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우정의 형태>
“선배, 요즘 무슨 일 있었어?”
“응? 아니. 그런 건 아니다만.”
“그럼 다행인데….”
천후는 요즘 정말 바빴다. 보름 정도는 한국에 있는 시간보다 외국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그는 강호의 유혹에 허우적댔다. 은근히 보내는 신호가 눈에 잡혀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그녀는 본래 욕망을 숨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노골적인 건 또 아니었는데…. 요즘은 안기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것처럼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남자로서 당연히 싫진 않았다. 그녀의 외모는 원래부터 그의 이상형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는 것 자체는 너무나 기쁜 일이다. 다만 그녀의 변화가 걱정될 뿐이었다.
다행히도 그렇게 걱정하며 품어줄 때 미다, 그녀는 안심하는 표정으로 기뻐하곤 했다. 처음 기색을 드러냈을 때의 불안감은 이제 거의 희석되었다. 대신에 오랜만에 집에서 푹 쉬는 지금도 옆에서 팔을 끌어안고 앉아있었다.
이것도 드문 태도였지만, 천후는 머리를 쓸어넘겨 주며 그저 받아주었다.
‘모르는 사이에 무슨 심경 변화가 있었나 보다.’
천후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둔한 편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티를 내면 아무리 그래도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하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물어볼 수도 없는 문제라, 천후는 그녀가 이전처럼 돌아올 때까지 함구했다.
거실에서 둘이 그러고 있는 동안 차를 끓여 내온 희주는 티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는 그런 강호의 볼을 같이 쓰다듬었다.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강호의 눈에 그녀는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까지 하고 있으면 화를 내거나, 적어도 질투도 할만한데 그녀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천후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자신감 때문일까? 잠시 그렇게 생각해보았던 강호는 곧 그 생각을 지웠다.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리라. 물론 그 자신감이 없지는 않겠지만, 희주는 그런 걸 표출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저 지금 이 상황 자체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걸 바라보고 있자면…. 그렇기 때문에 어쩐지 슬프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넘길 수 있단 마음은 어떤 기분일까? 지금 천후를 둘러싼 이 모든 관계는 그녀의 용인하에 가능한 것.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는 이 ‘놀이’를 모두 끝낼 수 있을 텐데….
그녀는 끝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이 다할 때까지 끌고 가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건 대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건지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힘들게 희주에게 이입해보자면….
그건 너무나도 아스라이 사라질 것만 같은, 연기와 같은 심정으로 느껴졌다.
그래. 마치 사라질 것을 대비해두는 듯한-
“…….”
지끈하고 가슴이 아프다.
속내를 전혀 보이지 않는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누구보다도 천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가 가진 어떤 면모라도 전부 받아들일 수 있는 절대적인 사랑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차가운 손길을 느낀다. 체온이 워낙 낮아서 차갑지만, 이 안에 있는 감정까지 차가울 리는 없다. 그녀 역시 사람이니,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터.
그 진의를 확인해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그녀는 생각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천후야.”
“응?”
“사실…. 조금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만.”
“뭔데 그래?”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좋다. 하지만 입에서 이 말이 나와 버리면 그 움직임이 잠시 멈출지도 모른다. 그건 아까운 일이다. 강호는 망설였지만, 그래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앞으로 어쩔 셈이냐, 우리들의 관계-”
더뜸더뜸. 간신히 어려운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띠리리리. 대문의 초인종을 눌렀을 때 울리는 소리가 인터폰을 통해서 들려왔다. 순간 강호가 조성하던 분위기가 훅하고 깨졌다. 옆에 앉아있던 희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으로 향했다. 그동안 천후가 물어왔다.
“응? 선배. 뭐라고?”
“아, 아니다.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손님이 온 건지, 잡상인인지는 몰라도 번잡스런 와중에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최대한 서로 진지하게, 약조를 나누며 해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흠. 알았어.”
한차례 고개를 갸웃거린 천후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뭔가 진지한 이야기였다는 느낌은 왔었기에, 평소 강호를 대할 때의 장난기 어린 태도와는 다른 진중한 태도였다.
그것만으로도 강호는 약간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인터폰을 받은 희주는 평소보다 약간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돌아가 주세요. 이미 말씀 드렸을 겁니다. 계속 이러신다면 경비원을 부르겠습니다.”
이쪽에서도 상당히 민감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경비원이란 말이 나오자 천후와 강호 역시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반적인 잡상인이라면 감히 DS의 자택까지 찾아와 이렇게 길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지 못한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천후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희주 씨. 무슨 일이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인님께서 신경 쓰실만한 일이….”
드물게도 저어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하는 말에 천후는 인터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대여섯 명쯤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카메라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벨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장년 남성이 소리치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응? 남자 목소리가 들리는데? 혹시 천후냐? 천후야? 내가 네 외삼촌이다, 이 녀석아! 문 좀 열어봐! 이야기 좀 하자!>
“…….”
워낙 큰 목소리라 수화기를 통해서도 천후의 귀에 들려왔다. 희주를 바라보니 그녀는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천후가 물었다.
“저 사람들 누구예요?”
“…주인님의 친인척 분들이십니다.”
“아아.”
순간 천후는 어떤 상황인지 감을 잡았다. 그리고 희주가 왜 이 일에 그가 신경 쓰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마음고생 하게 했네.’
잠깐만 생각해봐도 저들을 상대하는 게 얼마나 피곤했을지 상상이 갔다. 천후는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고는 말했다.
