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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96화 (296/324)

296화

작은 소녀였다.

그러나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분명 어린아이처럼 보이면서도, 그녀를 바라본 순간 천후는 그녀를 도저히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휘오오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친다. 제 자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까무러칠 수 있는 높이의 첨탑은 바람의 영향으로 시시각각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녀는 미동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 뾰족한 끄트머리에 신발도 없이 맨발로 내려선 채, 첨탑 그 자체의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따라서 움직이는 것 외엔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입고 있는 흰색 원피스는 밤하늘 한가운데에서 유일하게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바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느릿느릿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미미르의 보고처럼 작은 동물들이 보였다. 몇몇은 소녀의 어깨나 머리 위에 올라가 있었고, 몇몇은 작은 날개를 파닥이면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만 보자면 영락없는 애완동물이지만…그 형태가 하나같이 지구에 실존하는 생명체로 보이지 않았다. 특히 그것 중에는 과거 영천후가 쓰러뜨렸던 드래곤을 닮은 생명체 역시 있었다.

“뀨륵.”

놈들은 천후가 그녀에게 다가오자, 마치 경계하는 것처럼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순간, 천후는 그것들에게서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압박감을 느꼈다.

‘이것들의 진짜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디제스터에 대한 영천후의 어떤 초자연적인 감이었다. 지금 이 모습은 어디까지나 그저 저 소녀와 함께하기 위해서 형상을 잠시 줄여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녀가 위협받는다면, 이것들은 거리낌 없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리라.

놈들의 시선 하나하나에 식은땀이 흐른다. 놈들의 눈에선 하나같이 희미한 안광이 흐르고 있었는데, 천후에겐 소녀 뒤편 저 하늘 저편에 유그드라실보다도 커다란 눈동자 열넷이 자리 잡고서 노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괴물을 앞에 두었을 때도 그에게 두려움이란 전의와 함께하는 감정이었다. 그런데 지금은…두려움만이 있었다. 먼 과거. 신화 시절의 괴물들이 여기에 크기만 줄인 채로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자리는 다른 것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의 접근을 느낀 것일까?

긴 흑발의 소녀가…… 어느새 몸을 돌리고 있었다.

천후는 그 동작조차 보지 못했다. 그것에 한 번 놀란다. 그리고.

화아악.

다시 한 번. 지금까지 불어오던 것보다 더욱 세찬 바람이 한 번 둘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천후는 보았다.

밤하늘 그 자체 같은 검은 머리칼 사이에 드러난…총천연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그녀의 눈동자는 시시각각 그 색을 바꾸며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보석안의 소녀가 말했다.

“벌써 열세 시련의 끝, 앙골모아의 때를 지났는데도. 왜 인간은 아직도 멸망하지 않아?”

머릿속이 탈색되었다.

*

“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소녀가 입에서 낸 그 말은 도저히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랬어야만 했다. 그런데…….

치직. 치지직.

부분 신위의 통제가 완벽해지면서 잠잠해졌던 노이즈가…다시 한 번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이미 노이즈가 아니었다.

‘그녀와 만났나.’

그것은 이미 목소리였다. 천후는 자신의 자의식이 천천히 녹아들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방금 머릿속에서 말한 ‘소년’과 ‘자신’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고양감과는 다른 혼탁하고, 어지러운 감각이 그를 괴롭혔다.

“으윽…….”

낮은 비명을 흘린 천후는 머리를 감싸 쥐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 때문이다. 그녀를 만난 것 자체가 원인이 되어서 이 어지러움이 찾아들고 있었다.

소녀는 여전히 자연계에선 찾아볼 수 없는 총천연의 눈동자로 천후를 빠안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마치 그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면으로 마주 본 소녀의 인상은 옆에서 볼 때와는 또 달랐다. 감정 없이 그를 바라보는 모습은 어린아이처럼도 보이고, 어른처럼도 보인다.

아니. 애초에 어린아이가 맞긴 한 걸까? 그런 생각으로 바라보자, 그녀의 키까지도 크게 보이다가, 작게 보이곤 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맞춰서 그 형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어느 쪽도 그녀의 ‘본질’을 해치진 않는다.

