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32)화 (32/159)

32

백작부인이 빤히 쳐다본다. 완고한 턱과 눈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호통을 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사흘을 더 머문다고?”

“네.”

어째서 계획이 바뀌었냐는 물음도 없었다. 백작부인은 그저 캘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그대로 문 쪽으로 가는 바람에 사흘을 머물러도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았다. 그런데.

문 앞에 선 백작부인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 하고 있어?”

“네?”

“시간이 없다. 사흘이 긴 시간이 아니야. 배워야 할 게 천지라고. 어서 따라와.”

문을 열고 나가는 백작부인을 따라 캘리는 황급히 뒤쫓아 걸었다.

***

털썩.

캘리가 방에 들어와 그대로 침대로 쓰러지자 앉아 있던 라이칸이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지쳤군.”

“죽을 것 같아요.”

“내일 아침에라도 떠날까?”

캘리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내일 하루 남았는데 중간에 포기하기 싫어요.”

“…….”

“약속한 건 지켜야죠.”

그가 지그시 쳐다본다.

“넌 충분히 했어. 고모님도 아실 거야.”

“그렇죠. 당연히 아시겠죠. 난 누구처럼 도망은 안 갔으니까.”

그녀가 웃으며 쳐다보자 그가 인상을 썼다.

“도망이 아니라니까.”

“알았어요. 그냥 간 거죠. 말없이.”

그녀는 놀리고 있었다. 그가 뭔가 투덜거린다. 그러다가.

“그래도.”

갑자기 은근한 말투에 캘리는 불안한 눈동자를 그에게 향했다. 눈빛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본 캘리는 얼른 몸을 틀었다.

“아뇨. 오늘은 안 돼요.”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가 더 빨랐다. 허리를 잡힌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로 쓰러졌다. 빠르게 덮쳐온 그가 위에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입술이 부딪치기 직전 속삭인다.

“아내의 도리를 할 시간이야.”

“난 충분히…… 흡!”

입술이 막혔다. 종일 공작부인으로서 지녀야 할 언행을 익히느라 지쳤지만 그의 입술과 손길에 또다시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캘리는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달뜬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

그녀가 홀 입구에 들어서자 앉아 있던 기사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중에는 라이칸도 있었다.

캘리는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가 단상으로 향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은 정면을 향한 채,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걸었다.

계단 아래에서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는 동작은 우아했고 계단을 오를 때에도 결코 몸에서 긴장을 빼지 않았다.

라이칸이 의자를 빼주자 캘리는 살짝 고개를 숙임으로써 답례했다.

의자에 앉은 후에도 등을 구부리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 잠시 후, 하녀가 접시를 나르기 시작했다.

“쿠민을 넣은 닭고기 스튜입니다.”

평소였다면 고맙다고 말했을 캘리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숟가락을 들고 스튜를 맛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기사들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중에서 와이엇은 감탄해서 몰래 손뼉을 칠 정도였다.

“와. 백작부인이 또 해내셨네.”

제프리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았다.

“또, 라고요?”

“짐승 같았던 칸을 사람으로 만든 이후로 또 한 번의 기적을 만드신 거야. 아, 물론 공작부인은 기적까진 아니지만.”

“칸이 짐승 같았다고요?”

“그래. 거의 짐승이나 마찬가지였지.”

“언제요?”

“어릴 때.”

“아. 마물 지역에서 살아남아 홀로 성으로 돌아오셨을 때요?”

“그래. 백작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달려 베아투름으로 오셨는데 늑대의 습성이 남아 있는 칸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면서 데리고 여기로 오신 거야. 그리고 단 1년 만에 인간으로 만들었지.”

“우와.”

“그런데 공작부인은 사흘 만에 진짜 공작부인처럼 만들었으니.”

“예전에도 나쁘진 않았는데…….”

“그렇지. 나쁘진 않았지. 근데 어딘가 좀 모자라긴 했어. 자연스럽고 활기차긴 했는데, 왠지 기품이 좀 없다고나 할까. 근데 지금은 완벽하네. 완벽해.”

“그러게요. 어떻게 사흘 만에 사람이 저렇게 변하죠? 아까 부엌에서 하녀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는데, 전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러니까 사람은 역시 교육을 받아야 돼. 그나저나 오늘 우리 칸, 밥 먹긴 글렀다.”

“예? 왜요?”

제프리가 고개를 돌려 탁자 앞에 있는 라이칸을 보았다. 그리고 방금 와이엇이 한 말을 이해했다.

“아.”

젊은 공작은 자신의 아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작고 귀여운 아기 새를 사랑스럽게 보는 것도 같고, 그 아기 새가 처음 날갯짓을 한 걸 보는 사람처럼 대견해하는 것도 같고.

어쨌든, 칸의 이글거리는 눈은 부인에게 고정된 채, 눈앞에 놓인 음식에는 관심도 없는 듯했다.

“거참. 이상한 양반일세.”

