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번뜩!
검격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이미 보고 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강호는 피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검격과 똑같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큭…!”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위협적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은 그녀와 완전히 똑같은 존재였다. 강호가 할 수 있는 건 그도 할 수 있었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녀도 할 수 있다.
똑같은 검, 난정을 뽑아든 둘은 그렇게 몇 번이나 공방을 주고받다가 잠시 거리를 벌렸다.
“안타깝군. 그 정도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면, 조부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검에 대해서는 이미 다 이루었다. 그분 역시 인정해주었어.”
강호의 반박에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흥. 손녀가 기어코 떠나겠다는데 들어주지 않을 수 있을까. 결코 만족스럽게 보내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너는 내가 삶이 끝나는 날까지 그분의 잔재 아래에 살아야 했다고 말하는 거냐?”
“물론! 양친이 돌아가신 이후 너를 돌봐준 것이 누구냐? 그 은혜에 답할 길은 무엇이냔 말이다.”
“은혜…….”
물론 은혜를 잊은 적은 없었다. 자신에게 가문의 비전도 물려주고, 가문의 모든 것을 전부 주려고 했다. 아니, 가문뿐 아니라 조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말이다.
그러니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만 그가 바라는 것을 다 이루어주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아니었지만….
“조부께는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이강호. 나에겐 나의 삶 역시 중요해.”
“…….”
“나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그것을 깨달은 것은 아이들을 만났을 때였다. 자신이 지금껏 포기해온 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는지 역시, 그때 처음 알았다.
두 번째로 자각하게 된 것은 천후를 만난 이후였다. 정확히는 그가 자신의 손을 끌어 잡아준 그 날 이후.
포기할 것과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생겼다.
“이기적인 것.”
“조부 역시 마찬가지였지.”
조부는 자신이 이뤄내지 못한 것을 강호에게서 보고 있었다. 어린 그녀를 꾀어내어 그 끝을 보고자 하나의 완벽한 검귀를 만들어 내버렸다.
그것을 그저 조부의 정이라고 포장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강호는 천천히 검을 끌어올렸다.
“네가 조금만 더 빨리 나타났다면. 그래…. 1년 전에 나타났다면 분명히 혹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아니야. 나는 내가 바라는 삶을 살아갈 거다. 조부가 바라는 대로 검 역시 내 삶의 일부가 되었지. 그러니 이제 와서 이것을 때어낼 수 없어. 이걸로 반은 이룬 것이 아니냐?”
“그런 건 궤변이다!”
“그래. 하지만 사랑은 궤변을 부르더군.”
스륵. 한차례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과거 뒤로 묶어두었던 머리칼은 이제 풀려서 나풀거린다. 그 안쪽으로 웃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와라. 사랑을 모르는 너에게 나는 지지 않는다.”
순간, 주변에서 소리 지르던 하인들이 환영이 날아가고, 눈앞의 그의 눈이 커졌다.
*
“레졔나 시리즈 링크….”
빛의 거검을 올려본 라즈베리는 인상을 썼다. 저 위력은 지금의 라즈베리는 발휘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자매들을 통해서만 이뤄낼 수 있는 조화니까 말이다.
완전해진 례졔나의 힘은 과거 알프스 때 자신보다 더욱 거대한 힘을 휘두르고 있었다. 모리나 그윈들링이 완전히 사망한 이후, 링크가 많이 약해진 라즈베리는 흉내조차 내기 힘든 위력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동작이 너무…커!”
번뜩! 빛의 검일 떨어져 내리는 것과 동시에 라즈베리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다시 나타난 곳은 레졔나의 뒤편이었다.
“아니…?!”
놀랄 틈도 없이 초록 오오라를 두른 라즈베리가 레졔나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전격이 터지면서 레졔나가 소리를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싸부랑 상대할 때도 느꼈지만, 그거 보기에만 멋지지 생각보다 실적이 엉망이거든.”
분명 위력은 경천동지. 하지만 지금 상대는 저런 것에 맞아주기엔 너무나도 작다. 파리를 목도로 잡으려는 시도나 마찬가지랄까?
