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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309화 (309/324)

309화

<약속은 덧없이>

피가 튀었다. 그의 온몸에. 그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홍희주의 것이었다.

그에게 안긴 그녀의 등 뒤가 완벽하게 위아래로 갈라지며, 척추가 그대로 돌출되었다. 갈비뼈에 보호받고 있던 몸의 중요 장기 역시 손상되었다.

절명.

순식간에 생명을 잃어버린 그녀는 마지막 숨조차 들이쉬지 않고 그저 그에게 안겨있을 뿐이었다. 등 뒤를 바라보기 전에는 시신이란 걸 알기조차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러나 안다.

안겨있던 그녀의 심장 고동은 이제 더는 들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속삭임도 이제는 없다.

흘러내리던 눈물은 멎어 이제 슬퍼할 수조차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스란히 알려주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

당황한 천후는 다시금 그녀와 입을 맞춰보았지만, 그녀를 주박에서 풀어주었던 세 자매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그걸로 힘을 다했다는 것처럼.

말조차 제대로 자아내지 못하며 세이브 해두었던 회복마법을 그녀에게 걸어보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리는 마법 따위 그는 부릴 줄 모른다.

“빌어먹을 13선조. 사람이 죽을 고생을 해서 만들어놓은 결과물에 무슨 먹칠을 하는 거지? 역시 별이 직접 낳은 것들은 예의도 미학도 없군. 빌어먹을 것들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내용은 알 바 아니었다. 그것에 정신이 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단 하나. 그가 앞으로 뻗어낸 손만이 신경 쓰일 뿐이다.

그녀의 등을 가른 궤적으로 움직였던 그 손이.

공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는 나왔다. 불가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무슨…짓이야…?”

몸이. 목소리가.

영혼이 떨린다.

그를 지켜보는 눈동자의 동공은 한없이 좁아지고, 그 흰자에선 핏발이 터져 나왔다. 목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비명에 가까웠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그렇게 외쳐보지만, 가운 입은 남자는 지겹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할 뿐이었다.

“쓸모없어진 인형을 폐기 처분한 것뿐입니다만. 당신들이 끌고 다니는 그 옛것들이 강력하긴 하지만, 심어둔 모든 코드를 다 제거한 건 아니었군요. 사망 코드는 통하네.”

“너어어어어!”

“아아. 시끄러워요. 귀 찢어지겠네.”

분노로 일갈을 해도, 그는 무슨 파리를 내쫓듯이 손을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그는 희주와 저택 지붕에 고꾸라진 하녀의 시체를 번갈아 턱짓했다.

“내게 있어선 이쪽이나 그쪽이나 별로 차이는 없어요. 그쪽이 좀 더 공을 들였고, 기적적인 확률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어차피 온전히 내 공으로 만든 것도 아니라 정이 크게 가는 것도 아니고.”

“…희주 씨가 아니면 날 죽일 수 없잖아.”

“무슨 소용이죠? 어차피 공격을 못 할 건데? 당신을 그냥 죽이기만 하는 거라면 당신의 애첩 중 하나인 그 진리구현자로도 할 순 있었어요. 요는 말을 얼마나 들어 먹냐 였는데. 말 안 듣는 인형이라면 그냥 없는 게 낫죠. 앞에서 신파극이나 보이는 짜증 나는 인형은 특히.”

머릿속이 타들어 간다. 그 안에 심지라도 있는 것처럼 타닥타닥 무언가가 튀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껏…이런 감각이 찾아왔을 때. 천후는 언제나 그것을 저항해왔다. 이것은 삿된 감정. 사로잡히면 더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감정의 신호다. 그러니 저항해왔지만….

이제는.

그럴 마음이 없어졌다.

조심히. 정말이지 조심히 그녀를 땅에 내려놓은 천후는 그 즉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고인규우우우우우!!!!!”

소리보다 빠르게. 아지랑이에서 흑염으로. 흑염에서 홍염으로 변한 그가 날아들었다. 이제 뒤 따위 모른다. 그딴 것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바라는 것은 하나.

“죽여 버리겠어!”

“하하하하!”

살의를 받는 것은 웃음이다. 지금까지 여유롭게 모든 광경을 관전하던 그는 팔을 헐렁하게 푼다 싶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츠츠츠츠. 그 움직임에 따라 환영 분신이 남는 운신. 그 속도는 찔러 들어오는 천후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빠르다!

“분노로 이성을 잃고 덤벼들면 무조건 다 될 줄 아나 본데-”

말보다도 빠르게 그의 손이 앞으로 뻗어진다. 그 순간, 천후가 두르고 있던 신위의 불길이 앞쪽에서 한 번 크게 흩어진다 싶더니, 갑자기 푸른 전격의 거창이 튀어나와 그에게 쏘아졌다.

“크아아아아악!”

“지금까진 어땠는지 몰라도. 난 그런 거 안 통하거든요?”

