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목욕탕은 강 바로 옆에 있었다. 벨만 백장의 영지 내, 마을에는 강이 없었다.
대신 숲 안에 있는 계곡에 목욕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지만 그건 귀족들의 전유물에 가까웠다. 그런데 여긴 다른 듯했다.
“저희 마을은 수량이 많은 강 옆에 있어서 목욕탕이 아주 잘되어 있습니다. 사제들이나 교역민이나, 상인들까지. 여행하는 자들이 우리 마을을 꼭 거쳐서 가는 이유가 이 목욕탕 때문입니다. 바로 옆에 빵 굽는 화덕이 있어서, 거기서 나오는 열기로 한증막도 만들었죠. 저희 목욕 시설은 일대 마을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장이 웃으며 천막을 걷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캘리는 뒤따라온 제프리를 향해 말했다.
“가서 식사하세요.”
“아닙니다. 부인. 끝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게 제 의뭅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것을 보니 이젠 확실히 알겠다.
이 어린 견습 기사는 날 싫어해.
캘리는 무뚝뚝한 견습 기사를 보며 다시 말했다.
“그러지 말고 가서 식사하세요.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그럴 수 없습니다.”
싫지만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지는 않겠다는 표정이다.
“저기…….”
둘이 대치하고 있는 것이 답답했는지 주인장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바로 옆에 식사하는 공간도 따로 있는데 그쪽에서 기다리시는 건 어떠세요?”
캘리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네요.”
하지만 제프리는 인상만 쓰고 있었다. 캘리는 다시 부탁했다.
“그렇게 해주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오면 되잖아요.”
“에이, 저희 마을은 평화롭습니다. 아무 일도 안 생겨요. 다만…….”
자신만만하던 주인장의 목소리가 급격히 잦아들었다. 제프리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다만, 뭐요?”
“별건 아닙니다. 가끔 들개들이 주변에 나타나긴 하는데.”
“들개?”
제프리가 코웃음을 쳤다.
“그깟 놈들이 뭐가 대수라고.”
들개 따윈 열 놈이 덤벼도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캘리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식사하고 계세요.”
이번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책임감 강한 견습 기사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결국 제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를 치십시오.”
“네. 그럴게요.”
촛불이 은은하게 켜져 있는 목욕탕 안은 아늑했다.
중앙에 사람 둘은 들어가 앉아 있을 수 있는 큰 나무통 안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비누와 향이 좋은 약초, 스펀지와 비누까지, 필요한 물품이 다 갖춰져 있었다.
목욕탕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해 보였던 주인장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할 정도로 훌륭한 시설이었다.
옷을 벗은 캘리는 우선 따뜻한 물을 커다란 물통에 퍼내서 머리부터 감기 시작했다.
물이 검은색으로 탁해지더니 이내 밝은 금빛이 묵을 때를 벗고 드러나기 시작했다.
잠깐이라도 본래 머리로 있고 싶어서 지코이를 쓰지 않고 그대로 탕 안으로 들어간 캘리는 몸을 휘감는 따뜻한 온기에 절로 신음을 내뱉었다.
“아…….”
그동안 쌓인 피로가 일시에 풀리는 것 같았다. 캘리는 눈을 감고 편안하게 몸을 이완시켰다. 스르륵, 눈이 감겼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미끌, 탕 위에 올려놓았던 팔이 툭, 떨어지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졸았던 모양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캘리는 얼른 스펀지에 비누를 묻혀서 몸을 닦기 시작했다.
탕에서 나오자마자 지코이를 물에 풀어서 머리를 빠르게 물들였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옷을 입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리자 캘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으아악!
콰앙, 쿠앙.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가 커다랗게 부서지는 소리가 천막 안까지 크게 울렸다.
캘리는 나머지 옷을 빠르게 입었다.
***
“소르테에 들렀다 가려면 시간이 지금보다 더 지체될 것 같습니다.”
오웬이 걱정된다는 투로 말하자 와이엇이 인상을 쓰며 동의했다.
“그러게. 예정보다 배는 걸리겠어. 이러다간 베아투름엔 한겨울에 도착할 수도 있겠는데. 부인이 적응할 시간도 없겠어.”
베아투름의 겨울은 거의 살인적이다. 봄은 왔는지도 모를 만큼 짧게 지나간다.
여름은 봄보다는 길지만 그래도 한 달 정도가 다였다.
그리고 가을. 지독한 겨울의 추위와 맞설 준비를 하기 위한 계절이었다.
베아투름의 겨울을 겪어보지 못한 종족이라면 가을 동안 적응하면서 추위를 이겨낼 몸을 만들어야 했다.
“부인이 말을 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와이엇이 말하자 오웬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남부는 숙녀가 말을 탈 일이 없어서 배울 필요가 없다잖아.”
“그러니까 왜 그렇게 하냐고. 숙녀도 자기 살 궁리는 해야지. 말 타는 법 정도는 배워둬야 하지 않나?”
“베아투름처럼 험한 곳이 아니잖아. 백작의 딸인데 좋은 마차도 있고 지켜줄 이도 많으니까, 배울 이유가 없었겠지.”
라이칸은 오웬과 와이엇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때였다. 옆 테이블에 낯선 남자들이 우르르 와서 앉는다. 루트를 들고 있는 음유시인도 보였다.