“이게―”
레졔나가 그런 라즈베리를 다시 제압하려 들었지만, 그동안 하프 캐스팅을 끝낸 라즈베리는 레졔나에게 디버프를 걸었다.
전체 랭크가 하강하고, 그 영향으로 링크에 영향이 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순간, 허공에 설치되어있는 모니터의 스피커를 통해서 비명이 서라운드로 울리기 시작했다.
“괴로워! 괴로워!”
“그만해! 싸우지 마!”
“꺄아아아아아아악!”
소리를 내지르는 레졔나의 모습을 보며 라즈베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봐. 이게 네가 지금 다루는 힘의 정체야. 완성형이라는 지금도 그 모양이지. 수천, 수만의 아이들을 희생해서 만들어낸 조화는 어머님이 억지로 봉합하지 않으면 제대로 다룰 수조차 없어. 왜냐면…소체인 우리 자체가 불안정한 존재니까.”
레졔나는 분명 강력한 마법사였지만, 어디까지나 일반 마법사였다. 모리나 그윈들링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신역에 접하게 하면 어딘가에서 반드시 과부하가 걸린다. 무난하게 처리한 것 같아 보여도, 실제로는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공격당해도 금세 불안정해진다. 레졔나도, 레졔나와 연결된 링크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제하는 모리나 그윈들링 본인 역시 말이다.
링크를 안정시키는 동안 전 세계에 퍼져있던 마법사 공급 시스템 쪽이 요동치면서 소동이 일어났다.
“이런 외줄 타기를 제대로 된 성과라고 부를 수 있어? 난 아니라고 생각해. 그 기계인형의 이론이 맞을지 몰라도 현실 국면에선 엉망이야.”
“윽….”
뼈 아픈 일침에 레졔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걸 본 라즈베리는 천천히 포즈를 취하며 외쳤다.
“그리고 그 결과가 사람에게 고통만 줄 뿐이라면…이 DS의 부하 1호, 라즈베리 미키스트리가 박살 내주겠어!”
“까불지 마! 배신자 주제에!!!”
*
지구를 완벽하게 물의 행성으로 만들어버린 주범이 다시 한 번 세상을 불꽃으로 물들인다. 그 안에서 이그네스는 신음했다.
“후우….”
괴롭다.
리미터가 유지되고 있는 지금 이그네스가 발휘할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장 똑같이 저런 화염 정령이 될 수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몸이 아파서 괴롭단 의미는 아니었다. 입고 있던 옷은 불에 타서 사라져버렸지만, 그녀 자신은 불꽃 속에서도 아무런 피해도 없이 서 있었다.
불꽃과 같은 색의 머리칼이 일렁대며 춤을 춘다. 무사한 그녀의 모습을 본 정령은 아리아와 함께 고개를 갸웃댈 뿐이다.
“아―――?”
“바보가 된 이 모습을 보는 게 괴롭군….”
완전히 이성을 상실해있었다. 그녀가 남극에서 폭주했을 때,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선을 놔버린 그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롭다.
또한 이 모습을 볼수록, 자신이 얼마나 기적적인 확률을 뚫고서 지금 사람의 형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갔으면 자신은 이런 모습이 되었으리라.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령은 계속 불을 뿜어댔다. 하지만 이그네스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힘의 차이가 있어서 그녀가 좀 더 생각을 하고 밀어붙이면 이그네스도 당할 수밖에 없지만, 이 정령은 불이 안 통하면 더 센 불을, 더더욱 센 불을 불러올 뿐이다.
이걸론 도저히 쓰러지려야 쓰러질 수 없었다.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자기가 마법사란 자각이 전혀 없구나. 가련한 것.”
되려 이그네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화염 정령은 놀랐는지 그녀를 밀쳐내려 들었지만, 스파크만 터질 뿐이었다.
성장한 자신의 얼굴에 양손을 가져다 댄 이그네스가 속삭였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나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이 세상을 봤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네가 되지 않을 거다. 이런 세상이 찾아오게 두진 않을 거야.”
