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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라고?”
낮은 목소리에 캘리는 주춤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러니까 이제부턴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긴 여행이 될 테니까.”
“어떻게 해야 잘 지내는 거지?”
뭐?
동그랗게 눈을 뜬 캘리는 당황했다.
“어떻게라뇨? 그냥 싸우지 않고 친절하게…….”
“또 실수하면?”
이번엔 진짜 놀랐다. 정말 심장이 쿵, 떨어지는 착각이 들 만큼.
캘리는 굳은 눈빛으로 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흠, 목을 가다듬었다.
“실수는…… 한 번만 해야죠. 두 번 하는 건…… 실수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날 일은 결혼식을 완성하는 마지막 의식 중 하나였으니까. 그러니까 이젠 결혼도 성사됐고, 우리가 다신 실수를 할 일은…….”
“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
캘리는 눈을 깜박거렸다.
무슨 소리냐는 듯.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일찍 죽었다고는 했지만 유모도 있었을 테고, 여자 하녀들이나, 친구들도 있었을 텐데.”
백작의 딸, 엘리샤에게 묻는 거야.
캘리는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당장이라도 그녀가 속였다는 걸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캘리는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난 많은 걸 배웠어요.”
“아니. 그대는 아무것도 못 배웠어. 특히, 부인의 의무에 대해서.”
“저도 의무에 대해서 알아요. 귀족의 아내는 영지를 관리하고 성을 깨끗이 유지하고, 아랫사람들을 잘 관리해야 하죠. 전 그런 것들에 대해 충분히 배웠어요.”
쉴라가 알려준 대로 읊었다. 이런 대답을 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던 쉴라가 맞았다.
수녀원에서만 살았고, 벨만 백작가에 온 후엔 일만 하느라 다른 건 전혀 모르는 그녀가, 백작의 딸이 아니라는 걸 들킬까 봐 미리 준비시켜 줬던 쉴라에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남편을 위해 침대를 데워줘야 하는 의무에 대해선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나?”
순간, 캘리는 고개를 홱, 쳐들었다.
“침대를 데워요?”
“따뜻하게.”
“따뜻……?”
“우리가 했던, 그 실수라는 것도 하고.”
순간, 캘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실……수를 또 한다고요?”
그날 밤, 그 행위를 또 한다는 건가? 설마…….
그녀의 얼어붙은 얼굴을 보며 그가 씨익, 웃었다.
“해야지. 계속. 그대가 공작부인으로 있는 한은.”
아, 아니, 안 돼.
캘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에 대해 당황했다.
“왜, 왜 그래야 하죠? 그날 밤 한 번이면 충분하지 않나요?”
이건 계획에 없던 거야.
어떻게 그 일을, 그 생경하고 이상했던 느낌을 또 느껴야 한다고?
“그건 결혼식의 의식 중 하나였고 우린 이미 그걸…… 해치웠으니까…….”
“해치워?”
그의 눈빛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찰랑이는 물결이 눈동자에 비쳐서일 것이다.
“그래요. 그러니까 내 말은, 결혼 의식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는 거죠.”
“아니, 절대 충분하지 않아.”
그는 단호했다. 그가 너무 확고한 눈빛이라서 캘리는 멍해졌다.
“그럼, 당신 말은…… 그러니까 우리가 밤마다…… 한 번씩…….”
“여러 번일 수도 있지.”
캘리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밤마다 계속 날 누르겠다는 거군요. 난 계속 아플 거고…….”
그녀는 얼이 빠져서 중얼거렸다.
“아니.”
갑자기 단호한 목소리를 낸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성큼 걸어와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캘리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공작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더니 지그시 내려다본다.
그 눈빛이 점점 다가오고, 급기야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아픈 건 처음만 그런 거지. 내가 다시 그대를…… 누르게 된다면, 아주 즐거울 거라고 장담하지. 아니, 맹세해.”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입술이 닿았다. 부드럽게 스치는 바람처럼.
그러다가 갑자기 얼굴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캘리의 놀란 입술이 벌어졌다.
순간, 그의 입 안에서 뜨거운 혀가 촉수처럼 뻗어 나와 그녀의 입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숨이 막혔다. 아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배 속이 조여들고 뜨겁게 일렁이는 느낌.
혀와 혀가 뒤엉켰다. 입 안을 샅샅이 핥으며 휘저었다.
마치, 결혼식을 치렀던 그날 밤처럼.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캘리는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비틀, 하는 그녀의 허리를 재빨리 받친 그가 피식, 웃으며 속삭인다.
“밤엔 더 좋을 거요. 부인.”
순간, 뺨이 달아올랐다. 캘리는 뒤로 물러서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난…….”
그때였다. 갑자기 그가 그녀의 팔을 홱, 낚아채더니 자신의 뒤로 밀었다. 놀란 그녀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왜……?”
화를 내려고 그를 보는 순간 말을 멈췄다. 그는 강을 보고 있었다. 서늘한 눈빛으로.
덩달아 강으로 고개를 돌린 캘리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멀리 떨어진 물속에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바삭.
나뭇잎을 밟는 소리에 그녀가 놀라서 뒤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오웬.
엘프족 전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물에 뭔가 있습니다.”
공작이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오웬이 다시 말했다.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강물만 뚫어져라 응시하던 공작이 갑자기 그녀를 보았다. 캘리는 그의 날카로운 눈길을 받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가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고 오웬을 향해 물었다.