영창도 없다. 수인도 없다. 그저 간단한 손짓 한 번. 단지 그것만으로 하늘 전체가 화염으로 물든다. 그 폭발 중심부에 들어가 있던 그는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순수하게 랭크만 따지자면 당신은 내 상대가 아니에요. 이성을 잃을 거면 제대로 잃어야지.”

그럼에도 다가서려는 움직임에 그의 몸 주변에 푸른 구체가 떠올라 천후에게 날아갔다. 이를 악물며 주먹으로 마주치니 그것은 손쉽게 터져나갔지만, 그것이 하나나 둘이 아니라면? 그를 향해 날아오는 구체는 어느새 백, 천을 넘어 하늘 전체를 수놓고 있었다.

콰콰콰콰쾅! 순수한 에너지 구체에 얻어맞은 천후는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입에서 피를 한 움큼 게워내자, 다시금 세 자매가 나타나 그를 복원시켰다. 고인규는 그것을 보면서 비웃었다.

“또 나타나셨군. 그런 걸 믿고서 저에게 덤비고 있는 겁니까? 어리석긴. 그래서야 샌드백 신세를 면치 못하는데.”

“닥쳐어어엇!”

죽여 버리고 싶다. 아니 죽여 버리겠다. 머릿속을 뒤덮고 있는 생각은 온통 그것뿐이었다.

파바바바밧. 그 마음에 응한 걸까? 그의 몸 주변을 떠돌던 흰색 빛무리가 스파크를 터트리며 홍염과 어울렸다. 이를 악문 천후는 그걸 그대로 몸에 감은 채 그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아!”

“후우.”

과거 라즈베리의 몸에 임했던 기계 인격이 마지막으로 쏘아냈던 공격조차 받아내고서 알프스 산맥에 구멍을 뚫었던 공격. 이거라면 저런 단편적인 동작으로 만들어낸 주문으로 받아내지 못할 것이다.

천후의 판단은 옳았다. 아무리 그가 대단한 마법사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를 위협하는 건 말이다.

“하지만 이쪽은 어떨까?”

쿠르르릉! 다시금 전격의 거창이 하늘에 재어졌다. 그런데 그 방향은 천후에게 향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인가 싶었지만, 천후는 순간 저것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았다.

“!!!!”

“하하. 머저리!”

자기도 모르게 날아가는 경로를 바꾼 천후는 그대로 거창을 몸으로 받았다. 아주 잠시간의 경직. 그 사이 고인규는 짧은 어절의 주문을 외우더니 손을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콰릉! 하늘 문이 열리면서 백색의 순수 에너지가 그를 관통했다. 과거 박찬휘의 것과 닮은 방출마법이었지만, 그것보다 훨씬 큰 힘을 훨씬 작은 동작으로 부린 것이다.

“크학…!”

그것을 몸으로 받아낸 천후의 몸에서 빛무리가 흩어졌다. 공격을 해보기도 전에 너무 큰 타격을 받자 결국엔 캔슬된 것이다.

분함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공격은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정말 병신 같군요. 그딴 시체를 지키려고 대신 공격을 받다니. 너무 실망인데.”

“너어어어어어!”

놈이 노리던 것은 천후가 아니라 희주의 시신이었다. 천후로서는 그녀가 더 상하는 것은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고인규에게 천후의 그런 생각은 약점으로밖에 작용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홍희주의 시신은 사람의 시체도 아니라, 부서진 인형쪼가리일 뿐이었으니까.

“이거 재미있는데. 이건 어떻습니까?”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흰색 에너지의 창 수십 개가 나타났다. 저런 것 하나하나는 천후를 도저히 상처 낼 수 없다. 하지만….

“으아아아아아!”

우웅. 우우우웅…! 머릿속에서 전격이 달린다. 수인과 영창이 생략된 오토 캐스팅으로 비슷한 조화를 부린 천후는 그것들을 똑같이 맞받아쳤다.

“하하하하! 제법이군요. 그럼, 이건? 그리고 이건?”

그것을 진정으로 즐겁다는 듯이 내려다본 고인규가 손을 위로 내뻗자, 이번엔 그 열 배, 백 배가 넘는 창이 튀어나와 지면으로 달려든다.

“이…!”

이것은 도저히 받아낼 수 없다.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아랫입술을 깨문 천후는 희주의 시신을 끌어안고서 그 지역에서 피했다.

콰콰콰쾅! 폭음이 울리며 방금까지 그녀를 눕혀두었던 지역이 초토화되었다. 그동안 천후는 그녀를 옮겨두려 했지만, 그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얻어맞기만 하지 않습니까? 좀 더 힘을 써보시죠. ‘그것’만 손에서 내려놓는다면 꽤 재미있어질 것 같은데.”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고인규는 천후가 양손으로 그녀를 안고 있다는 것을 노려서 그대로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사람의 안면과 주먹이 부딪혔는데 들려오는 것은 폭음이다.

