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아악! 씨발! 죽을란다! 난 아비 자격이 없어!”
“아, 아저씨. 좀. 술 취했으면 진정하세요!”
“놔, 이 새끼야! 놔!”
“아 진짜 진상이네, 이 양반.”
다음 날 저녁. 거의 초주검이 된 상태로 출근한 레이나드를 보고서 놀란 태원은 퇴근 후에 술을 마시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었다.
“왜 거기서 자고 간단 말을 못 해, 이 븅신아아아아! 으아아아!”
“아이고….”
자책이 도를 넘어서 거의 마음의 병으로 발전해 있었다. 그에게 카드키가 들어있는 코트를 넘겼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다시 찾아와달라는 게 아니겠는가?
“따님 마음 씀씀이가 예쁘네. 됐잖아요. 이제부터 자주 찾아가면 되잖아. 좀 정신 차리세요.”
“나 같은 새끼가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걔를 찾아가냐….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 좀. 그럼 언제까지 혼자 살게 놔둘 건데요? 그러다가 몹쓸 놈이라도 꼬이면 어쩌려고?”
“뭐 임마?!”
“생각해봐요. 지금 고등학생이라면서요.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해도 졌는데 혼자 산다고 생각을 해보라고요.”
“벌써 몇 년이나 그래왔단 거 아니야…. 난 쓰레기야…. 죽을란다….”
“아. 술 취한 인간하곤 대화가 안 되네.”
태원은 완전히 인사불성이 된 레이나드를 질질 끌고 그의 아파트로 데려갔다. DS 공격대장이 된 이후로는 개인적으로 더 친해져서, 그의 집에도 여러 번 들락날락거렸기에 문 열고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먹은 걸 다 게워내는 레이나드를 챙겨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양반 이러다 완전히 가겠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레이나드의 자격지심만 어떻게든 하면 둘이 다시 함께 지내는 건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레이나드 본인에겐 대단히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았다. 그나마 딸 쪽이 생각보다 마음이 고와서 다행이지.
“흐어어…. 어쩌냐, 태원아. 응?”
“아니. 뭘 어째요, 이 양반아. 일단 술부터 깨야죠.”
“으…. 걔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녀를 볼 면목이 없어….”
꺼으꺼으 거리는 모습에 태원은 혀를 찼다. 강제로 그를 눕힌 태원은 단호하게 말해다.
“앞으로라도 자주 만나는 수밖에 없잖아요. 어차피 하루아침에 뭐가 될 문제도 아니니까.”
“그렇지…?”
“네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좀 지금은 주무십쇼. 진상 좀 그만 부리고.”
그 말에 레이나드는 간신히 눈을 감고 잠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원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 예쁜 아가씨도 아니고 40 먹은 아저씨나 챙겨 줘야 하는 인생, 진짜….”
어쩌다가 이렇게 꼬였는지 모르겠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그렇게 술을 퍼마시면서 다짐한 것과는 다르게…. 레이나드는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태원은 답답해 돌아가실 지경이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집안 문제라 뭐라고 할 수 있는 건덕지도 없었다. 그저 그 이후로 술자리에는 안 불러내고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문제는 그 여파로 레이나드는 조금씩 초췌해져 갔다는 것이다. 날마다 잠을 잘 못 자는지 눈 아래로 다크서클이 짙게 깔렸는데, 나이도 있는 양반이다 보니 그게 길어지자 티가 확 났다.
그나마 그에게 다행인 점이 있다고 한다면 드디어 포기한 건지, 최성아가 그에게 달라붙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안 그래도 마음이 심란한 상태에서 그녀까지 계속 대쉬를 해왔다면 그는 더욱 힘들어 했을 것이다.
복도에서나 일하면서 레이나드를 만날 때마다 치근덕거렸던 최성아는 얼마 전부터 그를 만나도 묵례만 하고선 지나치곤 했다.
그녀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레이나드를 노려왔는지 알고 있던 하연은 그 광경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드디어 그만둔 거예요? 다른 사람을 물색했나요?”
하연의 질문에 최성아는 빤히 그녀를 올려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시선을 돌렸다. 굳이 말해줄 필요조차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뭐, 뭐예요? 궁금해서 묻잖아요.”