“근처에 마을이 있나?”
“예. 8말트(약 8킬로미터) 정도 거리에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마을이라는 소리에 캘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조금 전, 강에서 뭔가를 보고 겁이 났던 것도 잊을 만큼 반가운 소리였다.
아늑한 방, 목욕, 침대. 그 단어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늘 밤은 마을에서 묵는다.”
공작의 말에 캘리는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그들이 앞장서자 캘리도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섰다.
그때였다. 목에 걸어뒀던 두건이 물속으로 스륵, 떨어졌다.
그녀가 재빨리 허리를 굽혀 두건을 집으려던 그때였다. 물속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뭐지? 눈을 한 번 깜빡이던 순간이었다.
“물러서!”
날카로운 외침과 동시에 검이 그녀의 바로 코앞에 날아와 꽂혔다.
너무 놀라서 비명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공작이 그녀의 팔을 잡고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검을 물에서 뽑아 올리자 그 끝에 펄떡거리는 물고기가 딸려왔다.
툭, 바닥에 던져진 물고기가 퍼덕거렸다. 그런데.
“아.”
캘리는 그 괴상한 생김새에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물고기의 형태는 끔찍했다. 눈은 툭, 튀어나와 있었고 몸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리고 입을 뻐끔거릴 때마다 뾰족한 이빨들이 부딪치며 딱딱, 소리가 났다.
소란한 소리를 듣고 달려온 와이엇이 물고기를 보고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뭐야? 식인 물고긴가?”
와이엇이 오웬을 보고 물었다.
“글쎄. 나도 이런 건 처음 봐.”
오웬도 고개를 젓더니 강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돌연변이 같기도 하고…….”
“돌연변이?”
와이엇이 놀라서 눈을 끔뻑거렸다. 캘리도 굳었다.
“돌연변이가 생기는 건 불길한 전존데…….”
오웬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눈살을 찌푸린 채 강을 쳐다보았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물은 평화로워 보였지만 잠깐씩 움직이는 그림자는 위험을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을에 가보면 뭔가 알 수 있겠지.”
공작이 중얼거리더니 그녀의 팔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캘리는 그들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뛰다시피 해야 했다.
***
해가 질 녘에 도착한 곳은 작지만 활기찬 마을이었다.
여기저기, 돼지 울음소리와 닭 울음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이 웃으며 달려간다.
널어놓은 빨래를 거둬들이는 여자들의 손길이 빨라지고 불을 피우는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왁자하게 울리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저기가 좋겠습니다.”
기사 한 명이 가리킨 여관은 마구간도 있고 방도 여러 개 있는 이 층 목조 건물이었다.
바퀴가 멈춰 서자 캘리가 마차에서 내리려는데 난쟁이가 달려와 재빨리 손을 잡아주며 속삭였다.
“머리부터 감으셔야 합니다. 아가씨.”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봐 정중히 말하는 폼이 우스웠다.
하지만 캘리도 그 의견에 공감했다. 안 그래도 목욕을 하고 싶은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그녀는 새장 문을 열어서 쉴라에게 속삭였다.
“방에 도착하는 즉시 창문을 열어둘게.”
새장을 나온 쉴라가 푸드덕,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기사들은 말 위에서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캘리는 곧바로 2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짐은 두시고 바로 내려오시랍니다. 아가씨.”
하녀의 말에 캘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곧장 방을 가로질러서 창문을 열고 조용히 불렀다.
“쉴라.”
그러자 바로 머리 위에서 푸드덕, 날갯소리가 나더니 쉴라가 창문 안으로 휘익, 날아 들어왔다. 둘만 있는 걸 확인한 쉴라가 그제야 후아,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말 안 하고 지내려니까 답답해 죽을 것 같아.”
“백작한테 잡혀 있는 몇 달 동안도 잘 참았잖아.”
캘리는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꺼내며 대꾸했다.
“그땐, 그때고. 지금은 자유잖아. 근데도 이렇게 말 못 하는 신세라니. 이게 다 주인을 잘못 만나서……. 어이, 지코이 챙겨. 머리색 바뀌고 있다. 넌 하필 머리색이 왜 그렇게 밝은 색이야? 그렇게 밝으니까 더 눈에 띄잖아. 들키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이라고.”
“그러지 마. 내가 이런 머리색을 갖고 태어나고 싶었겠어?”
“하긴. 그건 네 맘대로 되는 게 아니지. 어쨌든. 내가 오면서 기사들 얘기하는 걸 엿들었는데, 그 소문이 다 맞았어. 네 남편, 우리가 자길 속인 걸 알면, 네 목을 두 손가락으로 잡고 꺾어버릴 인간이야.”
쉴라가 하는 말은 길게 듣고 있으면 미쳐 버릴 것 같다. 처음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듣고 있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없던 두려움도 생기고.
어쨌든, 쉴라 말 중에 하나는 맞을 것이다. 라이칸 워렌, 그 남자는 자기가 속은 걸 알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캘리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안 들켜야지.”
“당연히 안 들켜야지. 목숨이 걸렸는데. 근데, 눈치가 빠른 종족이라면 벌써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뭐? 어떻게?”
인상을 쓰며 쳐다보자 쉴라가 눈알을 굴려 그녀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쭈욱, 훑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