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30)화 (30/159)

30

“알잖아. 하프 엘프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거.”

“또 그 소리. 네가 하프 엘프라는 건 확실하지 않잖아.”

“하프 엘프가 아니라도 나는 순수한 종족은 아닌 것 같아. 어쨌든 인간과 다른 종족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는 아이를 낳지 못해.”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간혹 번식력이 강한 인간과 만나면 하프 아이를 낳아서 쿼터를 생산한다더라. 쿼터 엘프를 본 사람은 있대.”

“넌 본 적 있어?”

“쿼터 엘프? 아니. 못 봤지.”

캘리는 거보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니, 그래도…….”

“그만해.”

쉴라가 다시 말하려 하자 캘리는 얼른 손을 들어 막았다.

“어쨌든, 내가 아이를 가지는 일은 없을 거야. 난 알아.”

“뭐냐? 또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이야?”

“우린 소르테까지만 가면 돼. 네 말도 일리가 있으니까 조심할게.”

“잘도 조심하겠다. 검은 늑대가 널 볼 때마다 먹음직스러운 사냥감 보듯 하는데.”

훗, 캘리는 웃었지만 속은 편치 않았다.

그가 나에 대한 욕망이 좀 옅어지길 바란다. 그래야 나중에 받을 배신감도 적을 테니까.

그게 내가 무사히 도망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다 잘될 거야. 우린 아무 일도 없이 각자의 삶으로 돌아갈 거야. 그래야만 해.”

자신에게 말하듯 단호하게 중얼거린 캘리는 서둘러 천막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갑자기 마차가 멈췄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옆에서 말을 타던 기사도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다만, 기사가 저 앞을 쳐다보고 있기에 캘리도 고개를 쭉 빼고 앞쪽을 응시했다.

낯선 무리가 앞을 막고 있었다.

뭐지? 하는 순간 제프리가 말을 달려서 마차 옆으로 왔다.

“부인. 칸께서 잠깐 들러야 할 데가 있어서 조금 우회할 거라 합니다.”

“어딜요?”

빨리 소르테에 도착하기만을 바랐던 캘리에겐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그게…….”

제프리가 슬쩍 망설이더니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네이스 백작부인이라고, 칸의 고모님입니다.”

고모?

놀란 캘리의 눈이 화악, 커지자 제프리가 재빨리 설명했다.

“저희가 근처를 지나가는 걸 알고 백작부인이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백작가에서 하루만 머물다 가셔야겠다고 합니다. 괜찮으시죠?”

캘리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난 괜찮아요.”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라이칸은 지금 내 남편이고, 남편의 가족을 만나러 가는 일을 싫다고 할 수는 없잖은가.

그래도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의 가족이라니. 어깨에 한 짐을 더 얹는 기분이다.

***

캘리는 마차 밖에서 펼쳐지는 풍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성문을 통과할 때만 해도 여느 성과 같다고 생각했다.

높은 담벼락과 두꺼운 성문. 그리고 경계하는 병사들까지. 해자와 견고한 돌다리 주변으로 꽃들이 만발해서 그게 좀 신기하긴 했었다.

그런데, 성벽을 통과한 순간, 그 신기함은 감탄으로 바뀌었다.

성벽에 가까이 심어진 나무들과 그 안쪽으로 예쁜 꽃밭이 있었고 군데군데 돌로 만든 장식품들이 펼쳐져 있었다.

좁은 길을 따라 탑으로 가는 동안 그 아름다운 정원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차가 멈추었을 때, 그녀는 이야기 속에나 나올 법한 건축물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여긴 그냥 탑이 아니었다. 도시에서 볼 수 있는 3층짜리 집을 10개쯤 이어 붙인 것처럼 커다란 집이었다. 돌로 만들어서 높고 견고하게만 만든 탑과는 전혀 달랐다.

뾰족지붕과 벽에 난 무수한 창들, 건물 외곽을 타고 자라는 덩굴은 더럽고 무섭기보다는 싱그럽고 활기가 있어 보였다.

다가온 라이칸이 그녀를 마차에서 내려주며 빠르게 속삭였다.

“고모님이 뭐라 하시든 마음에 담지 마.”

뭐?

캘리가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던 그때였다.

“라이칸.”

근엄하고 무거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 캘리는 움찔했다.

흰 머리칼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귀부인이었다. 라이칸이 귀부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모님.”

“어서 오너라. 뭐 하고 있는 거냐? 고모를 안아줘야지.”

귀부인의 명령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발 다가선 라이칸이 겨우 안는 시늉을 하고 멀어지려고 했다. 그러자 귀부인이 와락 끌어안더니 풀어준다.

“더 듬직해졌구나. 네가 매번 승전보를 전한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다. 매해 보내주는 약재와 생필품도 고맙게 받고 있고.”

라이칸은 무뚝뚝한 얼굴로 그저 고개만 살짝 숙였을 뿐이었다. 귀부인이 그제야 뒤에 서 있는 캘리를 보았다.

“그대가 벨만 백작의 딸이군.”

흠칫,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엘리샤 벨만입니다.”

“아니지.”

갑자기 귀부인이 인상을 쓰자 캘리는 당황했다. 귀부인은 엄격한 얼굴로 캘리의 소개를 정정했다.