“하연아. 세상에는 말야. 길이 하나뿐이 아니야. 좀 더 여러 갈래가 있단다.”
“무슨 소리람?”
남자를 갈아탔단 건지. 아니면 다른 소린지 구분할 수가 없었지만, 성아는 더 대답하지 않고선 바로 퇴근했다. 기분 탓인지 꽤 바쁜 발걸음이었다.
“뭐야, 요즘 진짜.”
보통 최성아는 일이 끝나도 레이나드를 중간에 잡아채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바로 퇴근해버렸다. 그 뒤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에이 내 알 바 아니지.”
어깨를 으쓱한 하연은 이 일에서 신경 끄기로 했다. 어차피 자기 일도 아니고 말이다.
*
레이나드가 예빈을 다시 찾아가 볼 마음을 먹은 건 그 뒤로 일주일이 더 흘러서였다. 망가져 가는 꼴을 더는 봐줄 수 없었던 천후가 아예 그를 강제로 쉬게 해버린 것이다.
놀라서 반발해 봤지만, 정태원과 B랭크 일리미네이터 다수가 동의해버린 덕에 결국 그는 장기 휴가를 받게 되었다.
일에서 멀어져 버리자, 이제 신경을 둘 곳이 한 곳밖에 없게 되었다. 그는 마음을 굳게 먹으면서 차에 시동을 걸어 딸이 사는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가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 그때였다. 레이나드는 예상외의 광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오늘 그의 계획은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자기 딴엔) 단란하게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이번엔 다른 여직원들에게 사정을 해서 요즘 여자애들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개그가 먹히는지 나름대로 연구를 해왔다.
그 과정에서 조금…. 아니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뇌물을 투자하긴 했지만,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대가로는 싸다. 보조석에는 예빈에게 줄 선물 하나까지 준비해왔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만반의 준비였다.
그런데…. 그녀의 오른편엔 다른 사람이 있었다.
다행히 남자는 아니었다. 그녀 옆에 남자친구라도 있었으면 그는 다시 머릿속이 깔끔하게 포맷되어서 집으로 도망쳤으리라.
그건 다행이었는데… 그 옆에 있는 사람이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성아 씨잖아?”
그녀는 아파트 단지에서 들어오는 입구에서부터 주욱 옆에서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고, 예빈이는 그때마다 무반응이거나, 종종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 의사 표현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레이나드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무슨…. 뭐하는 거야?”
끈질기게 붙어오긴 했지만, 레이나드가 그녀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 역시 죽은 아내를 그리며 일리미네이터가 된 몸. 쉽게 아내를 잊을 수 없었고…. 만약 성아와 잘 된다고 쳐도 예빈이에게 말할 면목이 없었기에 레이나드는 그녀를 의도적으로 피해왔다.
그러다 요사이 관리를 좀 못하는 동안 말을 안 걸길레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났는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빈이를 만나고 있었다니?
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딸에게 강제적인 선택을 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차에서 나온 레이나드는 거친 발걸음으로 둘에게 다가갔다.
“성아 씨.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격해진 레이나드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며 노려보았다. 성아는 그의 등장에 놀라 당황해 있었다.
“왜 예빈이 옆에 있는 거냐고요?”
“아니, 그게….”
다짜고짜 밀어붙이는 기세에 성아는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레이나드는 노성을 토해냈다.
“예의를 아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 집안 사정을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지만-”
하지만 바로 그때. 그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예빈이 둘 사이에 끼어들더니 성아의 팔을 잡은 레이나드의 손을 세차게 때어내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성아 이모한테 뭐하는 거예요?”
“뭐? 이모라고? 그게 무슨….”
며칠 사이에 벌써 정이 들었나? 당황한 레이나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예빈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올려보며 말했다.
“성아 이모는 제가 어릴 때부터 절 도와주셨던 분이에요. 아무리 아버지라도 함부로 대하실 자격 없어요.”
그녀의 말에 레이나드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그의 선글라스가 콧등을 타고서 약간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동안 최성아는 잡혔던 팔목을 툭툭 두드리다가… 마찬가지로 엄격한 눈으로 그를 올려보며 말했다.
“…칠삼 씨. 잠깐 이야기 좀 해요, 우리.”
그건 정말이지 화가 난 여자의 얼굴이었다.
