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캘리는 그제야 자신이 이 숲에서, 남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캠프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서, 그와 사랑을 나눌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완전히 이성을 잃고.
그들은 알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그 사실이 그녀를 떨게 만들었다.
그녀가 얼어붙은 걸 안 그가 부드럽게 입을 맞추더니 끌어안았다.
“걱정 마. 아무도 안 오니까.”
안 오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보지 않아도 그들은 알 거라는 게 문제였다.
그가 그녀의 옷을 제대로 입혀주고 주름을 펴주었다. 그 손길에 캘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할게요.”
목소리가 떨렸다.
난 알지도 못했다. 누가 부르는 소릴 듣지도 못했다. 그가 멈추지 않았다면…….
너무나 창피해서 눈이 빨개졌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이봐. 캇타.”
갑자기 그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을 감싸서 들어 올렸다. 그렁그렁, 물기가 맺힌 그녀의 눈을 본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우린 부부야. 방금 일어난 일은 갓 결혼한 부부에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내 부하들도 그걸 충분히 알아.”
그래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우린 진짜 부부도 아니다.
캘리는 눈길을 내리며 고개를 틀었다.
“먼저 가세요.”
“아니. 안 돼. 숲속에 혼자 둘 수 없어.”
그는 단호했다. 그녀가 느끼는 부끄러움 같은 건 고려 대상이 아닌 것 같았다.
“난…… 진정할 시간이 필요해요.”
아직도 남아 있는 열기를 진정시켜야 했고, 기사들 앞에 나설 용기도 필요했다.
그가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좋아. 그럼 캠프 근처까지 가서.”
캘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칸은 그런 그녀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직 해소되지 않은 욕망으로 화가 치밀었고, 그녀의 기죽은 모습을 보자 이 숲을 모조리 태워버리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캠프 근처까지 걸어갔다.
숲 입구에 대고 칸을 부르고 있는 와이엇을 보자 살인 욕구가 격렬히 치밀었다. 와이엇의 잘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라이칸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길게는 안 돼. 내가 나가고 5분. 그 이상은 안 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칸은 그녀를 다시 한번 쳐다본 뒤, 홱 몸을 틀었다.
와이엇이 숲이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칸!”
망할.
캘리는 그가 캠프로 돌아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기사들이 그를 둘러싸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상대의 말을 듣고 있는 얼굴은 조금 전, 자신에게 꽃을 주며 귀를 붉히던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공작이다. 대륙의 전설이고, 모든 종족의 공포의 대상인 검은 늑대다.
그런데 어째서…….
캘리는 시선을 내려 하얀 꽃을 보았다. 열매에서 떨어져 나온 꽃은 힘없이 처져 있었다.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쉴라는 나를 찾아 날아올 것이다.
그럼, 어디로 가지?
캘리는 방금 나온 숲속을 보았다. 그와 함께일 때는 몰랐는데 어둡고 습해 보였다. 구구구구, 크으으으으, 스스스스, 아까는 몰랐던 온갖 음침한 소리들이 다 들렸다.
그녀는 다시 캠프 쪽을 보았다.
기사들 사이에서 우뚝 솟은 라이칸을 눈으로 좇았다.
쓸모없는 감정.
그녀는 꽃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꽃이 하늘거리며 흙바닥으로 떨어진다.
꽃은 시들면 죽어버리는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러니, 쓸모없는 것은 버리는 게 당연하다.
캘리는 차가운 단검을 잡았다.
이게 훨씬 쓸모가 있지. 그러니까 영리하게 굴자.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고. 이용할 건…… 이용하고.
그리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나면 되는 거다.
***
“무슨 일이야?”
라이칸의 목소리는 심통 난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거칠었다. 숲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불러대던 와이엇은 미안함과 고소함, 그 어디쯤을 헤매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오웬이 절대 웃지 말라는 듯 와이엇에게 험악한 인상을 써주고 라이칸을 향해 대답했다.
“드로이가 돌아왔습니다. 남작이 들개 말고도 문제가 있다고 했답니다. 칸이 직접 들으셔야 할 것 같아서요.”