“이젠 벨만이 아니라 워렌 공작부인이지.”

아.

“네…….”

캘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귀부인이 라이칸의 팔짱을 끼며 몸을 돌렸다.

“어서 들어가자. 네가 오스피아로 신부를 맞으러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곳을 지나가기를 손꼽아 기다렸단다. 네가 이렇게 나를 찾아주니, 이 고모가 너무나 기쁘구나.”

결코, 라이칸이 자발적으로 방문한 건 아닌 것 같지만, 그걸 귀부인도 아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 표정과 말투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강적이다.

캘리는 귀부인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슬쩍, 눈길을 돌리자 이쪽을 보던 와이엇과 오웬이 흠, 하면서 목을 가다듬고 시선을 돌리는 게 보였다.

제프리가 다가왔다.

“어서 들어가시죠. 부인.”

“그래요.”

계단을 오르면서 제프리를 보았다. 시선을 안 마주친다.

뭔가 있다. 다들 내게 뭔가를 숨기는 게 있는 거야.

비밀은 얼마 가지 않아 밝혀졌다.

사실, 비밀까지도 아니었다.

방으로 안내된 후에도 라이칸은 보이지 않고 제프리가 와서 곧 식사를 할 테니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옷을요?”

“예.”

제프리를 따라온 하녀가 드레스를 침대 위에 펼치자 캘리는 놀라서 물었다.

“이건 뭐지?”

“백작부인께서 갈아입으시라고 보내신 겁니다.”

하녀의 대답에 캘리는 드레스를 보았다.

두 겹의 리넨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는 다른 어떤 것보다 풍성해 보였다.

어깨부터 팔까지 상아로 만들어진 브로치가 달려 있고, 허리에는 벨트를 묶어 고정하는 형태였다.

그저 펼쳐져 있는 것만 봐도 소맷단과 치맛단이 얼마나 풍성하게 주름이 잡힐지 짐작이 될 정도였다.

이런 드레스를 나이 든 백작부인이 입을 것 같진 않았다.

“이건 누가 입던 거지?”

캘리가 묻자 하녀가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결혼해서 떠나신 아가씨가 입던 드레습니다. 북쪽으로 시집을 가셔서 이런 얇은 드레스는 필요 없다고 남기신 겁니다.”

“아.”

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씻을 수 있는 물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캘리는 하녀가 방을 나가는 걸 보았다. 하녀의 태도가 어찌나 절제되고 깍듯한지, 이쪽이 도리어 긴장이 될 지경이었다.

“교육을 잘 받은 하녀네요.”

캘리가 중얼거리자 제프리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발 다가서며 머뭇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부인. 아무래도 이 얘기는 좀 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가 쳐다보자 제프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부인이 좀…… 엄격합니다.”

그런 것 같았다. 아랫사람을 보면 주인의 성품도 아는 거니까.

“그래요?”

“예. 백작부인은 예의가 없거나, 품위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못 봐줍니다. 신분에 맞는 예의범절을 반드시 지키길 원하시죠.”

신분에 맞는…….

왠지 겁이 덜컥, 난다. 기사들이 그래서 그렇게 경직되어 있었구나.

그리고, 라이칸이 평소보다 더 무뚝뚝했던 것도 떠오른다.

“라이칸이 백작부인을 어려워하나요?”

“어려워하냐고요? 아니요. 칸은 절대 누군가를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좀 성가셔하시죠. 백작부인이 이것저것 잔소리를 많이 하셔서…….”

“라이칸에게 잔소리를 한다고요?”

“예. 백작부인은 돌아가신 워렌 공작님의 누님인데, 오래전에 네이스 백작의 아내가 되셨죠. 결혼을 하면서 베아투름에서 나와 이곳 남부에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칸이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셔서 고모이신 백작부인이 이곳으로 데려와 1년 정도를 키워주었습니다. 사실, 키웠다기보다는 다음 대 공작으로서 갖춰야 할 예의를 가르쳤다고 하는 게 맞죠. 원래는 2, 3년 데리고 있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참지 못한 칸이 도망쳐서…….”

도망?

캘리의 눈이 커졌다.

세상에. 천하의 라이칸이 도망을 쳐?

“그…… 어렸을 때니까요.”

제프리가 자신의 주군을 대신 변명해 주는 것도 웃겼다.

어쩐지, 라이칸이 귀엽게 느껴진다. 지옥의 사자를 귀엽다고 하면 다들 뭐라고 할까?

“그 정도로 백작부인이 엄격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엄격함은 상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아르 왕조차도 백작부인 앞에선 긴장할 정도거든요.”

정말?

왕까지 그렇게 꼼짝 못 하게 할 정도라니, 신기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캘리는 눈을 화악, 떴다.

“제프리. 그러면, 그러니까…….”

제프리가 안쓰럽다는 듯 쳐다본다.

“예. 부인. 아마도 부인도 여기서 묵는 동안 꽤나 힘들 겁니다. 백작부인이 기다린 건 다른 누가 아니라 새로운 공작부인일 테니까요.”

털썩, 캘리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제야 기사들이 내 눈을 피한 이유를 알겠다.

다들 알고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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