정령은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만은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심홍색의 오오라만은….
“그러니, 오늘만은 나를 막지 말아다오!”
“아―――!”
*
세상에 있는 것이라고는 어둠뿐인 공간. 아니 이곳을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망설여지는 어딘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두 가지. 자기 자신. 그리고….
“이걸로 서른두 번째군. 제대로 싸울 생각이 없는 거냐?”
눈앞에 있는, 또 다른 자기 자신.
오로지 이 두 가지만이 또렷하게 보인다. 그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며 남자, 영천후는 쓰게 웃었다.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이 눈앞의 남자는 자신이 아니었다. 생긴 것만 똑같을 뿐. 내용물이 완전히 다르다.
왜냐면 이자야말로 자신과 11년이나 한 몸을 사용해온 별의 적자였기 때문에.
그가 악시스 문디에서 나온 직후.
섬광이 있은 뒤에 눈을 뜨자 보인 것이 이곳이었다. 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공간이었다. 이곳은 ‘소년’, 별의 적자가 머물던 의식의 틈바구니를 그대로 형상화한 곳이었으니까.
실제론 실존하지조차 않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둘은 확실히 그곳에 있었다.
이 어둠 속으로 들어온 영천후는 그때부터 별의 적자의 공격을 받았다. 천후는 처음엔 그것에 대응했다.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그를 쓰러뜨리고자 노력했다.
하지만…진다. 뭘 어떻게 해도 이길 수가 없다. 그리고 최초에 목이 따였는데 되살아나게 된 순간, 천후는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도 복부에 뚫려있던 구멍이 어느샌가 거짓말처럼 나아있었다. 재생력의 영향은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자 복원되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천후는 저항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른두 번이나 죽음을 겪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의미가 없으니까.”
“…….”
“여기서 내가 널 이긴다고 해봐야 현실 세계에선 영향이 없어. 애초에 네가 나와 다른 사람들을 여기로 끌어들인 건 시간을 끌기 위해서니까….”
“눈치챘나?”
별의 적자는 혀를 찼다. 눈썰미나 판단력이 좋아진 건가? 하긴, 그가 몸에서 나온 여파로 영천후는 지금까지 봉인되어있던 모든 기억뿐 아니라 가이아, 별의 적자에 대한 정보를 더욱 직접적으로 얻게 되었다.
일정 기간 뇌를 신의 대자가 차지했었던 만큼, 그가 사고했던 정보를 고스란히 차지한 것이다.
그렇게 천후의 이야기를 들은 별의 적자는 더 공격하는 대신,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어둠 사방에 갑자기 여러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강호, 라즈베리, 이그네스가 자신의 분신들과 싸우는 장면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디제스터를 맞이해 고전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까지.
그중 신의 대자가 시선을 주고 있는 것은 가장 후자, 일리미네이터들의 모습이었다.
“네 말이 맞다. 이건 어디까지나 시간 끌기지. 나 역시 네 몸에서 빠져나온 여파로 격이 한 단계 줄어들었다. 이제 이전처럼 마음대로 행동하긴 힘들어. 덕분에 나는 사실상 인간에게 주어진 최종 시련이 아니라 ‘열네 번째 시련’이 되었지.”
“…….”
그것은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의 대자가 나타나기 전 시련은 ‘이겨낼 가능성’이 있는 시련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피할 길 없는 시련이었는데…그 성질이 변화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너와 내 영향을 받은 것들은 잠시 격리해두었다. 순수한 인간의 힘을 보기 위해서. 너희가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은 너희의 노력 그 자체보단 저 밖에 있는 인간들의 노력 여부에 달렸다고 봐야지.”
“그것참…. 끔찍한 이야기군.”
당장 천후 말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해, 이강호와 다른 이들은 자기 분신과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어찌 보면 저쪽이 정신적으론 더 편하리라. 일단 자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었으니까.
한숨을 내쉰 천후는 밖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보며 탄식을 내질렀다.
거기에는 과장 하나 없이, 지옥이 강림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