“어서 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자고. 오늘 밤 기운이 심상치가 않아.”
시인이 말하자 다른 남자가 묻는다.
“구름이 많아서?”
“그렇지.”
“늑대?”
“아니. 들개.”
“들개?”
“오는 길에 들렀던 마을들도 들개들의 습격을 받았다더군. 이렇게 달빛이 어두운 밤에.”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 일대에 들개가 자주 나타난다더니.”
“예. 맞습니다.”
그때 마침 음식을 가지고 온 주인장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시인과 남자들뿐만 아니라 라이칸과 기사들도 주인장을 쳐다보았다.
“이 마을도 습격을 받았습니까?”
시인이 묻자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몇 달 전에 들개들이 내려와서 가축들뿐만 아니라 사람도 물어 죽였습죠.”
“예에? 사람도?”
남자들이 놀라자 주인장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들개는 마을엔 잘 나타나지 않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마을 깊숙이까지 들어왔습니다. 몇몇 남자들이 나서서 쫓아내려다가 도리어 봉변을 당했죠. 한 사람이 죽고 세 사람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세 사람은 치료사가 있는 더 큰 마을로 갔고요.”
남자들이 조용히 있자 주인장이 다시 말했다.
“오늘 밤처럼 딱 이렇게 달빛이 희미할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들개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특히 강가에는요.”
“이보시오. 주인장.”
와이엇이 주인장을 불렀다. 그러자 주인장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예. 나리. 뭘, 더 드릴까요?”
“이 근처에 있는 강 속에 기이한 형태의 물고기가 있던데…… 아는 바가 있소?”
주인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기이한 형태의 물고기요? 아니요. 전혀 들은 바 없습니다만…….”
그러다가 주인장이 다시 주의를 준다.
“물고기는 모르겠지만, 들개들이 강가 쪽에 자주 출몰하긴 합니다. 그래서 저희도 이런 밤에는 목욕탕 운영을 자제…….”
“목욕탕?”
오웬이 인상을 쓰며 묻자 주인장이 ‘예.’ 하던 그때였다.
콰당! 문이 세차게 열리며 남자아이 하나가 뛰어 들어와서 소리쳤다.
“들개예요! 강에 들개가 나타났어요!”
***
밖으로 나오던 캘리는 눈앞에 벌어진 끔찍한 광경을 보고 얼어붙었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깨진 난장판 한가운데에 목욕탕 주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공포에 질린 주인장의 얼굴이 여기서도 보였다.
“부인! 들어가세요!”
커다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제프리가 들개 세 놈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보였다.
들개의 붉은 눈을 본 캘리는 눈을 화악, 떴다.
평범한 들개가 아니었다. 놈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고 핏발이 선 눈, 털을 곤두세운 몸집은 늑대만큼이나 커 보였다.
뾰족한 이를 드러낸 놈들은 크르르, 소리를 내며 당장이라도 제프리를 향해 달려들 것처럼 보였다.
“사, 살려줘!”
주인장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캘리는 고개를 홱, 돌렸다.
들개 한 마리가 주인장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콱, 무는 게 보였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으아아아악.
끔찍한 비명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캘리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오직, 사람이 개에게 뜯어 먹히는 것만은 막고 싶다는 일념밖에는.
바닥에 나뒹구는 집기류를 살피다가 단도를 발견하고 곧장 달려가 집어 들었다.
캘리는 주인장을 물어뜯고 있는 놈을 향해 힘껏, 칼을 던졌다. 퍽, 목덜미에 칼이 꽂힌 들개가 캥! 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부인!”
제프리의 고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순간,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들개 한 마리를 본 캘리는 홱, 몸을 돌려 피했다. 옆으로 튄 들개가 다시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기. 무기가 없어.
제프리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들개가 더 빨랐다.
캘리는 돌아서서 뛰었다. 주인장이 쓰러져 있는 곳까지 달린 그녀는 방금 쓰러진 들개의 몸에서 칼을 뽑았다.
하지만 늦었다. 칼을 잡고 몸을 돌리는 순간, 달려드는 놈의 시뻘건 눈과 마주친 캘리는 본능적으로 칼을 휘두르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순간적으로 다리를 뜯기던 주인장이 떠올랐다.
자신도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였다. 선뜩한 칼날이 공기를 휘익, 가르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털썩, 들개의 머리통이 댕강 날아가 바닥을 구르는 걸 본 캘리는 비명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는…… 워렌 공작이었다.
어둠 속에서 검을 빼 들고 사방에서 몰려드는 들개들을 순식간에 베어내고 있었다.
커다란 검 날이 공기를 쉬익, 쉬익, 가를 때마다 피가 솟구치고 들개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사나운 짐승의 고통에 전 울음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캘리는 그제야 어둠에 적응한 눈을 주변으로 돌렸다. 기사들이 있었다. 와이엇과 오웬. 다른 기사들도.
얼마 되지 않아, 바닥은 들개의 피가 냇물처럼 흐르고 몸에서 갈라져 나온 머리통들이 사방에서 뒹굴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등줄기에 서늘한 한기를 느낀 캘리는 몸을 돌렸다. 순간, 피를 흘리며 서 있는 들개 한 마리를 보고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