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99화 (299/324)

299화

“형!”

“오랜만이네요. 지상에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그를 본 천후는 얼른 그에게 달려가서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인규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어우. 무거워요. 이야. 일 년 사이에 정말 출세했네요. 호텔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린 건가요?”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굉장한데요.”

그를 놓아준 천후는 쑥스러워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에게 자신의 성과를 보이는 것은, 말하자면 큰 형한테 성적표를 보여 주는 것과 같았다. 새삼스럽고 부끄럽달까? 그러면서도 칭찬을 받았으니 은근히 기분 좋음을 숨기기 어려운, 그런 묘한 감각이었다.

잠시 한담을 나누던 천후는 그러다 그의 뒤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다른 두 사람은?”

오늘 천후는 그뿐만 아니라 이미연과 최완 역시 초대했다. 미미르의 일부나 다름없는 프레이, 프레이야는 외부로 반출이 금지되어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그 둘이야 와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인규는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오지 못할 것 같아요. 요즘 메인 퀘스트 디제스터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의료팀은 완전히 풀타임으로 돌아가고 있고, 한국 지부장님은 따로 용무가 있다고, 미안하다고 대신 말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렇구나….”

이미연이야 요즘 같은 경우에 바쁜 게 당연했다. 유그드라실 의료시설은 일리미네이터 뿐 아니라 거액을 들여서 빠른 치료를 받고 싶어 하는 일반인도 사용하곤 했다. 강력한 디제스터의 발생 빈도가 높아지면서 이런 수요는 크게 늘어났으니, 과부하가 걸리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리라.

그리고 최완 같은 경우엔…. 애초부터 목적을 알리지 않고 따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 사람이었다. 아쉽지만 그런 이야기가 나온 이상 오늘 보기는 힘들 것이다.

“어쩔 수 없죠. 그럼 제가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나러 가는 수밖에.”

“그게 낫겠죠. 아…. 내가 너무 당신을 오래 잡고 있었군요.”

“음?”

인규가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고개를 갸웃한 천후는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뒤로 돌려보았다.

그곳에는…인세의 미를 한 몸에 담은 것과 같은 여성이 있었다.

검은 먹물이 폭포수가 되어 흐르는 것 같은 머리칼의 소유자였다. 어지간한 백인보다 훨씬 창백해서, 마치 마네킹이 아닐까 의심되는 흰 피부. 그러나 그런 감상을 거부하듯. 폭포수와 같은 색의 긴 속눈썹이 시간이 지날 때마다 위아래로 오르내린다.

그때마다 그 아래에 머문 검은 보석이 사라졌다 드러나면서, 자신이 결코 인형 아닌 인간임을 주장했다.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오똑한 코 아래에는 분홍빛을 머금은 두 열매가 서로 맞닿은 채 자신을 가져가 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동안이라, 도저히 20세를 넘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외모.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차갑고, 가라앉은 인상은 그 위화감을 지우고, 오히려 더욱 쉬이 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검은 실크 드레스는 그런 분위기를 더욱 끌어올렸다. 마치 젊은 미망인처럼…온몸을 검정으로 치장한 그녀는 그 특유의 분위기와 어울려 도저히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의 어린 나이로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회장에 그녀가 나타나자, 모두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머물렀다. 딱히 그녀가 의도하지도 않았건만,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럴만했다. DS의 여자가 아닌가?

“저 사람이….”

“확실히 아름답군.”

천후의 권유가 있었음에도 그녀는 공식 석상에서조차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나마 해외를 돌아다닐 때 종종 함께하는 정도?

밖으로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이런 자리를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익숙지 않아 저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그 덕분에 이 자리에 와서야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았고 본 사람마다 감탄했다.

한편, 평소와는 또 다른 그녀를 보고서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천후는 인규가 왜 자신을 놓아주었는지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그녀와 보내야 할 시간인 것이다.

미소 짓는 인규와 시선을 마주친 희주는 언제나처럼 가볍게 묵례만 하고서는 천후의 옆에 섰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천후가 입을 열었다.

“아~. 오늘 이 자리에 모여주신 많은 귀빈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기뻐요. 1년 사이에 이 많은 분들이 제가 지상에 내려온 것을 축복해주신다는 사실이.”

그렇게 말을 꺼낸 천후는 잠시 텀을 두고 말을 골랐다. 오늘은 대본 같은 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런 게 불필요한 자리였으니까. 하지만 바로 그래서 오히려 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막막했다.

그러다 천후는 뇌리 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말하기로 했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유그드라실에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없었어요. 10년 전. 대참사가 일어난 이후부터…. 머리가 큰 뒤부터 저는 디제스터 생각만 하고 살았죠. 그것들만 전부 죽여 없앨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하고서…. 다른 사람과 접하고 싶다거나. 지상에 내려오고 싶다거나 하는 모든 욕망들이 그리 절실하진 않았어요.”

그것은 말 그대로 사실이었다. 처음 면접에서 실패를 맛보았을 때, 그는 쉽사리 유그드라실에 돌아갈 생각이 들었다.

