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왜? 뭐가 잘못됐나?”
술잔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라이칸이 물었다. 캘리는 흠칫, 놀라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아, 아뇨.”
피식, 그가 웃더니 잔을 들어 올렸다. 순간, 캘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그가 고개를 들고 쳐다본다.
“아, 저기…… 그러니까, 우리…… 나가서 먹어요.”
“뭐?”
“속이 안 좋아요. 여기, 너무 지저분한 냄새가 나요. 나가서 다른 걸 먹고 싶어요.”
그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러더니.
“그래도 이건 마셔야지.”
다시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걸 본 캘리는 다른 걸 생각할 수 없었다.
“안 돼요!”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서 술잔을 탁, 소리가 나게 쳐버렸다. 그가 가볍게 쥐고 있던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커다란 소리를 내며 굴렀다. 붉은 와인이 사방에 튀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라이칸의 눈길도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캘리는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냄새가 이상해서……. 그러니까 술도 맛없고 지저분할 것 같아서…….”
아, 빌어먹을. 쉴라라면 더 그럴싸한 거짓말을 지어냈을 텐데. 나는 정말 순발력이라곤 닭똥만큼도 없다.
갑자기 그가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멀리에 서 있던 하녀를 손짓으로 불러서 바닥을 치우라고 하며 쿠퍼를 준다. 그리고 캘리의 팔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를 향해 물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그가 앞만 보며 대꾸했다.
“밖에. 시장에 가면 네가 먹을 만한 게 있겠지.”
“미안해요. 나 때문에…….”
“됐어. 어차피 나도 여기서 뭔가를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캘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그랬다고? 아까는 정말 먹을 것처럼 그랬는데…….
하지만 따지고 물을 수 없었다. 그저, 한고비를 넘겼다는 생각만으로도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
오웬은 라이칸과 부인이 여관을 나가는 걸 지켜보고 서 있었다.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나서 돌아보자 와이엇이 급하게 다가와 묻는다.
“칸은?”
오웬은 고개를 돌려 이제 막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턱짓했다.
“다정하네?”
와이엇이 중얼거리자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하지.”
“뭐야? 왜 다정해?”
“방금, 부인의 결백이 증명됐거든.”
“뭐? 어떻게?”
“칸이 술을 마시려고 하는 순간에, 부인이 독이 묻은 술잔을 쳐버렸어.”
와이엇의 눈이 커졌다.
“칸이 그걸 마시려고 했다고?”
두 사람이 적당히 멀어지자 오웬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와이엇도 들러붙으며 인상을 썼다.
“뭔 생각으로 그걸 마시려고 한 거야? 네가 미리 독이 묻어 있다고 알려줬잖아.”
“알려줬지.”
“근데?”
“아마…… 확인하고 싶었던 거겠지.”
“아.”
와이엇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흠’ 하더니 중얼거린다.
“난쟁이가 부인과 짜고 한 짓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확인해 보려고 그랬군. 독이 든 술잔을 먹으려고 시늉만 한 거야. 부인이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그래야 부인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 그럼 네 수고는 헛수고가 된 건가? 네가 그 난쟁이를 감시하면서 잔에 독을 묻히는 것까지 알아냈는데, 공로는 공작부인에게 돌아갔네.”
오웬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칸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아야만 하니까.”
와이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난쟁이 놈, 그 미친놈이 한 말이 하도 기가 막혀서 내가 아직도 멍해.”
“그놈은 어쩌고 따라오는 거야?”
“방에 가둬놨지. 재갈 물려서.”
“가서 감시해. 그놈이 도망치면 골치 아파.”
“도망 못 친다니까. 꽁꽁 묶어놨어.”
오웬이 걸음을 멈추고 노려보자 와이엇이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네가 가서 감시하든가.”
“아, 그럼 네가 말도 사고, 부인 입을 옷도 사고 할 거야?”
순간, 와이엇이 움찔했다. 평소에도 시장에서 뭔가를 고르고 살피고 하는 짓은, 딱 질색하던 와이엇은 얼른 뒷걸음질 쳤다.
“흠, 그건 좀 곤란하지. 그런 건 여자들이나, 곱상하게 생긴 네놈한테나 어울리는 짓거리거든.”
“오, 그래? 그럼, 곱상하게 생긴 내 검 앞에서 그 덜떨어진 물건 좀 내놔보시지.”
오웬이 검을 뽑을 듯 위협적으로 다가서자 와이엇이 큭, 웃더니 손을 내저었다.
“물론 나도 내 불용을 보여주고 싶지만, 칸이 지시한 임무가 있어서 말이야. 난 가서 난쟁이 놈이나 괴롭히는 게 낫겠어. 내 불용은 나중에 보여주지.”
“불용이 아니라 새끼 도마뱀이겠지.”
“그래, 맘대로 생각해라. 마누라도 없는 놈이.”
“뭐!”
오웬이 진짜 불이라도 뿜을 듯하자 와이엇은 냉큼 몸을 돌려 여관으로 뛰었다. 그 모습을 보던 오웬은 고개를 돌려 길을 살폈다. 사람들 틈에서 검은 머리 하나가 우뚝 솟은 게 보였다.
칸이다.
오웬은 사람들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
“그깟 작은 계집애 하나를 못 찾다니. 장군도 이젠 늙어서 제 역할을 못 하는 것이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반짝이는 은색 머리칼과 같은 색의 턱수염을 기른 노장은 거침없이 말을 뱉어내는 여왕의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더 화가 난 이래인은 이를 갈며 소리를 빽 질렀다.
“대체 수녀원에선 언제 빠져나간 것이오!”
“수녀원에서 사라진 건 6개월 정도 된 듯합니다.”
