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어쩌지?”
캘리는 쉴라를 향해 울상을 지었다.
“심각하네.”
쉴라도 이 상황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캘리는 안절부절못했다.
“난 귀족 집안의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기껏해야 엘리샤 아가씨가 하는 행동들을 기억해 내서 흉내 내는 것뿐인데. 백작부인은 내가 엘리샤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거야.”
“하룻밤만 지낸다며? 잘 피해 다니면 되지 않을까?”
“당장, 조금 있으면 홀로 내려가야 해. 다 같이 식사를 한대.”
“아프다고 해.”
“어디가?”
“그냥, 머리가 아프다고 해. 밥도 굶어. 내일 이곳을 떠나면 두 배로 먹으면 되잖아.”
“지금 먹는 게 중요해? 아프다고 누웠는데, 백작부인이 찾아오면 어떡해? 그럼 단둘이 되는 거잖아.”
“아, 그렇구나. 그건 더 문제네. 그럼, 공작을 먼저 불러서 같이 있어. 문 꼭 닫고.”
“야!”
캘리는 답답한 소리를 하는 쉴라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짓을 어떻게 해? 아직 해가 창창한데!”
“계곡에선 남사스럽게 둘이 잘만 붙어 다니더만.”
“새벽이었잖아. 아무도 깨지 않았어.”
“다 깨어 있었어. 너만 몰랐지.”
“뭐?”
“나중에 기사들끼리 그러더라. 오줌 마려운데, 두 사람 민망할까 봐 자는 척하느라 혼났다고.”
아.
캘리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정말 창피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방 안에 있는 건 안 되겠어. 방금까지 멀쩡해 놓고 아프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럼 방법이 없네. 그냥 부딪쳐.”
쉽게도 말한다. 캘리는 그런 쉴라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쉴라가 다시 건성으로 말했다.
“사실, 백작부인이 의심하면 어쩔 건데? 넌 이미 백작의 딸이라는 게 의심스러울 행동들을 많이 했어. 단검 휘둘렀지, 활 쐈지. 이미 공작에게 의심받을 짓은 다 들켰는데, 뭐. 백작부인은 고모일 뿐이야. 하루만 지나면 영영 안 봐도 될 사이고. 그러니까 대충 해.”
그런가?
아, 또 쉴라의 말에 휘둘린다. 그런데 믿고 싶다. 쉴라 말이 맞을 거라고, 정말로 믿고 싶다.
***
쉴라의 낙관은 방을 나서자마자 깨졌다.
캘리는 계단 아래에 서 있는 백작부인을 보고 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용기를 끌어모아 최대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어갔다.
“백작부인.”
“엘리샤.”
말투는 부드럽지만 쳐다보는 눈길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뭐라도 꼬투리 잡을 것이 없나 탐색하는 것처럼.
“걸음이 좀 빠르군.”
그랬나?
“아까 하녀에게 명을 내릴 때도 말이 좀 빠르고 가볍다 생각했는데…… 원래 성정이 급한 편인가?”
눈썰미가 대단하다. 내가 성격 급한 걸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인정할 수가 없다. 엘리샤 벨만은 느리다고 소문이 난 아가씨니까.
그걸 이곳에 사는 백작부인이 알 리가 없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아닙니다. 평소엔 안 그런데 지금은 식사 시간에 늦은 것 같아서…….”
눈총을 받으니 말끝이 줄어들었다.
“교육받은 귀한 집 아가씨가 말끝을 흐리다니…….”
백작부인이 혀를 찼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하던데. 그래서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건 알겠지만, 이래서야 디콘스의 가장 위대한 전사이자 베아투름의 영주인 워렌 공작의 부인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엘리샤가 아니지만, 대놓고 이렇게 혼이 나니, 불쾌했다.
“걸음을 좀 더 느리게 걸어라. 목소리에 힘을 주고. 하인에게 명을 내릴 때는 단호하게 해. 누가 주인인지 정확히 알 수 있도록. 그렇다고 친절하지 말라는 건 아니다. 때로는 너그러운 주인의 모습을 보여야 아랫사람들도 진심으로 따르니까.”
어쩌라고?
“잘한 건 잘했다고 하고, 혼을 낼 땐 가차 없이.”
“…….”
“정말이지, 가르칠 게 너무 많아 보이는군.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 귀하게 키웠다지만, 벨만 백작은 대체 뭘 한 거지? 가정교사라도 붙여서 가르치지 않았단 말인가?”
한숨을 푹, 내쉰 노부인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안 되겠다. 급한 행동거지라도 좀 가르쳐야지. 식사 후에 내 방으로 와라.”
백작부인이 걸어간다. 그 뒷모습을 보자 캘리는 암담해졌다.
백작부인과 함께 있었던 건 두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캘리의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시간이었다.
억양부터 시작해서, 말투, 걸음걸이와 자세까지. 마치 할 수만 있다면 다시 태어나게 해주겠다는 듯 백작부인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가르치려 들었다.
캘리는 끊임없이 날아드는 잔소리에 폭발할 것 같았다. 때마침, 라이칸이 오지 않았다면 정말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내일 일찍 출발하려면 쉬어야 합니다.”
라이칸이 무뚝뚝하게 말하자 백작부인이 인상을 썼다.
“내일?”
캘리는 슬그머니 그에게 몸을 돌렸다. 그런데.
“내일은 안 된다. 아직 아무것도 못 가르쳤어. 못해도 일주일은 더 머물러라.”
캘리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라이칸이 짧은 숨을 들이켜며 인상을 썼다.
