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10)화 (10/159)

10

“고급 드레스를 입어서 그런가, 겉은 그럴싸해. 근데, 하는 짓이 문제야.”

“내가 뭘?”

“첫날밤에 칼을 휘두르는 레이디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것도 남편의 팔에 상처까지 냈잖아.”

“그거야 죽지 않으려고…….”

캘리는 쉴라를 노려보았다.

“네 탓이야. 네가 그랬잖아. 내가 눌려서 죽을 거라고 겁을 줘서…….”

눌린다는 말을 제대로 하는 게 창피했다. 그 행위는 쉴라가 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눌리긴 눌렸잖아. 아니야?”

“그래. 물론 그랬지만, 그건…….”

“얼굴은 왜 빨개져?”

쉴라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캘리는 얼른 본래 이야기로 돌아갔다.

“내가 칼을 휘둘러서 숙녀 같지 않다는 거야?”

“물론, 그것만으로는 의심하지 않겠지. 하지만 넌 진짜 레이디 같지가 않아.”

“진짜 레이디는 어떤데?”

“음…… 잘 울지.”

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운다고?”

“그래. 내가 본 숙녀들은 걸핏하면 울더라. 그래서 손수건도 챙겨 다녀.”

“왜 우는데?”

“몰라. 그냥 시도 때도 없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찍, 닦아. 그리고 걸핏하면 쓰러지고.”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하는 표정을 짓자 쉴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고 아무 이유 없이 쓰러지라는 건 아니고. 음…… 가령, 무서운 장면을 본다거나 하면…….”

“무서운 장면?”

“가축이 도살되는 걸 본다거나, 무서운 짐승을 본다거나.”

“그게 무섭다고?”

“수녀원 밖을 남자애처럼 돌아다니면서 온갖 짐승들을 맞닥트리며 자란 너한텐 그런 게 안 무섭겠지.”

“나도 무서운 거, 있어. 말로만 듣고 실제로 본 적은 없는 오우거나 언데드 같은 건 정말 무서워.”

“그건 웬만한 기사들도 다 무서워하는 거야. 검은 늑대와 그 기사단만 빼고. 어쨌든, 성안에서 곱게 자란 레이디는 사슴만 봐도 무서워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걸?”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린가. 세상에 사슴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어?

“사슴이 무섭다고?”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의 캘리를 보며 쉴라가 다시 혀를 찼다.

“그러니까, 네가 의심받는 거야. 숙녀들은 안 무서워도 무서워해야 돼. 그게 남자들의 보호 심리를 자극하니까.”

캘리는 인상을 팍, 썼다.

“난 그런 보호 심리 필요 없어.”

“필요해. 넌 백작 딸처럼 보여야 하잖아.”

캘리는 못마땅한 듯 인상을 썼다. 쉴라 말이 맞았다.

하지만.

“꼭 쓰러져야 돼?”

그건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야. 네가 레이디처럼 보일 수 있는.”

“그러다가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기라도 하면?”

“그러니까 널 받아줄 수 있는 사람 쪽으로 쓰러져야지. 음, 그 엘프 전사가 좋겠네. 너한테 친절하잖아. 순진하게 생긴 견습 기사도 괜찮고.”

“…….”

“어쨌든, 네가 의심받지 않으려면 레이디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소리야. 근데, 그 전에 머리색부터 해결해야겠다. 레이디고 뭐고, 네 머리색을 들키면 다 끝장이니까.”

“아, 맞다.”

레이디처럼 보이는 일에 몰두하다가 그걸 잊었네.

퍼뜩 놀란 캘리는 황급히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마침, 하녀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얼른 계단을 내려가 쫓아갔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밟으며 가로지르자 왁자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홀이 나타났다.

캘리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목욕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려고 쫓아온 건데…… 남자들이 가득 차 있는 홀에 와버렸다.

이미 공간의 반을 차지한 토르 기사들이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하는 음식들을 향해 덤벼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캘리는 빈 그릇을 수거해서 급하게 지나가는 하녀를 붙잡았다.

“저기. 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녀가 쓱, 쳐다본다. 행색을 보니, 돈 좀 있는 부류라는 판단이 섰는지 바로 인상을 풀고 미소를 짓는다.

“그냥 세수만 하시겠어요? 아니면, 목욕을 하시고 싶으세요? 간단한 세숫물은 1쿠퍼, 목욕은 2쿠퍼부터입니다.”

여자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근처에 앉아 있는 남자들에게 다 들릴 것 같았다. 캘리는 당황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목욕으로 할게.”

“아, 목욕이요? 그럼, 뜨거운 물로 혼자서 한 시간 동안 한적하게 즐기실 수 있는 목욕을 하시는 게 좋겠죠? 그건 5쿠퍼입니다.”

하녀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캘리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 그게 좋겠어.”

“선불입니다. 아가씨.”

