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천후 역시 언젠가 이 이야기는 한 번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천후와 다른 여자들의 관계는 대한민국의 일반 상식으론 성립할 수 없었다. 오로지 상식 같은 건 범인이나 얽힌다는 것처럼 뛰어넘은 홍희주의 용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관계였다.
만약 희주가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자신에게 속박해두려고 했다면, 천후는 아마 그때도 그녀의 뜻에 따라주었을 것이다.
단순히 그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쉽게 응해주는 성격이라서가 아니었다. 천후에게 있어서 희주는 그만큼 소중했다.
세상에 막 나와 정말 앞뒤도 모를 때 자신을 위해서 헌신해주었고, 지금도 그래 주고 있다.
의사결정으로 곤란해 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과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는 늘 도움을 주었다.
집안에 사람을 들이고, 아이들을 들여도 그녀는 군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걸로 박하게 굴지 말라며 그를 약하게 책한 적이 있을지언정.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이 그리 많을까? 그렇지 않으리라.
미숙한 그를 받아주고, 그러면서도 세상 누구보다 그를 사랑해주는 그녀를 천후 역시 사랑했다.
평생 함께하고 싶다. 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아주 진즉부터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지금 이 희주의 용인으로 성립되는 관계가 그녀와 혼인한 이후에도 유지가 될까? 솔직히 생각해보자면…. 그녀는 그때도 별소리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장려할지도 모른다.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그녀는 오는 여자를 막는 것을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과연 강호선 배가 그때도 남아줄까? 그의 마음은 희주에게 귀속되지 않을까?
지금 이 자리는 그것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희주 씨하고도 조금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해. 이 건에 관해선 사실… 내 쪽에서 망설여왔던 게 사실이야.”
천후 자신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짐작하지 못하는 미숙한 모습을 보인다면.
희주는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 있는 것 같은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녀의 마음이 손에 잡힐 것처럼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다. 일단 그녀가 과연…청혼을 받아줄지도 의문이다.
“너도 마음고생이 많구나.”
“이 건으로 그런 소릴 들으면 난 너무 부끄러운데….”
말마따나 천후의 얼굴은 귀까지 시뻘게져 있었다. 그 역시 양심도 있고, 상식이란 게 있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전제조건 위에서 성립되고 있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여간 돌아와서. 희주와는…. 결혼할 생각이야. 미안하지만, 모든 관계에서 이게 가장 일 순위야.”
그것은 말 그대로 희주는 강호나 셀레나와는 달리 조금 더 격을 달리한 위치에 있다는 발언이었다. 천후는 그 미안함에 가슴이 아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구나.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응?”
강호는 오히려 한숨 놓았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네가 이 문제에서 희주가 아니라 나나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마음에 걸렸을 거다.”
“…….”
“나라고 했다면 아마 나는 도망갔을지도 모르겠다.”
빚을 지고 있는 심정이었다. 그녀 혼자 온전히 받아야 할 애정을 나눠 받고 있단 생각을 강호는 늘 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한눈에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 아마도. 자기 자신보다도 훨씬.
그런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붙는 걸 봐줄 수 있을까?
강호는 자신이 희주의 입장이었다면… 결코 그럴 수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혼자 몸으로 받아내기 버겁던. 아니던. 절대 용납하지 않았으리라.
강호는 이 마음에 대해서 상당히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이게 과연 그녀가 이기적이어서일까? 상당히 길게 생각해보았지만,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아니다. 그녀의 생각이 일반적이고. 희주의 행동이 범인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다.
그렇다면 희주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 걸까?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천후야. 어쩌면 말이다.”
“응?”
“희주에겐…. 무언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요즘 들어 부쩍.”
“…….”
천후는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녀가 지금 하는 말은… 천후도 이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었으니까.
“굳이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다른 사람이 붙는 걸 용인한단 건…. 희주가 그냥 마음이 넓어서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해. 그러니 너는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알아갈 노력을 해줬으면 한다.”
“선배.”
“그 아이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말이다.”
