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그날>
지직. 지지직.
노이즈가 들려온다. 소년의 목소리.
아니. 아니다.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가 구축해두었던 시스템이 무너지며 나는 소리.
정신이 뒤바뀌면서 나는 소리다.
‘나’라는 존재가 밀려나고, 그곳에 다른 것이 들이차는 소리.
그 순간. 알고 만다.
내가 다시 저곳으로 돌아갈 일은 없다고.
아아. 하지만…….
그래도 좋다.
저놈만 끝장낼 수 있다면.
나를 밟은 채 그녀의 시체조차 유린하려고 하는 저놈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면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 마음과 함께. 자아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점점 침잠하는 감각에 빠져든다. 그것은 말하자면 꿈과 비슷했다.
순식간에 잠이. 아마도 영원할 잠이 찾아왔다. 그리고…. 또 하나.
지난 11년간 그를 지긋지긋하게 쫓아다닌 꿈 역시도 찾아들었다.
아니 이제 꿈이 아닌.
진실이.
*
11년 전.
뭄바이.
공항에서 조금만 나오면 번화가가 펼쳐진 도시다. 총인구가 천만이 넘는 인도의 대도시. 그곳의 시장에 한 가족이 있었다.
“천후야. 엄마랑 옷 입어보러 가자~.”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밝은 성격의 여성이었다. 그녀, 유지민은.
24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남편인 영주성과 결혼한 그녀는 그다음 해 바로 사랑의 결실을 보았다.
영천후.
그녀의 미모를 그대로 이어받아 태어난 남자아이였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약간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이제 막 10살이 된 소년은 마치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그녀의 손을 잡고 있을 따름이었다. 똘망똘망한 커다란 눈을 떴다가 감은 아이는 대답도 없이 그녀를 따라 걸을 뿐이었다.
“뭘 그런 걸 다 물어보고 있어? 어차피 대답도 안 할 텐데.”
“모르는 소리 하지 마. 가끔은 대답하거든? 흥이다. 그치, 천후야?”
뿔룩하고 볼을 부풀린 그녀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그렇게 말했다.
둘 사이에서 나온 아들, 영천후는 말이 거의 없었다. 태어날 때도 울지 않아서, 의사는 처음엔 사산을 의심했다. 그 뒤로도 의사표현이라곤 거의 없었다.
이 문제로 두 부부는 종종 말다툼을 하곤 했다. 정신과를 찾아가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그렇다고 아이가 완전히 정신이 망가진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너무나도 지나치게 얌전할 뿐. 자신의 생리적인 문제는 전부 알아서 해결하곤 했다. 화장실을 가리게 된 이후부터는 말이다.
천후의 부친은 반 정신 장애인이나 다름없는 그런 아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친은 달랐다. 그녀는 이렇게 결혼기념일을 맞이하여 온 해외여행지에서도 아들을 챙겼다.
그녀 역시 아들의 부족한 부분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인 예상을 하고 있었다.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지만 막상 꺼내기 시작하면 못하는 게 아닌 데다가, 학교도 멀쩡하게 다니지 않는가? 공부는…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남편의 평가는 너무 박하다는 것이 그녀의 견해였다.
특히 오늘같이 기념할만한 날엔 더더욱 아들에 대한 흉은 나오지 않길 바랐다. 그 눈빛에 주성은 입을 다물었다. 10년이나 그와 함께해온 아내다. 이런 데서 싸움이 나고 싶진 않았다. 그는 재빨리 항복 의사를 밝혔다.
그 뒤. 그녀는 아들에게 여성용 쪼리를 대보며 좋아했다. 아이는 그래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나름대로 행복한 가족이 보내는 한 때였다. 아들이 말썽을 부리는 것은 아니니, 오늘 하루는 그런 행복에 젖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런 기대가 무너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사탕수수 주스를 사 들고서 시장 중앙에 들어섰을 즈음이었다.
갑자기…판매하기 위해 기르고 있던 동물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말이나 염소 등은 사람이 있건 없건 치고서 지나갔고, 새장 속 새들은 어떻게든 문을 열고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변.
“아…, 자, 자기.”