지상에서 살고 싶단 생각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욕망이었다. 평생을 유그드라실에서 살았으니 다른 곳에 가보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 해외에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그런 감상에 지나지 않았다. 절실함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가벼운 마음.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저는 모든 걸 늦되게 배웠죠.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하다 여겨지는 모든 것은 이 아래에 내려와 배웠어요. 제 옆의 이 사람이나…여러분들 모두에게. 그제 그 어떤 것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절대 그럴 수 없어요. 그리고…이 세상의 안녕 그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제 모든 힘이 다할 때까지 디제스터 뿐 아니라, 이번에 발생하고 있는 사태에도 역시 최선을 다해서 응할 것입니다. 제가 살아갈 세상은 제가 지켜야 할 테니까요. 그러니. 저와 뜻을 함께하시는 여러분.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짝. 어디에서부턴가 박수 소리가 시작되더니, 홀 전체에 가득 찼다. 천후는 그 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붉히고 사방에 인사하고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때부터 파티는 좀 더 왁자지껄 떠드는 분위기가 되었다. 정말 오늘만 살고 마는 것처럼 달리는 사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

엔체스터 호텔 최상층.

이미 그가 오는 순간 그가 머물 거라고 상정하고서 비워놓은 그 프레지덴셜 스위트 룸의 테라스에 둘은 서 있었다.

5월의 막바지. 이제 바람은 더 이상 차지 않다. 희주는 나부끼는 검은 머리를 천천히 다듬었다. 천후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아름답다.’

몇 번이나 입술을 탐하고, 몸을 섞었는데도 그녀를 보면 언제나 가슴이 뛴다.

외모나 외양만 보자면…이상형에 가까운 것은 이강호였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네 여자 중에 그의 심장을 차지한 것은 여전히 희주였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뒤집을 수 없는 천고의 사실이었다.

그녀를 사랑한다.

사랑하고 있다.

그는 몇 번이고 그 표현을 입으로, 몸으로 해왔다. 그러다 얼마 전, 그녀에게 이윽고 반지를 건넸다. 그녀는 아직 그 답을 주지 않았다.

오늘 그것을 듣기로 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때였다.

둘 사이에 말이 없어진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천후에겐 그 일 초 일 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잔잔히 불어오던 바람이 멎었을 때. 등을 보이고 있던 희주는 어느샌가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주인님.”

그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감미롭다. 단지 입을 여닫는 것만으로도 매료되고 만다. 천후는 넋을 잃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단 한 번 그를 불렀던 그녀는 언제나처럼 표정없이 한참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눈꺼풀에 약간 가려졌다. 그것은 그녀가 정녕 쉬이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수심에 어린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움에 떠는 것 같기도 한 모습.

그녀가 평소 필사적으로 두르고 있는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옅어지며, 약해진 그녀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덜컥하고. 심장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주인님, 저는……. 많이 고민했습니다.”

“희주 씨.”

“감히 저 같은 것이…주인님의 사랑을 이렇게나 받아도 되는지…. 이런 것을…제가 취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순간 천후는 그녀가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저는…주인님께서 다른 분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단 한 번도 그녀의 입에서 올라온 적이 없는 이야기.

“저 같은 것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좀 더 나은, 좀 더 사랑스러운 여성분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그렇게 행복한 가정을 이루셨으면 했습니다. 그때 주인님 부부에게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면, 저는 그 도련님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지고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희주 씨….”

철저하게 낮은 태도. 철저하게 자신과 천후를 완전히 별격인 존재로 두고서 생각하는 태도. 이미 일리미네이터와 서포터의 관계는 예전에 무너지고, 둘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사실상 부부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임에도….

그녀의 의식은 전혀 달랐다.

“저는…천한 것입니다. 도저히 주인님의……감히 입에 올릴 수도 없습니다만, 아…내가 될 자격은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저에게 주시는 것은 너무나 기뻐서 저는 몰래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똑.

똑.

그 말과 함께, 백옥과도 같은 얼굴을 타고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서 천후는 완전히 머릿속이 날아갔다.

와락! 천후는 지금까지 그녀의 말을. 선택을 기다리느라 의례적으로 유지해왔던 거리를 좁혀 나아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외쳤다.

“왜 그래요? 왜 그러는 거예요? 그렇게 기쁘다면 받아들이면 되잖아? 난…난 당신이면 돼. 당신이 만들어낸 이 상황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관계가 유지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 중심에 당신이 있으면 해. 이제 그 자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면 상상도 할 수 없어!”

“아…….”

그 온기에 여자는 파르르 몸을 떨다가, 천천히 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마음이…흔들립니다. 주인님의 말씀이…맞아요. 저 역시…바라지 않을 리가 없는데.”

“…….”

“이렇게나 기쁜데. 이것을 받았을 때. 그 자리에서 열어보고 싶었습니다. 제 것이라고 선언하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을까요?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었답니다.”

“그래도 돼요. 그건 당신만을 위한 거니까…….”

“주인님…….”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천후는 그녀의 뒷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받아줘…. 나와…평생 함께해줘. 희주야.”

“…….”

희미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한 번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품 안에 물기가 번졌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그래도…될까요?”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그 답을 곧바로 입에 담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날아온 말이 있었다.

“그 애한테서 떨어져, 천후야!!!!!”

그것은 비명. 그리고….

푸콱…!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천후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그의 눈앞엔. 울음을 그치지 않는 여자의 얼굴과 함께.

그 눈동자는…. 핏빛으로 물든 시야 속에서도 선명하게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희…주…씨?”

“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왜.

왜 이런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말했죠, 영천후. 저는 언제까지고 당신의 편인 건 아니라고. 지상에 내려온 지 1년. 그동안 꾼 꿈은 즐거웠습니까?”

낯익은 목소리가…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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