*
어른끼리 할 이야기가 있다는 말로 예빈을 올려보낸 둘은 인근 카페로 들어왔다.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최성아는 음료가 나오자 한 모금 넘긴 이후에 사정을 설명했다.
그녀는 자신이 일리미네이터끼리 만든 자선단체의 회원이라고 했다. 그 자선단체가 하는 일은 사망하거나, 모종의 이유로 관리를 받지 못하는 일리미네이터 가족을 후원하는 일이었다.
일리미네이터 일은 험하다. 년에 사망자가 종종 나왔고, 그래서 아무리 돈을 많이 남기고 가더라도 자식만 남는 경우 불우한 인생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일리미네이터의 직계 존속이니, 마법사 출현 초창기에는 그 유가족에 대한 납치 시도도 빈번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렇게 사망자 가족들을 챙겨주는 식으로 시작했지만, 최성아가 가입할 시점에 와서는 조금 더 확대되어, 방치된 가정의 아이들을 돕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고 했다.
디제스터를 잡는 일이다. 이 일을 하는 이들 중의 상당수는 단순히 돈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서 그 분노로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다.
레이나드가 그랬듯이 말이다.
이런 이들의 문제점은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고, 남은 가족도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런 사정을 아는 같은 일리미네이터들이 이들을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5년 전부터 예빈이를 종종 찾아가고 있었다고 했다.
“그럴 수가… 다들 제가 독신인 줄 알았을 텐데….”
“한때 이 나라 일리미네이터의 정점에 올랐던 남자가 있었죠.”
“로마이어…?”
“일단 이 모임의 최초 시작은 그 남자였어요. 그리고 그 정보 수집은.”
“…란이군.”
그녀와는 이전부터 친밀했었으니, 칠삼에 대한 개인 정보를 아예 꿰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말해두는데 전 예빈이 아빠가 누군지 얼마 전까지 몰랐어요. 그런 것까지 알려주진 않거든요. 물론 손바닥만 한 업종이니까, 성씨가 같으니 그럴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그리고 제가 돌보는 아이도 예빈이 하나가 아니고.”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됐어요. 그런 인사는. 그보다…. 당신이 예빈이 아빠라 이거죠?”
“네-”
대답한 순간 얼굴로 그녀가 시킨 아이스티가 날아왔다. 단번에 얼굴에 찬물이 부어진 레이나드는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가 할 말이네요! 이 화상아! 정신머리가 있어?”
짜악! 대번에 그의 뺨을 후려친 성아는 엄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 서슬에 레이나드는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당신 아내 복수에 미친 건 알겠는데 뒤는 돌아봐야 할 거 아니야? 그동안 걔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살았는지 알아? 돈만 보내주면 다야?”
“…….”
“걔는 착해서 지금까지 당신 원망하는 소리 한마디도 안 했지? 얼마 전에 찾아왔었다며? 그때도 별말 안 했을걸? 딸한테 정신적인 부채를 맡기는 아버지가 아버지야?”
“윽….”
“내가 지금부터 당신 잘못을 하나씩 읊어줄게. 잘 들어!”
그때부터…. 레이나드는 진정으로 탈곡기에 넣은 곡물처럼 탈탈 털리기 시작했다….
*
얼마 후. 폐인 꼴을 하고 살던 레이나드가 정상이 되어 다시 돌아온 이후. DS에서는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레이나드 씨. 뭐해요? 일 끝났으면 어서 와요.”
“네? 아, 네. 태원아. 나 먼저 간다.”
퇴근 시간. 밖에서 성아가 부르자 레이나드는 그 말만을 남기고 벌떡 일어나 튀어 나갔다. 불과 얼마 전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이야…. 세상 정말 열심히 살고 볼 일이구만….”
저렇게 입장이 역전될 줄이야. 사정을 들어서 알고 있는 태원은 혀를 내둘렀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성아가 이미 예빈에게 반쯤 부모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니. 이래서야 레이나드가 설설 길 수밖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신기한 우연이었다.
다만, 이것이 완전히 우연인 것은 아니었다.
최성아가 예전부터 예빈이를 도와준 것은 사실이지만, 요즘 들어서 그 빈도를 확 끌어올렸으니까….
그러나 이것은 최성아 만이 아는 진실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