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이제는 안녕이라 말할 때>
“희주 씨!”
“주인님….”
큰 두 손이 얼굴을 감싸고 있는 게 느껴졌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온기도. 고개를 들어보면 한 남자가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희주는 그 얼굴을 보며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자신에게 칼에 찔린 그 날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가 느꼈을 좌절감은 차마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찾아와…지금 이렇게 상처 입으면서도 바로 앞까지 다가와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금색으로 일렁이는 그녀의 눈동자 아래에선 투명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정신이 들어요?”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 상황은….”
희주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신에 접해서 힘을 발휘하는 상황에서도 희주의 마음이 변한 적은 없었다. 변한적이 없는데도…그녀가 원하건. 원치 않건 관계없이 그를 공격하고 말았다.
그것은 곧 그를 앞에 둔 이 상황에서만큼은 그녀의 몸을 통제할 권한이 고인규에게 있다는 뜻.
하늘에 닿은 듯한 고양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이 그녀와 함께했다. 이것을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는 한 그녀는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는 게 맞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허공에서 둘의 양상을 지켜보던 그가 차갑게 말했다.
“후. 역시 그와 직접 닿으면 이렇게 되나? 하지만…홍희주. 계속 싸워요.”
“읏…!”
정신적으론 저항하지만, 그녀의 몸을 만들 때부터 심어진 트리거는 단순히 정신력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희주는 가까이 붙은 천후의 양 가슴을 손으로 밀치려 들었다.
“으윽!”
밀친다는 용어를 썼지만, 실제론 두드리는 거나 마찬가지인 동작.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그것만으로도 가슴의 갈비뼈가 박살 났다. 하지만 천후는 그런 와중에서도 그녀와 완전히 밀착해서 끌어안았다.
“하지 마! 하지 말아요, 희주 씨! 이런 짓을 더 할 필요는 없어!”
“…….”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그것이 언어로 나오지 않았다.
본래 그녀는 과묵한 성격이었지만, 그래도 표현하고자 하는 건 전부 표현해오곤 했다. 그 수단이 완전히 막혀버리자 이것만큼 답답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행동으로는 그가 오해할만한 짓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당장 그가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고 있지 않았다면, 들고 있는 칼을 들어서 그를 쳤으리라.
그동안 그녀를 만든 자는 외친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시죠. 어차피 당신을 앞에 둔 이 상황에선 그녀가 제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은 없어요.”
그러나 그 외침을 들은 이는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말은 그녀가 자의로 이러고 있는 건 아니란 거군?”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고뇌를 벗어던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걸 본 고인규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어차피 그녀가 당신을 공격하는 건 변함이 없는데? 저 당신 없으면 죽고 못 사는 년이 이제 와서 어떻게 저의 제어를 벗어나서 당신에게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요? 그럴 거면 이미 며칠 전에 진작에 그랬겠다는 생각을 해야죠.”
저건 이미 홍희주의 의지력 어쩌구를 하는 영역을 넘어서 있었다. 그녀가 그런 최초 목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인 이상 이것은 벗어날 수 없는 천형이었다.
그가 아무리 귀에 대고 소리치더라도 안되는 것은 안된다. 애초에 희주가 스스로 극복할 수 있었으면 처음부터 그의 심장을 뚫지는 않았으리라.
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희주는 몸을 흔들면서 그에게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눈물은 계속 흘리면서도 말이다. 마음과 행동이 따로 논다.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차라리….’
차라리 그가 그녀를 구원하길 포기한다면 모든 것이 쉽게 해결되리라.
홍희주가 그를 해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힘이 모자라다. 그녀가 쓸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다 끌어냈지만, 결국 천후에게 이렇게 붙잡혀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의 의지 영역이 아주 미세하게나마 작용하고 있기는 해서 그를 완벽하게 죽일 수도 없는 상태.
이 상황에서 그가 포기만 한다면. 버리기만 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편해질 텐데.
그런 마음에 남자를 올려본다. 그러나.
“네 말이 맞겠지. 분명 희주씬 지금 혼자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야. 너에게도 그 확신이 있겠지. 그렇긴 하지만…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포기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어. 그러니. 이번만은 나에게 있다는 그 불확정성에 걸어보겠어.”
“무슨….”
고인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천후는 품 안에 있는 희주의 양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서슬에 덜컥하고 저항을 멈춘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다시금 얼굴을 덮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음…!”
*
그것은 바보 같은 시도였다. 이미 A라고 프로그래밍 된 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기계를 외부 변수로…그것도 정말 보잘것없는 변수로 간섭하려 든다는 것은 말이다.
아예 기계를 부숴버리거나, 핵심이 되는 부품 사이에 이물질을 쑤셔 박는 극단적인 방식을 써도 멈출까 말까인데.
이제 와서 입맞춤이나 한다고 뭐가 변한단 말인가? 그것은 변수가 될 수 없다. 그저 불쌍할 정도의 촌극일 뿐.
그 꼴을 내려다보던 고인규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오오. 공주여. 나의 이 키스를 받고 일어나시오. 동화 속 왕자님처럼 잠든 공주를 깨울 수 있다면. 모든 것이 그렇게 예쁘게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가 못하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깐 공격 명령조차 잊은 사이…저 여자는 잠깐 행동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의지력이 보이는 잠시간의 틈새에 불과하다.
“그쯤 하시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경쾌하기까지 한 소리가 산간에 울려 퍼졌다. 이것은 마무리를 하라는 명령. 지금까지 입으로 외치던 것보다 훨씬 결정적인 트리거였다.
그러니 천후는 이것으로 다시금 심장이 뚫리던, 지금 그 자리에서 불쌍하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밀쳐내진 다음 칼에 찔리건, 아니면 목이 따이건….
어떤 방식으로든 상처 입어야 옳았다.