웃음 짓는 얼굴이 아름답다. 지금 이 말을 꺼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천후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한참 웃고 있던 그녀는 그러다 부끄러워졌는지 얼굴을 붉히곤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흠. 으음. 덥구나! 하여간 그렇다는 거다! 나에 대한 부분은 그 뒤에 생각해도 되는 문제라는 거다. 언젠가 한 번은 이야기해야지 싶었다. 그래도 우리 중엔 내가 가장 연장자니까. 나도 가끔은 언니 노릇을 해야지.”
강호는 그렇게 말하면 툭툭하고 자기 가슴을 가볍게 두드려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천후는 마주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정말로.”
“아, 아니 뭘…. 아.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완전히 포기하겠다거나 그런 소리는 전혀 아니다. 그저 음. 애, 애인으로도 좋다는 거다. 그 뒤로도 나는.”
“으, 응.”
침을 꿀꺽 삼킨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카운터 쪽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카페 주인은 손님이 얼마 없어서인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스마트 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어서 그녀의 발언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강호 역시 그제야 다른 사람이 있었단 걸 깨닫고 부끄러워하다가, 다른 데 집중하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내친김에 계속 말을 했다.
“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건 아니다. 결혼은 못하더라도. 나도 너에게 받고 싶은 게 있는데….”
“응? 어떤 거?”
반사적으로 묻자, 그녀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한참을 그러던 그녀는 어느 순간 고개를 푹 숙이며, 꼼지락대던 손을 자기 배 쪽으로 가져가더니 가만히 아래에서 위쪽으로 쓸어올리다가… 정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이….”
“…….”
“네 아이는 가지고 싶다….”
천후는 잠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미치겠다….’
큰일 났다. 지금 당장 여기서 뛰쳐나가서 차 타고 호텔로 가고 싶어. 그대로 바라는 대로 해주고 싶다. 단번에 세쌍둥이쯤 만들 각오로 달리고 싶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거칠게 질주하는 걸 간신히 참은 천후는 후우우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일단…. 너무 앞서가지 말고. 나도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
“응?”
“음…. 아. 이건 좀 너무 부끄러운데.”
머리를 벅벅 긁은 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서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소리를 들은 강호의 표정은 잠시 굳는가 했더니, 어느 순간 정말이지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 그럴 수 있는 거냐?”
“조금 손을 써야겠지만…. 못할 건 없을 거야. 절차적으론. 대신. 희주 씨가 허락해줘야겠지만.”
“으음!”
마지막 말에 강호는 잠깐 움찔했지만, 그러면서도 기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양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래. 그렇군. 그런 방법이…. 나는 좋다. 희주가 허락해줬으면 좋으련만.”
“그건 정말 확신할 수 없어. 일단 그 건보다 우선할 걸 해결해야지.”
“응.”
화사하게 웃은 그녀는 잠시 카운터 쪽 눈치를 보다가 그와 입을 겹쳤다. 천후는 잠깐 놀라서 눈을 크게 떴지만, 곧 그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입안에서 혀를 섞었다.
‘쯔쯔. 요즘 젊은 것들은.’
그 광경을 카페 주인이 슬그머니 훔쳐보고 있었단 걸 두 사람은 몰랐다.
*
어린이날 연휴를 그렇게 마친 이후.
천후의 저택 2층에서는 모종의 회의가 있었다.
“어버이날에 뭐해주면 좋아할까?”
“뽀뽀입니다. 뽀뽀. 기냥 살살 녹을 겁니다.”
“에이. 무슨 뽀뽀야. 유치원생도 아니고.”
“엑. 아니 진짜로 좋아할 건데.”
천후의 자택에 사는 아이들끼리 여는 회의였다. 한 침대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에바와 이브, 라즈베리는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무슨 회의를 하든 상관없으니, 너희들 방에 가서 해줬으면 한다만.”
그 회의실로 삼은 방이 이그네스의 방이라는 건 그들에게 있어선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불평을 대답조차 하지 않고 흘려버린 그들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차피 싸부는 완전 부자입니다. 물질적인 건 뭘 해줘도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에헤이. 이 사람. 정성! 정성이 중요한 거야, 이런 건!”
“아니. 정성이라고 해봐야 하품이 상품 됩니까?”