캘리는 얼른 주머니를 꺼냈다. 그때였다.

“주지 마십시오. 부인.”

놀란 캘리가 홱, 돌아보자 오웬이 서 있었다. 하녀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마치, ‘엘프족이잖아.’ 하며 무시하는 눈빛. 하지만 오웬의 등에 차고 있는 긴 검을 보고 눈길을 슬쩍 내려버린다.

“볼일을 마친 후에 지불해도 됩니다.”

캘리를 향해 말한 오웬이 하녀를 향해 ‘안 그러냐?’ 하고 묻자 여자가 불퉁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그러셔도 됩니다.”

뭐야? 나한텐 선불이라더니.

“그럼, 바로 가시겠습니까?”

하녀가 묻자 캘리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웬이 미간을 찌푸린다.

“식사부터 하셔야죠.”

그리고 고개를 슬쩍 숙이더니 말했다.

“공작님 옆에 자리를 마련해 뒀습니다.”

오웬의 말에 캘리는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와이엇 고든과 나란히 앉아 있는 워렌 공작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쪽은 관심도 없다는 듯 이제 막 나온 닭고기를 집어서 물어뜯고 있었다.

캘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오웬을 보았다.

“먼저 씻고 먹을게요.”

“그러면 음식이 남지 않을 텐데요. 저희 기사들이 워낙 먹성이 좋아서 오늘 밤, 이곳에 있는 음식들을 싹 다 먹어치워 버릴 겁니다.”

설마…… 하면서도 눈빛이 흔들렸다. 슬쩍 돌아보니, 오웬의 말이 전혀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기사들은 정말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었다.

잠시 갈등했지만 캘리는 땋아 내린 머리카락 끝이 벌써 노란빛을 띠는 걸 보고 얼른 말했다.

“그래도 씻어야겠어요. 지금 당장.”

황급히 말한 캘리는 기다리고 있는 여자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웬이 인상을 쓰는 것도, 저쪽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던 워렌 공작이 쳐다보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

“왜 혼자 와? 부인은?”

오웬이 맞은편에 와서 앉자 와이엇이 물었다.

“먼저 씻으시겠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와이엇이 고기를 씹고 있는 라이칸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뭐야? 하며 쳐다보는 라이칸을 보며 와이엇은 혀를 찼다.

“부인을 돌보셔야죠. 칸.”

라이칸이 인상을 쓰자 와이엇이 다시 말했다.

“그렇게 무뚝뚝하게 대하시면 또 칼을 맞…… 윽.”

맞은편에 있던 오웬이 테이블 아래의 발을 걷어차자 와이엇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오웬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와이엇. 자넨 그 입부터 어떻게 해야 돼. 그래야 토르 기사단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을걸?”

“모르는 소리. 내가 토르의 중심인데, 누가 날 해고해?”

오웬이 라이칸을 턱으로 가리키자 와이엇이 얼른 정정했다.

“아, 물론 칸은 할 수 있지. 하지만 칸과 나는 불알친구라고. 형제나 다름없지. 그러니까 절대…….”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던 와이엇은 라이칸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자 얼른 웃음기를 지웠다. 그리고.

“그럴 수도 있겠네.”

와이엇이 중얼거리자 오웬이 쿡쿡, 웃었다. 그러다가 오웬은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신경은 좀 써주시죠. 살던 고향과 가족을 떠나서 혼자 얼마나 외롭고 무섭겠습니까?”

라이칸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약한 여자가 아니야.”

그러자 와이엇이 다시 혀를 찬다.

“뭐, 숙녀치고는 칼도 잘 쓰…….”

라이칸이 노려보자 와이엇은 얼른 말을 돌렸다.

“어쨌든 여자는 여잡니다. 남자도 가족들과 혼자 뚝 떨어져서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 먼 길을 여행하게 되면 견디기 힘들 텐데, 여자의 몸 아닙니까. 거기다가 결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남편은 아는 척도 안 하니, 그 외로움이 오죽하겠습니까. 신경 좀 쓰세요. 좀 다정하다고 불알 떨어지는 건 아니니…… 윽!”

다시 오웬에게 걷어차인 와이엇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빽 질렀다.

“오웬! 다시 한번 내 발을 걷어차면 네 불알을 차주마!”

“해보시지. 그 전에 네 혀부터 잘려 나갈걸?”

“뭐야? 해보자는 거냐?”

와이엇이 당장이라도 덤빌 듯 몸을 기울이던 그때였다.

“앉아.”

라이칸의 한마디에 서로 으르렁거리던 오웬과 와이엇이 바로 꼬리를 내리며 자리에 앉았다.

와이엇에게 인상을 한 번 써 보인 오웬은 고개를 돌려 라이칸을 보았다.

“부인은 여관에서 운영하는 목욕탕으로 갔습니다. 제프리를 딸려 보냈습니다.”

보고를 들은 라이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와이엇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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