간신히 그녀를 놓치진 않았지만, 결국엔 뒤로 날아가 넘어지고 만다. 그런 그를 쫓아온 고인규는 그의 팔을 발로 차 부러뜨려 희주를 떨궈내서 옆으로 치워버리고는 그의 가슴팍을 짓밟았다.

“크…윽…!”

신위는 캔슬당하고, 공격을 일방적으로 너무 많이 당했다. 삼 자매가 발휘하는 회복력 역시 무한하지 않고, 그가 가진 선천적인 재생능력은 빠른 속도로 작용하지 않는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심장이 지속적으로 타격을 받자 그의 강화마법 역시 빠르게 소진되어 간다.

그 모습을 안경 낀 남자는 가느다랗게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타깝군요, 영천후. 저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크윽…! 이 개자식…!”

“후후후.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어요.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저는 다른 방법을 쓰고자 합니다. 아니. 사실 이쪽이 제 본심이었죠. 희주 쪽이야 최대한 맞춰준 거고…. 어차피 당신을 살해할 수단을 잃은 이 상황에 내가 거칠건 별로 없군요.”

“무슨…!”

“별거 아니에요. 멸망을 받아들이는 또 다른 자세랄까. 난 희망고문이란 걸 제일 싫어하거든요. 그러니까…이런 의미죠.”

부웅…. 그의 손끝에 빛이 서렸다. 그것은 아주 작은 힘. 천후에게는 당장 쏟아 부어져도 상처를 입히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것이 향하는 방향이 다른 곳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희주에게라면….

“하지 마! 그러지 마! 제발!!! 이 빌어먹을!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하하. 보고 싶을 뿐이에요, 영천후. 당신의 힘은 이 정도가 아닐 겁니다. 알고 있을 거예요. 당신의 내면에 있는 것. 속박당해 있는 것. 쭉 생각해왔죠. 대체 그것을 풀어낼 트리거가 무엇일지.”

천후 자신이 죽음의 위기를 겪어도 그것은 제대로 작용하지 않았다. 그저 일부 힘을 풀어주며 영천후란 인간 자체를 강하게 만들어줬을 뿐이다. 그건 오히려 그를 인정해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단 말이죠. 인간인 당신으로는 안 돼. 악시스 문디의 생명연결을 받은 인간은 사실상 현인신. 지금 영천후로서 형성된 당신의 인격은 결국 ‘후천적’인 거란 말이죠. 그게 주일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진짜를 밖에 나오게 하려는 트리거가 대체 뭘까…. 오래 생각했죠. 10년이나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고인규는 다시 한 번 그의 가슴을 세게 짓눌렀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당신 그 자체라는 거였습니다. 당신. 영천후란 인간의 인격 자체가 그가 나오는 것을 막고 있는 누름돌인 거야. 거기서 하필 저년을 만나게 돼서 랑크 메이거스의 봉인이 더욱 강해진 거지. 그러니까 반대로. 당신이 스스로 선택하면 나올 수 있겠죠. 그가.”

고인규의 손이 천천히 희주 쪽으로 향했다. 그걸 본 천후는 눈을 부릅떴다.

“자. 영천후. 분합니까? 괴로워요? 하지만 당신이 아무리 스스로 애써봐야 지금 이 상황은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어서 해방해보세요. 못한다면, 그녀는 시체조차 세상에 남기지 못할 겁니다.”

“으…아아아아아!”

눈물이.

피눈물이 나왔다.

놈의 말 대로다.

분하다. 너무나 분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다.

내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멋대로 조종하고, 그 시신조차 해하려는 놈을 나는 건드릴 수조차 없어.

이렇게 분한 적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어떤 취급을 받아도 괜찮았어.

매일 같이 내 피를 뽑아가더라도.

식사를 사람이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천장에서 떨궈주더라도.

내 알몸을 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토의를 하더라도.

성층권에서 지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하루에 단 10분밖에 주지 않더라도.

나를…인간으로 봐주지 않더라도!!!

하지만 이건 아니야!

이건…이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이 개자식!

너는 뭐야? 대체 뭐냐고? 왜 나의 삶을.

간신히 얻은 행복을 그렇게 쉽게 침범해서 모든 걸 부숴버리지?

내가 쌓아 온 모든 가치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폄훼할 수 있지?

아니. 다 좋아. 다 좋다. 하지만 나는 괜찮아. 나는 괜찮지만…

내가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에게 손대지 말란 말이다!

시야가 희뿌옇다. 놈은 시간이 지날수록 질려가고 있었다. 이제 빛은 쏘아지기 직전이었다.

분함이 사무친다.

놈의 말대로 내가 마음대로 그런 걸 정할 수 있다면…내가 부탁하고 싶을 정도다.

저 자식을 끝장낼 수 있다면…뭐라도 하겠어!

그 순간.

‘그’가 물어왔다.

‘그럼. 빌려주겠어? 대신에…이번엔 무기한이야. 하루고. 사흘이고 없어.’

답은 하나였다.

‘죽여버려!’

악마가. 세상에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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