애초에 그렇게 되어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음, 으음…!”
입을 맞춘 그녀는 처음엔 저항했다. 고인규가 예측했던 것처럼 그를 밀쳐내고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상황이 예상과는 다르게 돌아갔다.
<아-------------->
천후가 입을 맞추는 동안. 드래곤 브레스를 막느라 사라졌던 검은 삼 자매가 다시 나타나 아리아를 내질렀다.
아니. 이제 그녀들의 모습은 더는 검지조차 않았다. 백색 날개와 백색의 몸체를 한 그녀들은 그의 등 뒤에서 돋아나와 그녀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몸에서 자라나 인간의 인격을 가지게 되신 이여.>
<신과 함께하였으나 신과 분리된 또 다른 우리의 주인.>
<당신이 선택한 반려가 그녀라면 저희가 그녀를 보듬겠나이다.>
청명한 아리아와 함께 그녀들은 천천히 형상을 여성에서 빛무리로 바꿔가며 그녀의 온몸에 머물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들의 잔재는 희주의 몸을 몇십 번이나 오갔다.
“으…으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후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입맞춤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둘의 곁엔 백색의 빛무리가 감돌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에는 반항적이던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세가 점점 줄어든다 싶더니, 이윽고 손에 들고 있던 월하홍취를 놓아 버렸다.
스르르륵…. 바늘이 되어 그녀의 혈관을 파고 들어가 있던 금색의 술은 그때가 되어서야 다시금 원형으로 돌아오고, 검은 그렇게 땅으로 떨어졌다.
이대로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던 그녀의 안색 역시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보라색이었던 입술은 분홍으로 돌아오고, 얼음장 같은 얼굴에는 생기가 돌아왔다. 그리고….
스륵.
차가운 느낌이 볼에 닿는 느낌에 천후는 눈을 떴다.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손.
그녀는 어느새 손을 움직여 그의 양 얼굴을 감싸 안고 같이 입을 맞춰오고 있었다.
길게. 길게. 그 여운에 취해버릴 것처럼 긴 시간 입을 맞추던 그녀는 그러다 천천히 입을 떼었다.
“감사합니다….”
빙그레하고. 그녀는 드물게도 웃음 짓고 있었다. 타오르던 황금안도 가라앉은 그녀의 그런 모습은 넋을 잃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저쪽에서 끊임없이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공격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어떤 것도 이제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그의 품에 더욱 안겨든 희주가 조용히 말했다.
“저를 믿어주셨군요.”
“당연하죠!”
천후는 그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방금 이건 도박도 뭣도 아니었다. 수가 없으니 차라리 그녀를 안고서 죽고 싶다는 마음이었을 뿐이다.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힘은 미증유. 어떻게 해야 발동하는지도 자세히 모르는데 모든 것을 걸 수 있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그런데 거기서 기적이 일어날 줄이야.
천후가 확신하고 있었던 건 오로지 단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자의로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 그 판단 근거만은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왼손 약지.
얼마 전 그녀에게 넘겨준, 그녀가 지금껏 도저히 끼지 못하고 있었던 다이아 반지를 보고 나서였다.
“그걸 당신이 끼고 있다는 건, 그 이후로도 의식을 회복할 시간이 있었단 거니까. 완전히 마음을 잃었다면 그런 것. 버리진 않더라도 도저히 끼고 있진 않겠지.”
그것만이 천후가 쥐고 있을 수 있는 지푸라기였다. 완전히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근거.
희주는 자신의 반지. 그가 선물해준 반지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제가 이것을 끼고 있을 자격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그때가 제가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마지막 때라고 생각하니 감히 착용하고 싶어져서….”
사람을 사람으로 있게 하는 욕망이 그녀를 움직였다.
“정말로…정말로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그저 당신이 빛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동경했었어요.”
빛. 생명을 그녀에게 부여해준 존재였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그를 따랐고, 주인으로 삼았다.
“하지만…당신과 다시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지내면서…. 점점 더 당신에 대해 알아가면서부터. 인간인 당신을 더더욱 사랑하게 되었어요.”
다시 만난 그는 그녀가 처음 마주했던 그때의 비인간적인 모습과는 달랐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과 만난 영향임을 알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는 신에서 내려왔고, 그녀는 생명을 얻었다. 그렇게 둘 다 인간이 된 상황.
그렇기 때문일까?
시간이 지날수록…인간으로 화한 그를 점점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심어져 있는 트리거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면서, 그 불안감에 다른 대안을 마련해 놓았다.
나는 언젠가 그를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와 어울릴 수 없는, 날 때부터 그렇게 운명지어져 있는 존재다.
그 희미한 직감이 지금까지 그녀를 이렇게 행동하도록 규정했다.
결과는 찾아왔다. 결국 때는 찾아와 그녀는 그를 해했고,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는 다시 찾아온다.
이런 자신에게 질려버려도 좋으련만. 학이 떨어져서 버려도 좋으련만. 그는 다시금 찾아와 사랑한다 외치며 그녀를 품어주었다.
그 따스함에…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반지. 고마워요. 천후 씨. 이거, 감사히 받을게요. 저는…이전부터 이후 영원히. 영혼이 되어 저 세상에 가더라도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준비해두었음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러니…. 안녕. 내가 사랑했던 사람.”
‘이 뒤’의 세상에서. 자신은 그와 함께할 수 없을 테니까.
피가 튀었다.
천후의 피는 아니었다.
그녀의 웃음은 아름다웠다.
마지막 웃음이어서 이리라.
“하. 빌어먹을 신파극은 끝났습니까? 정말 기분 더럽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희주야아아아아아!!!!!”
그의 품에 안긴 그녀는 웃는 얼굴로. 숨이 끊겨있었다.
세상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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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화때 남긴 말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