“칸.”
불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드로이가 라이칸을 보고 얼른 달려왔다.
“들개 말고도 문제가 있다고?”
“예. 기윰 남작은 들개 문제가 발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해결책을 너무 단순하게만 생각했었다고요.”
“머리는 제대로 달려 있구만.”
와이엇이 이죽거리자 오웬도 피식, 웃었다.
드로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강에 나타난 기형 물고기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순간, 라이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드로이의 보고가 이어졌다.
“남작은 들개와 기형 물고기가 생긴 건, 마녀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녀?”
와이엇이 놀라서 되물었다. 그리고.
“마녀가 어딨어? 마녀들은 다 사이탄 숲으로 쫓겨났잖아. 디콘스엔 마녀가 없다고.”
흥분해서 침을 튀기는 와이엇의 옆에 서 있던 오웬이 드로이를 향해 물었다.
“남작은 왜 마녀 짓이라고 생각하지?”
“남작의 성에 나이가 많은 여자 마법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마법사의 주장입니다. 오래전, 대륙의 연합 기사단이 마녀들을 사이탄 숲에 가두기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우려던 마녀들이 각기 다른 종족 간의 교합을 통해 돌연변이를 만들어서 인간을 공격하게 만들었다고. 그 마법사는 마녀들이 사이탄 숲을 빠져나온 게 틀림없답니다.”
오래전, 디콘스에선 불을 다루는 마녀들을 화형에 처하거나, 사이탄 숲으로 몰아넣고 가뒀다.
그 후로 지금까지 불을 다루는 이는 반드시 마녀로 몰리고, 마녀로 몰리면 죽임을 면치 못한다. 물론, 불을 다루는 자들만이 마녀로 몰리는 건 아니었다.
이것저것, 이유는 많지만, 모든 것이 한 가지로 통했다.
마법사들 눈 밖에 나는 자들.
그러니까 요즘은 마녀로 몰리는 이유가 마법사들의 입맛대로라는 거였다.
“돌연변이 들개는 자기가 만들어놓고 뭔 헛소리야? 그리고, 사이탄 숲은 마법사들이 다 같이 힘을 합쳐서 결계를 쳐놨잖아. 그 결계를 깰 수 있는 이는 없다고, 마법사들이 지들 입으로 그래놓고 이제 와서 뭔 소리야? 남작이 자기가 한 짓에 대한 문책이 있을까 봐, 있지도 않은 마녀까지 끌어들이는 거지.”
와이엇이 콧방귀를 뀌며 말하자 드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남작이 변명하기로는, 자기는 늑대와 개를 교접시킨 적은 없답니다. 사냥개와 일반적인 들개를 잡아서 교접을 시키긴 했지만. 그 둘의 교합으로 그런 난폭한 들개가 나올 리가 없다는 겁니다.”
“지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남작의 마법사가 개의 개체 수를 늘리려고 마법 써놓고 시침 떼는 거, 아냐?”
드로이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죠. 근데, 그 마법사는 마녀의 짓이라고 굳게 믿고 있더라고요.”
와이엇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마법사하고 마녀하고 구분 짓는 것도 웃기더라. 하는 짓은 둘이 똑같으면서. 까놓고 말해서, 두 집단이 권력 싸움하다가 한쪽이 진 거잖아. 마녀나 마법사나 다 같은 종족인데, 왜들 싸우고 그러나 몰라.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걸. 하여튼, 그놈의 권력 다툼이 문제야.”
“어이, 그런 소리 마. 디콘스에서 마녀는 잡히면 바로 처형이야. 그런 마녀를 옹호하다간 같은 무리로 묶여서 사달이 난다고.”
오웬이 이죽거리자 와이엇이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 한번 묶어보라고 해. 자신 있으면.”
“저저, 무모한 인간. 자네가 마녀랑 엮이면 칸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걸 몰라? 마녀 집단의 기사를 충직한 신하로 둔 칸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오웬이 직설을 날리자 와이엇이 그제야 쳇, 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드로이가 슬며시 다시 끼어들었다.