“된 듯하다? 그럼 정확히 언제 없어진 것도 모른다는 건가? 그 아일 보살피라고 준 은이 얼만데, 수녀원장이 그 돈은 제 아가리로 다 처넣은 것인가?”
“수녀원장이 욕심 많은 여우라는 건 여왕님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내가 지금 그걸 말하고자 하는 것이오? 경은 대체, 나를 어찌 생각하는 건가? 살 만큼 살았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건가?”
화가 나면 아무 말이나 쏟아내는 여왕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마렌 장군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잠시 침묵으로 시간을 끌다가 더 이상 지체해선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여왕을 보았다.
“길스 경이 디콘스와 오스피아의 국경 마을까지 내려간 듯합니다.”
순간, 이래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아일 찾으러?”
“그렇습니다.”
“망할.”
욕설을 내뱉던 여왕이 다시 장군을 보았다.
“아직 찾지 못한 건 확실하고?”
“그쪽보다는 저희가 더 빨리 찾을 건 확실합니다. 길스는 황금색 머리칼을 가진 여자만 찾고 있지만 저희는 얼굴을 아니까.”
“그런데도 그대는 아직 못 찾았지. 길스가 수녀원까지 가서 여자애가 사라졌다고 말해 주기 전까지, 그 애가 사라진 것도 몰랐고.”
“수녀원장이 잘 있다고 거짓말을 한 탓입니다.”
“변명은 넙죽넙죽 잘도 하는군.”
“…….”
“길스보다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하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뭐요?”
“그 아이가 어렸을 때, 여왕 폐하께 데려온 이는 찾았습니까?”
“아니. 찾지 못했어. 적어도 포르엘티움에는 없는 게 확실해.”
“그럼, 그동안 받은 은은 누가 준 것입니까?”
“그것도 모르오.”
그럼, 누가 주는지도 모르고 넙죽넙죽 받아 챙기기만 했다고? 하는 눈빛의 장군을 보며 이래인은 인상을 썼다.
“길스가 준 것일지도 모르지. 다른 이를 보내서 아이를 내게 맡긴 거야.”
“그 아이가 뭔데 디콘스의 길스 경이 폐하께 아이를 맡겼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길스가 연관된 것도 이제야 알았는데……. 내 생각엔 길스가 아니라 그 뒤에 더 큰…….”
“아르 왕 말씀입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
“아르 왕의 사생아일까요?”
“글쎄.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게, 사생아라면 그냥 인정하고 궁으로 데려가 키우면 되지. 왜 굳이…….”
“탈리아 왕비로부터 보호하는 차원이었을 수도 있죠. 탈리아 왕비는 질투심이 강한 여자라고 들었습니다.”
“뭐, 그럴 수도. 어쨌든 우린 그 아일 찾아야 하오. 그래야 칼자루를 우리가 쥐는 거야. 그리고 만약, 그동안 은을 준 사람이 길스라면 우린 받았던 은을 다 토해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아이를 잘 돌보라고 준 은인데, 잃어버리고 어딨는지도 모른다고 하니…….”
“길스 경이 찾아왔을 때, 은 얘기를 했습니까?”
“아니.”
“그렇다면 길스 경이 준 은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럼 대체 누가 준 거란 말이오?”
“…….”
“그 아이는 또 무엇일까?”
그 의문은 진작 가졌어야 했다. 그런데 여왕은 지금껏 공짜로 꼬박꼬박 들어오는 은만 챙기고 그 아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산 것이다.
어느 날, 길스가 찾아와서 황금빛 머리칼의 소녀에 대해 물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아이를 수녀원에 맡겼던 걸 기억해 낼 정도였으니.
마렌 장군은 속으로 혀를 찼다.
욕심 많은 이래인 여왕은 그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 뻔했다. 은도 은이지만, 길스가 아르 왕의 지시로 그 아일 찾는 거라면 은이 아니라 금을 왕창 뜯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이래인이 늙은 장군을 노려보았다.
“우선 찾으시오. 그대가 못하겠으면 칼리샤를 보낼 것이오.”
마렌 장군은 코웃음을 쳤다.
“그 애송이가 뭘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자는 머리가 텅 빈, 하프 엘픕니다.”
이래인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빠르잖소. 늙어서 느림보가 된 그대보다는 낫겠지.”
그때였다. 창가에 새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이래인은 이상하게 생긴 새를 보고 인상을 썼다.
“저건 대체 뭐야?”
“쫓아버리겠습니다.”
장군이 창가로 걸어가다가 갑자기 멈춰서 여왕을 보았다.
“목에 뭐가 걸려 있는 걸 보니, 전령조인 것 같습니다.”
“가져와보시오.”
장군이 다가가 목에 걸려 있는 양피지를 빼내자 새는 기다렸다는 듯 황급히 창밖의 나무로 날아가 앉았다. 그리고 이내 푸드덕, 하늘로 날아올랐다. 장군은 둘둘 말린 양피지를 여왕에게 가져갔다.
작은 양피지를 펴서 깨알 같은 글씨를 읽어 내리던 여왕이 고개를 홱, 쳐들고 장군을 향해 소리쳤다.
“저 새를 따라가야 돼!”
놀란 장군이 쳐다보자 이래인이 양피지를 던지며 다시 소리를 질렀다.
“저 새를 따라가서 그 아일 데려와야 한다고! 칼리샤! 칼리샤!”
여왕이 머리 빈 하프 엘프 전사를 부르며, 빠르게 지나가자 마렌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양피지를 들어서 펼쳤다.
‘여왕님. 저는 오래전에 엘루인 수녀원에 맡겨진, 태양의 머리색을 가진 캘립니다. 제가 오늘 밤, 여왕님을 뵐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자정이 되기 전에 궁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