 마구간으로 뛰었다. 사방이 고요하다. 그녀가 나타나자 말들이 히힝, 하며 불안해한다.

“쉴라.”

캘리는 조용히 불렀다. 그런데 대꾸가 없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며 다시 불렀다.

“쉴라.”

바삭. 지푸라기를 밟는 소리가 났다. 캘리는 홱, 몸을 돌렸다. 순간, 얼어붙었다.

“새는 안 옵니다.”

은발의 엘프 전사가 부드럽게 말하는 소리가 이토록 절망적일 수 있다니.

“오웬…….”

“새는 제가 잡아서 새장에 넣어뒀습니다. 걸쇠를 단단히 묶어서 열고 나오지도 못할 거고.”

캘리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난 가야 해요.”

“곧 날이 밝을 겁니다.”

“보내줘요.”

오웬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 소관이 아닙니다.”

“당신만 눈감아주면…….”

“칸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캘리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밤새 주무시지 않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부인이 방에서 움직이실 때부터 알고 저를 여기로 보내신 겁니다.”

하.

맥이 빠졌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그의 허락 없인 도저히 떠날 방법이 없는 걸까?

다시 건물 안으로 돌아왔다. 나올 때와는 다르게 걸음이 느렸다.

옆에서 비호하듯 걷던 오웬이 갑자기 멈추자 캘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 층 난간에 서 있는 라이칸을 보자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진심으로 미웠다. 속에서 원망이 솟아오른다.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절망감이 그를 향해 치솟았다.

“보내줘요!”

그녀는 충동적으로 소리쳤다. 그의 미간이 좁혀진다. 짙은 눈썹이 한데 모아지고 턱이 돌처럼 굳어지는 게 보였다.

“제발…… 보내줘요.”

쉴라의 말대로 이젠 애원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라도 해서 그의 곁을 떠날 수만 있다면…….

“오웬.”

그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홀을 울렸다.

“예. 칸.”

“떠날 준비를 해. 한 시간 후, 출발한다.”

“예. 알겠습니다.”

캘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검을 든 사내들이 밤의 그림자를 밟고 마구간으로 들어섰다. 말똥 냄새와 지린 오줌 냄새가 진동하는 공간을 휘둘러보던 한 남자는 건초가 산처럼 쌓여 있는 곳으로 곧장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갈수록, 여자의 신음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아, 아으응.

누가 들어도 남녀가 몰래 숨어서 그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옆에 놓여 있는 양동이를 들고 건초 더미 너머로 휙, 던졌다. 그러자 와당탕 소리가 나는 동시에 여자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 후, 옷도 제대로 못 입고 후다닥, 달려 나오는 난쟁이를 본 남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자와 질펀한 정사를 벌이다가 뛰쳐나온 난쟁이는 검을 찬 건장한 사내들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네가 벨만 백작의 딸과 동행했던 난쟁이냐?”

뺨에 긴 흉터가 있는 남자가 묻자 난쟁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하게 살아 있구나. 어찌 죽지 않고 살았지?”

“그들이…… 엘프 여왕에게 쫓겨서 급하게 가는 바람에…….”

훗.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들고 있던 주머니를 난쟁이 앞에 툭, 던졌다.

“은돌 서른 개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줄 수 있다면, 그건 네 것이다.”

***

와이엇과 오웬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창가에 서 있는 칸의 모습을 보고 다가갔다.

“출발 준비가 다 됐습니다.”

칸이 돌아서서 말없이 지나치려 하자 참고 있던 와이엇이 결국 또 나섰다.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만 마시고…….”

오웬이 그만하라는 듯 팔을 잡았지만 와이엇은 그 손을 뿌리치고 말을 이었다.

“부인이 저러는 것도 이해 못 할 거 없잖습니까. 말하는 새가 그러는데, 어렸을 때 버림받아서 외롭게 자랐다고 합니다. 수녀원장은 엄격하기만 하고, 그나마 돌봐주던 수녀가 있었는데, 그 수녀도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면서 완전히 혼자가 됐답니다. 친구라곤 그저 말하는 새가 전부고. 수녀원에 갇혀 살면서 세상 밖으로 나가기만을 열망하다가 겨우 빠져나왔는데 하필이면 또 지나가던 병사들에게 잡혀서 벨만 백작가로 끌려가 허드렛일을 하며 갖은 고생을 다 했답니다.”

라이칸이 와이엇을 보며 인상을 썼다.

“자네가 언제부터 그녀를 대신해서 말하게 됐지?”

그녀가 벨만 백작의 딸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가장 먼저 화를 냈던 건 와이엇이었다.

“저도 처음엔 황당했죠. 감쪽같이 속은 게 화도 나고. 그런데 그 말하는 새 얘길 듣다보니, 부인이 살아온 삶이 어찌나 팍팍하고 우울한지…….”

와이엇은 말을 멈추고 ‘큼’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마치, 목이 메는 것처럼.

라이칸과 오웬이 그런 와이엇을 보며 인상을 썼다.

와이엇은 아랑곳없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젠 공작부인도 아니고, 믿었던 엘프 여왕에게 의지할 수도 없다는 걸 알았고, 막막하겠죠. 오죽하면, 여자의 몸으로 유랑 시인이나 상인들처럼 세상을 떠돌겠다고 하겠습니까?”

라이칸의 눈빛이 일그러졌지만 와이엇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이 절망적이고 한스러운 마음에 모진 소리를 좀 해도 칸이 넓은 아량으로…….”

라이칸이 험악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와이엇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저는 그냥……. 말하는 새는 부인을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지만 제가 그런 얄팍한 수에 넘어갈 위인입니까? 절대 아니죠.”

“벌써 넘어갔는데 뭘. 여기서 부인에 대해 구구절절 말하는 것만 봐도 알겠네.”

오웬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와이엇이 인상을 쓰더니 다시 칸을 보았다.

“놓아줄 의향은 있습니까?”

라이칸의 눈이 차갑게 발했다. 그 서늘한 기세에 눌려 와이엇이 시선을 돌려버렸다.

칸이 홱 몸을 돌려 걸어가 버리자 와이엇이 혀를 찼다.

“아예, 사지를 묶어서라도 데려갈 것 같구만.”

“그러겠지.”

오웬이 동조하자 와이엇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성질머리.”

“하루 이틀이야? 알면서 뭐 하러 건드려?”

“이번엔 좀 다를 줄 알았지. 칸이 언제 여자 때문에 저렇게 화를 내는 걸 본 적 있어?”

“없지.”

“이번에는 성질대로 하면 안 된다니까. 자기 맘대로 안 된다고 더 거칠게 굴며 몰아붙이면 여자들은 더 도망치려고 할 거라고.”

오웬이 칸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어쩌겠어. 한번 삐뚤어지면 마음과는 다르게 더 성질을 내는 사람인데.”

“그러니까 안 된다고. 저렇게 해서는 절대 부인의 마음을…….”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걷던 그때였다.

갑자기 위층에서 우당탕탕,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앞서가던 라이칸도, 뒤에 있던 와이엇과 오웬도 모두 멈춰서 동시에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귀를 찢을 것 같은 비명 소리가 울렸다.

순간, 라이칸이 튀어 나갔다. 눈 깜짝할 새에 계단을 달려 올라간다. 와이엇과 오웬도 그 뒤를 따랐다.

콰당!

라이칸이 계단 끝에 발을 올리자마자 문이 세차게 열리고 캘리가 달려 나왔다. 뒤를 돌아보며 정신없이 뛰던 그녀를 라이칸이 재빨리 붙잡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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