“괜찮아. 이리 와. 천후, 너도 어서.”
위기를 감지한 주성은 아내와 자식을 지키려 애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에게도 아들을 향한 부정은 있었던 것이다. 만약 무슨 일이 난다면 자신이 가장 먼저 맞서리라는 그 모습은 과연 남편이자 아버지라 부를 만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손짓에 고개를 돌린 아이는…더는 그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저. 날 때부터 신으로부터 그런 운명을 부여받은, 인간의 겉껍데기였을 뿐.
그 증거로 그의 눈은…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길게 기른 머리칼 역시 역으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때가 왔노라.”
눈물 흘리는 아이의 입으로.
*
사건의 중심점은 아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갑자기 소년의 시야에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인간이 세워놓은 문명의 흔적이.
도로도, 건물도…모든 것이 깔끔히. 태양 빛 받아 지면에서 일렁이던 아지랑이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모든 것이 황무지로 돌아갔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뿐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의 생명 역시 증발한다.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은 깔끔하게 사라져 나신이 된 사람들은 그대로 잠들 듯이 황무지 위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바로 옆부터 지평선 저 끝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어질 때까지.
그의 부모마저도.
오로지 소년 하나만이 눈물 흘리며 홀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
소년의 눈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시체들에게 향했다. 동물들이 풀려나 난동을 부릴 때부터 그를 지키고자 온 힘을 다하던, 부모의 정을 보이던 둘에게.
그 때문인지, 소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해서 나왔지만, 표정은 전혀 없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울 뿐이다. 그 눈물이 감정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에 의한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홀로 남은 소년은 그때부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자신’이 벌인 조화를.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생겨난 황무지 위에 펼쳐진 지옥의 광경을.
방금까지 시끄럽기 그지없었던 이곳은 이제 지독한 정적이 지배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소년이 뱉어내는 작은 숨소리만이 존재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만 같았다.
원래는 그래야 했다. 그러나.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 저편에서 정적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것이 가이아의 아들인가?”
“미친…이게 무슨…!”
“뭄바이 천만 인구가 증발하다니.”
시야를 어지럽히는 아지랑이 저편에서 검은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었다. 13명의 사람. 아니. 그들을 사람이라 부르는 건 조금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곳. 모든 인간이 시체로 화한 곳에서도 그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초자연적인 힘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아이의 얼굴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그렇게 접근했을 때. 그들은 들을 수 있었다.
“시원의 마법사를 따르는 어리석은 놈들. 이곳으로 온다고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것은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은 말이었다. 어느새 눈에서 눈물이 말라버린 아이는 그중에서 가장 가운데에 있는 자를 노려보았다.
“랑크 메이거스. 어머님께선 진노하셨다. 네가 거짓으로 인간들이 시련을 넘어서게 한 것에. 이제 그분은 시련의 수에 구애받지 않으신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나이니, 심판을 맞이해라.”
“…….”
그자는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인상은 30대 중후반쯤 될까? 중세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갈색 로브에 지팡이를 든 그는 당장에라도 부서져 내릴 것처럼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야가 내린 시련은 인간이 극복할 방도가 없을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그렇기에 후대로 넘어갈 힘을 끌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너의 이기심일 뿐. 이제 내가 세상에 난 이상 인간이 맞이할 결론은 정해져 있다.”
그 말에 나타난 이들은 주변에 펼쳐진 광경에 다시금 눈을 두었다. 그 직후, 그들의 눈에는 분노와 전의가 남았다.
“칠십억 인류를 전부 죽여 없애버리겠다는 거군.”
그 말에 아이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나는 남을 것이다. 본디 인간 뒤에 나타났어야 했을 정명한 존재. 진정한 마법사만이.”
“아….”
그것이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모든 인간이 사망한 이 자리에 홀로 남은 이가 하나 있지 않은가?
이자에게 패배한다면, 이제 이 별에 인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단 한 명의 마법사만이 살아남으리라.
“그것이 그녀의 의지란 말인가?”
“그래. 벌써 천 년 전부터 품어왔던 의지지. 랑크 메이거스. 그녀의 뜻은 바뀌지 않는다. 천 년은 어머니에겐 눈 깜짝할 시간일 뿐.”