해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아…. 하아….”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거칠어지고,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천후는 이런 느낌을 다른 이에게 느낀 적이 있었다.

이전, 자신을 13 선조…. 신급 디제스터라 밝힌 예란이라는 여자에게서 느낀 것과 비슷한 감각. 하지만 소녀에게 느끼는 압박감은 그 이상이었다.

예란에게 느꼈던 것은 일종의 공포감의 변형이라 한다면…소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천후 자신도 다 짚어내지 못할 정도로 여럿이었다.

그녀를 제대로 마주 본 순간부터, 천후는 반문 한 마디를 간신히 던지고는 그대로 석상처럼 굳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소녀는 눈을 깜빡이다.

명했다.

“이리 온.”

“…….”

손윗사람을 대한다기보단, 마치 애완동물, 그것도 어린 새끼를 대하는 것 같은 태도로 손을 까닥이는 동작. 보통 다른 사람이 저런 태도를 보인다면, 그건 크게 실례가 될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옮겨, 그녀의 앞에 섰다.

그녀가 좀 더 쉽게 볼 수 있도록 머리가 있는 위치까지 맞춰서,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것이다.

“뀨륵.”

“끼익. 끼익.”

그녀의 주변을 돌던 일곱 짐승은 제각기 소리를 지르며 천후의 주변을 돌았다. 그러나 이제 천후는 그것들에게서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의 앞이다. 이미 다른 것에서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코웃음 칠 일밖에 되지 않는다. 어차피 이것들은 그녀가 자아낸 하찮은 미물이 아니던가?

이 별에 있는 그 무엇이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그의 눈에는 어느새 초점이 사라져있었다. 소녀는 그런 천후의 볼에 천천히 손을 가져가, 그 눈 아래를 검지로 쓰다듬었다.

스윽……. 분명 손가락이 닿았는데도, 그 느낌은 마치 구름이나 솜사탕이 닿은 것처럼 부드러웠다. 보통 사람과는 조금 다른 온기가 전해져오는 그 손길에 천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금은 그저, 이 손길을 영원히 느끼고 싶었다.

“그렇구나…. 불쌍한 아이. 몸에 갇혀서…점점 같아지고 있어.”

“네….”

과연 그녀는 ‘나’의 상태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다음에 할 말 역시 짐작하고 있었다.

“이러면 어쩔 수 없어. 난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어.”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상냥함과…잔인함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존재라는 것도. 그러니. 그렇게 슬픈 얼굴은 하지 말아주세요.

어느덧. 주변에 휘몰아치던 바람은 잔잔히 가라앉았다. 천후의 주변을 돌고 있던 디제스터들은 그녀뿐 아니라 그의 머리와 어깨에도 올라 있었다.

실제론 세계라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괴물들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거의 질량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다시 천천히 눈을 뜬 천후는 어지러움에 얼굴을 찡그리다가, 그녀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나는…네가 누군지 모르겠어.”

“…….”

“분명. 알아야 할 텐데도.”

이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자신은 분명 그녀를 알고 있을 터였다.

그의 마음이. 감각이 그 생각에 긍정한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다만 미루어 짐작할 수만 있을 뿐…….

그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닫혀있던 그녀의 분홍빛 입술이 마치 기적처럼 열렸다.

“그가 만들어낸 가련한 아이야. 너는 나를 알 것이다. 나는 둥근 대지이자, 바다이자, 별이자, 네가 들이마시는 공기이다.”

선문답일까? 하지만 천후는 이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리라.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이 본능적인 두려움과…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절감하고 마는 이 친근감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럼…너의 ‘이름’은 뭐니?”

소녀의 눈이 깜빡였다. 마치 우주 자체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은 다변하는 눈동자는 그렇게 몇 번이나 색을 바꾸면서 깜빡이다.

“나의 이름은 여럿이나, 사람이 나에게 붙인 이름 중 가장 많이 불린 것은 가이아다.”

태연히. 별의 신을 자칭했다.