“근데, 그 여자 마법사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고요. 전설의 태양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전설의 태양?”
오웬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 어투가 마치, 뭔가를 아는 것 같아서 모두의 눈이 엘프족 전사에게로 향했다.
“왜? 그게 무슨 태양인데?”
와이엇이 궁금한 얼굴로 묻자 오웬이 어깨를 으쓱한 후 라이칸을 보았다.
“제가 살던 엘프족 마을의 가장 나이 많은 자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언젠가 눈부신 태양이 나타나면 흩어진 왕국이 합쳐져서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탄생할 거라고. 그땐 뭐, 마녀의 시대가 온다고. 그런 전설이 있답니다.”
“뭔 헛소리야? 태양은 지금도 하늘에 잘 떠 있는데. 마녀들이 그냥 하는 말이겠지. 지들 유리한 대로. 참, 거창하게도 논다. 인간들, 현혹시키려고 헛소문 낸 걸 엘프족은 믿냐?”
“엘프족뿐만 아니라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야.”
“전설은 전설일 뿐이지. 그리고 왕세자가 어떤 사람인데, 다른 이가 왕국을 합쳐? 하. 그 왕세자가 자기 자리 노리는 놈을 잘도 두고 보겠다.”
와이엇의 마지막 말에 다른 기사들은 표정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디콘스의 만달루테 왕세자는 자신이 이어받을 왕권을 위협하는, 그 누구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이고도 남을 위인이었으니까.
와이엇이 칸을 보았다.
“저런 헛소리는 무시하는 게 맞습니다. 마녀들이 숲을 빠져나왔다면 벌써 아르 왕도 알았겠죠. 사이탄 숲을 지키는 병사와 마법사들이 다 죽지 않았다면. 게다가 아르 왕이 각 영지마다 심어놓은 정보원들이 한둘이 아닌데. 왕이 알았으면 벌써 칸의 귀에도 들어왔을 테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웬이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엔 조사를 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마녀들이 한꺼번에 움직이지 않고 한둘씩 조용히 빠져나왔다면 숲을 지키는 자들이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왕의 정보력이 뛰어난 건 알지만, 인간의 눈과 귀가 미치지 않는 숲이나 강에서 일어나는 일까진 알 수 없을 테니까요. 차라리 아르 왕에게 전령을 보내서……!”
그때였다. 갑자기 공기를 찢은 비명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숲이다!”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고함이 울리기 전에, 라이칸은 이미 땅을 박차고 달리고 있었다.
상황은 단박에 파악됐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와 단도가 꽂힌 채 꿈틀거리는 도마뱀 한 마리.
라이칸은 아직도 살아 있는 도마뱀의 대가리를 검으로 세차게 내리찍었다. 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핏기가 없는 하얀 얼굴을 보며 물었다.
“어디야?”
“다리…….”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삭이자 라이칸은 재빨리 치마를 들췄다.
발목에 선명한 이빨 자국이 있었다.
라이칸은 망설임 없이 몸을 숙였다. 입술에 힘을 주어서 세차게 빨아내서 바닥에 뱉어내길 반복했다. 누군가 재빨리 가져온 술 주머니를 내밀자 그걸로 입을 헹구고 다시 독을 빨아냈다.
캘리의 표정이 더 크게 일그러졌다.
“칸.”
테드가 가죽 주머니를 가져와서 옆에 쭈그리고 앉으며 라이칸을 불렀다.
“그만하셔도 됩니다. 독이 퍼지지 않도록 다리를 묶어주세요.”
테드가 그녀를 보며 빠르게 말했다.
“해독은 못 하지만 조금이라도 독을 흐리게 하는 가루를 뿌릴 겁니다. 좀 아플 겁니다.”
라이칸은 그녀를 품에 안고 수건을 입에 물렸다. 테드가 가루를 뿌리자 그녀가 몸을 뒤틀며 신음했다. 칸은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힘껏 끌어안았다.
“타르포릅니다.”
확신 어린 목소리에 칸은 고개를 들었다. 난쟁이였다. 벨만 백작가에서부터 따라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