“그런 네거티브한 마인드가 문제야! 노력하면 상품이 돼!”
“…맞슴다. 제 노력이 부족했슴다! 선물을 잘 꾸며보려는 제 노력이 부족했던 게 나빴지 말임다!”
설득을 포기한 라즈베리는 그렇게 빠르게 두 손을 들었다.
셋은 올해 어버이날에 무슨 선물을 할지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번 어린이날에 받아먹은 게 있으니 보답을 하겠다는 것이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뭘 줄까에서 의견이 갈렸다. 쌍둥이는 물질파, 라즈베리는 행동파였다.
사실 천후라면 초콜릿을 만들다가 실패해서 타버린 재를 가져다줘도 감동하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좋은 걸 주자는 생각을 하는 게 제법 갸륵하다.
“먹을 게 무난하긴 한데….”
“선생님이 차리는 밥 맨날 먹는 오빠는 입이 고급이라 쫌.”
“그러니까 그렇게 따지다 보면 줄 게 아무것도 없어집니다. 뽀뽀나 하는 게 날로 먹지 말입니다.”
“어휴. 쫌.”
둘은 마치 하등한 짐승을 보는 눈으로 라즈베리를 쏘아보았다. 그 모습에 라즈베리는 복장이 터졌다. 분명 양복에 뽀뽀를 받으면 싸부는 기쁨의 헤드 스핀이라도 돌 텐데 왜 저런 고생을 사서 하려는지 원.
그렇게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던 이그네스는 한숨을 푹 쉬면서 책을 덮었다.
“어차피 뭘 주던 좋아할 텐데 그냥 대충 하지 그러냐?”
“우와! 너무해!”
“이그네스도 같이 유원지 갔었으면서!”
“그건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게….”
“놀이기구 20개 넘게 탔으면서!”
“으, 으흠.”
날카로운 지적에 이그네스는 점잖게 헛기침을 했다. 듣고 있던 라즈베리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하여간 어른스러운 척하면서 애 같은 행동은 다 한다, 조것이.
“그러지 말구우. 이그네스도 얼른 생각해봐!”
“맨날 책 보니까 머리 좋잖아!”
“성적은 너희가 더 좋다만….”
그녀가 보는 책은 성적에는 하등 도움 안 되는 수필이나 소설류가 대부분.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그녀는 막상 정규과목에선 성적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다.
언어는 자연스럽게 익혔고, 스스로 공부한 것 이상의 지식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따지고 보면 자기 지식이 아닌지라 상시 적용이 안 되는 것이다.
“성적이 무슨 상관이야! 하여간에 생각하라구!”
“이제 막무가내구나, 이 녀석들.”
어느새 다리 하나씩을 잡고서 생떼를 부려대자 이그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 되면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기세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의 입가에 아주 잠깐 악동의 미소가 스쳤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좋다. 어차피 너희가 하려는 건 어린이날 보답 아니냐?”
“그치.”
“천후나 어른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뭘까? 생각해보면 어차피 물건은 그냥 사서 쓰면 되는 것. 라즈베리 말대로 가치가 떨어지지.”
“응.”
“그렇다고 뽀뽀나 해줘 봐라. 영영 우리를 유치원생 취급할 게 뻔하지.”
“역시 이그네스 선생님이야. 말이 통하네.”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이그네스 뿐이구나.”
“아. 쪼끔 화납니다.”
둘이 이그네스에게 붙어서 혀를 내미는 걸 본 라즈베리의 표정이 살짝 험악해졌다.
“자아. 자아. 진정해라. 그렇지만 우리가 가진 것 중에도 천후가 가진 것과 완전히 같은 가치를 가진 것이 존재하지.”
“어? 그런 게 있어?”
“있고말고. 그것은 바로…. 시간!”
뜸을 들이다 강세를 넣어 말한 이그네스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요즘 천후는 한창 바빠서 집에도 제대로 못 들어왔었지 않느냐? 그러니…. 어버이날 하루는 어른들끼리만 지낼 수 있게 집을 비워줘 보는 게 어떠냐? 엄청 감사해 할 거다.”
아이들의 눈이 찬란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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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한달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달에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