*

그 이름을 듣고도 천후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녀를 본 순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굳이 천후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라면 그녀를 마주한 그 순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애초에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녀를 인간의 형상으로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영천후가 인간이기 때문이지, 다른 동물들이 보았다면 아마 자신들과 같은 종처럼 보였을 것이다.

천후는 물었다.

“왜… 우리 앞에 나타난 거지?”

한눈에 보아도 그녀는 초월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평소엔 사람이 볼 수 있는 존재도 아닐 터였다. 말하자면 지금 그녀의 이 모습은 어디까지나 사람에게 모습들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화신, 아바타인 것이다.

굳이 이런 형상을 취해서 모습을 보였다면, 무언가 용건이 있었으리라. 그녀가 일으킬 수 있는 자연현상이 아닌, 직접적인 대화라는 형식을 통하기 위해.

그녀가 말했다.

“인간에게 예정되어있던 열세 시련은 끝났다. 이제 너희의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생명이 자라날 때이다. 그러나 나는 천 년 전, 그 남자와 약조를 했다. 인간이 모든 시련을 마치고도 모두 이겨내고도 최후의 때를 맞이한다면, 그때는 인간에게 알리기로.”

섬뜩한 이야기였다. 이것은 곧 별 그 자체가 인간의 때가 끝났음을 고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천후는 그 와중 신경 쓰이는 부분을 짚었다.

“그 남자?”

“그것은 못된 자다. 공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인간이 시련을 이겨내게 했다. 새 시대에 돌아가야 할 힘을 미리 풀었다. 그것에 나는 매우 노하였지만, 맹약은 지킬 것이다. 이것이 너희 인간에게 주어질 마지막 시련이며, 이겨내지 못할 시련이 될 것이다.”

“그게…대체….”

그녀가 하는 말의 태반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멸망의 때가 왔음을 고하는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한 부분이 많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때….

천천히. 소녀가 다른 한 손까지 뻗어 그의 머리를 천천히 감싸 안았다.

“아…….”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가득하던 불안감이 날아갔다. 마치 세상 전부에게 안긴 듯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그러나 나는 어느 쪽도 정할 수 없구나. 그자가 만든 아이야. 너의 존재가 시련을 이길 열쇠가 되니, 이것 역시 그 남자가 만들어 둔 안배겠지. 랑크 메이거스. 그자는 정말로 인간을 사랑하는구나.”

“…….”

“뜻은 전했다. 부질없으나,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거라. 지켜보고 있겠다.”

스륵.

그 순간. 사방에 휘몰아치던 바람은 순식간에 멎었다. 꿈결 같던 온기 식어간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와 함께 있던 일곱 짐승들 역시.

천후는 그녀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의 품은 너무나도 따스했지만, 그녀가 남기고 간 말은 너무나 두려운 것이었기에….

다만. 천후는 단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유그드라실. 대체 뭘 숨기고 있었던 거야, 당신들….”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

늦은 밤. 천후는 다시 자택으로 돌아왔다. 그는 애써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희주가 말했다.

“얼마 후면 주인님이 지상에 내려오신 지 일주년이니, 그때까지…결정하겠습니다.”

그녀는 아직 반지함에서 반지를 꺼내지 않았다. 아니…못했다가 더 옳은 표현이리라.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그녀 자신만이 그 원인을 아는 불안감이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진심이 통했는지, 그녀는 근시일 내에 뜻을 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얼굴엔 희미한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처럼….

천후는 흔쾌히 그러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밤…….

희주는 거실에 있는 집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세상이 세상이다 보니, 이 전화기는 거의 쓰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거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요? 그 녀석이 그렇게까지…. 당신은 그에게 대단히 사랑받고 있군요.”

“…….”

“아주 좋은 일이에요. 당신이 바라는 대로 아닙니까? 하지만 모쪼록 당신의 존재 이유만은 잊어버리지 마세요. 그렇게만 한다면 뭘 해도 괜찮으니까. 이전부터 말했지만, 전 당신의 사랑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달칵하고. 대답조차 기다리지 않고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얼마 후, 수화기에서는 뚜뚜 하는 통화종료 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반지함을 소중히 품에 끌어안은 홍희주는 작게 읊조렸다.

“네. 마이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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