“그럴 테지….”
금방이라도 먼지가 되어 부서질 것만 같은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다음 순간 크게 눈을 떴다.
“허나 그래도. 인류가 멸하는 날이 오늘은 아니게 하겠다.”
그 선언과 함께…그 열셋의 몸에서 오오라가 타올랐다. 마치 태양 빛과도 같은 오오라였다. 그것을 마주한 소년은 가느다랗게 웃음 지었다.
“어리석은 것들. 할 수 있으면 해봐라. ‘너 이제 힘을 잃으라.’”
당당히 선언한 소년이 손가락으로 그들 중 하나를 가리키자, 그가 발하던 오오라가 풋 하고 꺼지며 그가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거꾸로 떨어져 내린 그는 그대로 목이 부러져 절명했다.
“저건!”
“조심해라. 그는 말 그대로 신의 아들. 그가 다루는 힘 역시 그녀가 직접 부여한 것. 신역에 대처하지 못하면 모두 죽을 거다.”
잿빛 남자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온 세상에 아지랑이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에 종말을 고하듯이.
*
천지를 뒤집어버릴 듯한 싸움이 벌어졌다. 하늘의 전리층이 어지럽혀지고, 궤도에 있던 인공위성이 영향을 받아서 마치 유성우처럼 떨어져 내렸다.
소년과 마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숙명 그 자체가 덮쳐와 생명을 끊어버린다. 마주해서조차도 안되는 신의 창조물을 상대로 마법사들은 온 힘을 다해 저항했고.
그 결과.
열셋은 다섯으로 줄고. 소년은 눈을 감았다.
아주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당장…당장 죽여야 합니다! 이런 녀석이 다시 눈을 뜨면 아무도 상대할 수 없습니다. 메이거스!”
중년의 남성이 외치는 소리에 회색의 마법사는 답했다.
“어차피 그녀의 아들이다. 당장 죽인다 해도 새로이 태어날 뿐이다. 나도 힘이 거의 다했다. 같은 존재를 다시 상대할 순 없어.”
“그렇지만…!”
“그러니 그것보단 다른 가능성에 걸고 싶다. 가야가 이 아이에게 남겨둔 퍼즐에.”
“뭐라고요?”
남자는 눈을 감은 소년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 아이의 내면엔 또 하나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신격에 눌려서 전혀 발달하지 못한 인간의 영혼이. 그러나 그의 몸에서 발아해서인지, 그는 모든 인간의 영혼을 부수는 이곳에서도 이 몸 안에 남아있군.”
“…….”
“그녀는 이런 실수를 할 자가 아니야. 여기엔 필시 의도가 있다. 나는 이 아이의 영혼을 열쇠로 삼아 신격에 봉인을 걸겠다. 이 아이가 자라면 자랄수록 자연적으로 신격을 억눌러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도록.”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저 나무를 봐요! 이미 또 다른 그녀의 창조물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악시스 문디! 저게 자라난다면 인류가 끝장날 거라면서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이 신격이 잠들면서 세상에 남긴 부분일 뿐이다. 추가적으로 신격에 자극이 가해지지 않고 제명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면 아마도…. 그래. 이것은 그녀가 다시 인간에게 내린 시련이로군.”
홀로 무언 갈 깨달았단 듯이 웃은 남자는 잠든 소년의 머리를 훑었다.
“네가 앞으로 겪을 인생의 편린이 보인다. 결코 순탄치만은 않겠지. 너에게 닥칠 사건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준비 해두겠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남기는 이적이 되겠지. 그러니 소년이여. 부디 부탁건대 이 지옥을 번갈아 보더라도, 이 기억을 완전히 되찾는 날은 오지 않길 바란다. 그 날이 바로 인류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니.”
냉철하기 그지없던 그의 목소리는 마지막에만 아주 잠깐 풀렸다. 그가 가장 중요히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듯이.
그것은 마치 기도하는 것 같은 목소리.
그 기도도 의미 없이.
“오랜만에 세상에 나오는군.”
별의 적자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