와이엇이 중얼거린다.

“걸음걸이, 말투 좀 변한 걸 가지고 뭘 또 저렇게 반하고 난리야. 나, 처음 결혼했을 때 맨날 집에 일찍 들어간다고 머저리라고, 기사 망신 다 시킨다고 욕하더니, 자기는 더하구만. 뭘.”

주변의 기사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

“공작부인. 어제 주셨던 그 약초를 달인 물입니다.”

하녀가 주머니를 내밀자 캘리는 미소를 지으며 건네받았다.

“고맙다. 그리고 아까는 좀 냉정하게 말해서 미안해.”

하녀가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닙니다. 제가 옷을 잘못 가져다드린걸요. 그리고 백작부인이 보고 계시니 더 그러신 것도 압니다. 공작부인이 아무리 차갑게 말씀하셔도 저희들은 다 압니다. 부인이 하녀들의 순번도 체계를 잡아주시고 쉬는 날도 많이 만들어주시고, 힘드실 텐데 밤마다 내려오셔서 몸이 불편한 하녀들에게 약초를 어떻게 먹어라, 알려주시고, 저희 모두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인걸, 뭐. 그리고 여기 있는 동안 극진히 잘 대접해 줘서 고맙기도 하고.”

“저희가 할 일인걸요.”

“그래. 내일은 우리가 떠나니, 그땐 너희도 쉴 수 있을 거야.”

“저흰 아쉽기만 한걸요.”

“고마워. 그렇게 말해 줘서.”

캘리는 주머니를 들고 돌아섰다. 홀을 가로질러 뒤쪽으로 걸어 나가니 뜰이 나타났다.

성안의 모든 곳이 그러하듯 여기도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었다.

잠시 후, 캘리는 뜰 가장자리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백작부인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갔다.

“여기 계셨군요.”

백작부인이 고개를 돌렸다.

“엘리샤.”

여기 머무는 동안, 내내 이 이름으로 불렸지만 아직도 낯설다.

캘리는 미소를 살짝 지어 보인 후, 옆에 앉아 주머니를 내밀었다.

“부인.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백작부인이 주머니 입구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지?”

“펜첼이라는 식물을 달인 물입니다.”

“펜첼? 그건 요리의 향을 더하는 데 쓰는 것 아닌가?”

“예. 그렇게도 쓰입니다. 그런데 이건 과실만 따로 달인 겁니다.”

백작부인이 빤히 쳐다보자 캘리는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하녀에게 제조법을 일러뒀으니 아침저녁으로 한 잔씩 드세요. 속이 한결 편해지실 겁니다.”

“내 속을 그대가 어찌 알고?”

“혈색이 탁하고 성격이 예민하며 곧잘 화를 잘 내시는 걸 보고 하녀에게 물었더니 부인이 볼일을 잘 못 보신다더군요.”

백작부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캘리는 얼른 말을 이었다.

“아픈 건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

“아픈 걸 인정하고 고치려 노력하는 게 낫죠.”

잠시 말이 없던 백작부인이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속을 편하게 해준다고?”

“네. 제가 직접 효과를 본 겁니다.”

잠시 망설이던 부인이 주머니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다. 한 번에 쭈욱 들이켜고 주머니를 내린 백작부인이 캘리를 보았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지?”

캘리는 망설이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약초를 다룰 줄 아는 수녀에게 배웠습니다.”

“수녀? 백작의 영지에서?”

“예…….”

“귀한 백작의 딸이 어떻게 그런 걸 배웠어?”

캘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거짓말을 술술 내뱉었다. 사실, 거짓말도 아니다. 엘리샤 일을 대신 말하는 거니까.

“어머니가 병약하셨고, 저도 어릴 때 몸이 약해 약초 쪽에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백작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움은 언제나 옳은 일이야. 치료사가 하는 일이지만 배워서 나쁠 건 없지.”

“백작부인께서 보기엔 제가 한참 모자라 보이시겠지만, 저도 근본은 있답니다.”

처음으로 부인의 칭찬을 받아서 우쭐해진 마음에 던진 농담이었다. 그런데 백작부인이 정색을 한다.

“당연하지. 왕족인데.”

네?

캘리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백작부인은 정원의 꽃을 보고 있느라 캘리가 놀라는 걸 보지 못했다. 그리고.

“비록 몰락해 가는 벨만 백작에게 시집을 가긴 했지만 네 어머니는 오스피아 국왕의 여동생이야. 왕족이잖아. 사랑에 눈이 뒤집혀 왕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긴 했지만 전대 왕이 사랑했던 따님이고. 아르 왕이 우리 라이칸에게 패전국의 귀족 딸과 결혼을 명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가 반대하지 않은 이유지.”

몰랐다. 엘리샤 벨만의 어머니가 오스피아의 공주인 줄은.

캘리는 처음 듣는 소리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백작부인이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아르 왕이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어.”

약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