“그만하십시오. 저흰 잠깐 들른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를 공작부인으로 데려간단 말이냐? 이래선 베아투름의 백성들의 존경을 받지 못해. 부리는 자들에게 멸시당하고 조롱당할 거야. 후에, 왕의 부름으로 왕궁에 가게 되면 그땐 또 어쩔 거야? 품격 떨어진다고 귀부인들의 손가락질이나 받을 게 뻔…….”
“그만하시죠.”
라이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 어느 것도 무서워하지 않을 것 같았던 백작부인의 미소가 흔들렸다.
그가 캘리를 보았다.
“부인. 이리 오시오.”
단호한 목소리였지만 캘리는 선뜻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백작부인이 이쪽을 보지 않고 입술만 꾹 다물고 있는 걸 보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자 그가 손목을 움켜쥐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캘리는 겨우 백작부인을 향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곧장 계단을 올라 방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그가 툭, 말한다.
“고모님 상태가 별로 안 좋아서 예전보다 더하군.”
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가 안 좋아요?”
“하인들 말로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먹는 것도 부실하다는데.”
“치료사는요?”
“워낙 깔끔하고 완고한 분이라 치료사에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 아픈 것 자체가 약해 보인다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누구나 아플 수 있는 거잖아요. 그건 의지와는 상관없는 건데.”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분이야.”
그가 검을 내려놓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걸 묵묵히 보던 캘리는 문득, 물었다.
“두 사람, 사이가 안 좋아요?”
허리끈을 풀던 그가 멈칫했다.
“글쎄, 사이가 좋고 말고가 있었나? 어릴 때 잠깐 함께 살았던 것뿐이니까.”
“도망쳤다면서요?”
캘리가 웃음기 실린 목소리로 묻자 그가 인상을 썼다.
“누가 그런 소리를…… 제프리군.”
그가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도망친 게 아니야. 돌아가야 할 때라고 몇 번을 말해도 통하지 않으니까 그냥 떠난 거지.”
그때를 생각하면 다시 분통이 터지는 듯 허리끈을 푸는 손길이 거칠었다.
“외로움을 타시나 봐요.”
흠칫, 그가 다시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캘리는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알던 분도 그랬어요. 성격이 깐깐하고 근엄해서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본인이 먼저 나서서 말을 걸었죠. 근데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몰라서 자기 성격대로 명령하고 요구하고 그랬어요. 사람들은 그분을 더 멀리했죠.”
수녀원장이었다. 어릴 때 캘리의 눈에 비친 수녀원장은 너무나 크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백작부인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두 사람 다 외로운 사람이라는 걸.
“그분이 외로움 같은 걸 느낄 것 같지는 않은데…….”
그가 무심하게 중얼거리자 캘리는 고개를 저었다.
“외로움을 타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그분도 사람인걸요. 그리고…… 라이칸을 아끼는 것 같고요.”
그가 빤히 쳐다본다. 그 눈길이 너무 길어서 캘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는 척해서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난 그저…….”
성큼, 그가 다가왔다.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쥐었다.
“착하군.”
캘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제가요?”
“그래.”
“아닌데…….”
난 착하지 않다. 지금도 당신을 속이고 있는데 뭐가 착해.
그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더니 속삭였다.
“착해. 그러니 내게도 착한 부인인 걸 증명해 봐.”
갑자기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뭐 하는 거예요?”
침대 앞에 내려진 그녀는 그가 드레스 끈을 잡고 당기자 웃었다.
“이게 착한 부인인 걸 증명하는 건가요?”
“그래. 남편을 즐겁게 해주는 부인이야말로 가장 착한 여자지.”
말도 안 된다고 웃는 그녀를 침대로 쓰러트린 그가 덮쳐왔다. 언제나 그렇듯 무겁게 짓누르며 뜨겁게 밀려들었다.
***
“뭐?”
라이칸이 인상을 쓴다. 캘리는 그에게 다가가 튜닉의 주름을 잡아주며 다시 말했다.
“사흘만 더 머물다 가요.”
“…….”
캘리는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정이 늦은 건 알지만, 여기서 좀 더 머물고 싶어요.”
“왜?”
“그냥…….”
말을 고르던 캘리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난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없었잖아요. 그래서 여자로서 배워야 할 것도 제대로 못 배웠어요. 당신도 알죠?”
첫날밤의 일도 몰라서 눌려서 죽는 줄 알았던 그녀를 비웃었던 그였다. 라이칸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그랬지. 그런데 난 그걸로 불편한 걸 느끼진 않았어.”
“알아요. 하지만 난 좀 배우고 싶어요.”
그가 빤히 쳐다본다. 그러다가.
“고모님이 걱정되나?”
캘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든데, 내가 누굴 걱정해요.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급하게 떠나면 백작부인은 또다시 혼자가 되겠죠. 어쩌면 버림받은 기분이 들지도 몰라요. 그리고 앞으로 난 백작부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진짜 엘리샤가 여기 왔었다면 이곳에 남아 백작부인의 가르침을 받았을지 모른다.
내가 라이칸을 속이고는 있지만, 적어도 그의 가족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싶진 않았다.
“안 될까요?”
캘리는 진지하게 물었다. 피식, 그가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잡고 당겼다.
“안 될 건 없지. 그런데…….”
그녀가 쳐다보자 그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생각만큼 그렇게 만만하지 않을 거야. 나중에 후회되면 말해. 그 즉시 떠날 테니까.”
불안하다. 괜한 호기를 부리는 건가?
하지만 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