“고생했어요. 이건 제가 처리하죠.”
“하지만, 주인님….”
“괜찮아요. 정말로.”
그렇게 말한 천후는 수화기를 그녀에게서 받아들고는 말했다.
“들어오세요. 소란 일으키지 마시고.”
천후는 싸늘한 목소리로, 그들을 자신의 성 안으로 맞아들였다.
*
저택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총 여섯 명이었다.
50대 중반의 장년 남성과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가장 나이가 많았고, 그 아래로는 30대 남녀와 20대 초반의 남성. 그리고 아직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
그들은 저택에 들어오자 양복을 입은 사설 경비원들이 서 있는 걸 보고서 움찔하고선 어깨를 좁혔다. 선글라스를 쓴 그들은 하나같이 키가 180이 넘는 데다가 체구도 큰 남자들뿐이었으니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간신히 이겨내고서 저택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희주의 안내를 받아 소파에 줄줄이 앉고 나서야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저택 안에는 희주와 강호. 여자 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외삼촌이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는 긴장한 기색을 떨쳐내기 위해서인지 큰 목소리로 희주에게 말했다.
“거봐! 천후랑 연결만 해주면 우리를 만나줄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 아가씨가 말을 못 알아듣네.”
“…….”
희주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그들에게 차를 내주고는 물러섰다. 그것에 입을 대고 나서 몇 분이 지나서야 다른 이들도 조금은 긴장이 풀려서 거실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감탄사를 냈다.
서울 한복판에 정원까지 딸린 단독주택이다. 1층에 방만 3개에 부엌, 거실이 있는데 2, 3층까지 올라간 이 집의 가치는 수십억이 넘는다.
딱히 거창하게 꾸며두진 않았지만, 그저 이 집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천후가 소지한 부를 일부 보여주는 척도로 작용하고 있었다.
“천후가 성공하기 성공했구나. 내가 그렇게 될 줄 알았지, 암.”
“어휴. 이렇게 잘 살면서 어떻게 연락 한 번을 안 하나 몰라. 전화를 해도 말도 안 전해주고. 색시 될 아가씬지 몰라도 너무 못됐네.”
장년 부부가 나누는 말에 한숨을 내쉰 강호는 희주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겉보기엔 정말 아무 변화가 없지만, 마주 잡은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몇 달이나 함께 한 강호에게 있어선 이것만으로도 그녀의 감정이 크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아가씨. 천후는 어디 갔나? 사람을 들여놓고 왜 얼굴을 비치질 않아? 어른을 기다리게 하네.”
마치 추궁하는 듯한 목소리에 희주가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 할 때. 그 위를 덮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어른 맞이할 준비 좀 하고 있었습니다. 들어오셨으면 얌전히 계시지 시끄럽게 하시네요.”
안방에서 걸어 나온 천후는 양복 셔츠를 걸치고서 걸어 나오며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거실 안의 공기가 단박에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너, 너….”
뭔가 더듬더듬 말하려고 하는 장년인을 싸늘하게 노려본 천후는 천천히 걸어와서 알아서 가장 상석에 앉았다. 이 자리에서는 외삼촌이라는 장년 남자의 나이가 가장 많았지만, 그 역시 무의식적으로 그 자리를 비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팔걸이에 양팔을 걸친 천후는 회색 정장 바지를 입은 다리를 꼬면서 그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나잇대도 제 각기에, 앉은 위치도 따로따로인 걸 볼 때 이들이 모두 한가족인 것 같지는 않았다. 대충 천후를 찾아오겠다는 친인척 중에서 저 남자가 총대를 메니까 그에 붙어서 찾아온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구성을 간단히 파악한 천후는 그렇게 앉은 채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남의 집에 이렇게 한꺼번에 찾아와서는.”
“아, 아니…. 너 말하는 태도가 그게 뭐냐? 나는 네 외삼촌이라니까!”
성을 못 이겼는지 장년 남자가 소리를 쳤지만, 천후는 코웃음을 치면서 받았다.
“한 번도 못 본. 외삼촌이지요. 말은 똑바로 하죠.”
“뭐, 뭐라고?”
“난 댁을 몰라. 당신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모르는데. 대참사 이전에 날 직접 만나본 사람이 이 중에 있긴 합니까?”
그 말에 장년인을 제외하곤 모두 시선을 피했다. 젊을수록 그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다만 장년 부부만은 어릴 적의 그를 아는 듯했다.
“그럼! 알고말고! 네가 기저귀 차고 있을 때도 본 적이 있다, 이놈아!”
“아. 그러세요? 그럼 왜 그 뒤에는 당최 찾질 않으셨을까?”
“윽….”
“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유그드라실에 올라갔을 때 절 찾았다는 사람이 있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땐 왜 안 찾으시고 지금에야 오셔서 큰소리냐고요. 외삼촌님.”
“그, 그건….”
남자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 의자에 앉아있긴 했지만 천후의 체구는 애초에 컸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옆으로 턱을 괴며 바라보는 그 눈빛에 압도당한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외쳤다.
“그, 그땐 우리도 경황이 없었던 거야! 이제라도 찾아왔으니 된 거 아니냐!”
“아! 경황이 없어서. 그러시구나. 좋아요. 그렇다 치죠. 그럼 대체 이렇게 여러분이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거죠?”
본론이 나오자 남자는 다른 사람들을 한 번씩 돌아보다가 말했다.
“네가 어렸을 때 일은 안타깝게 됐다. 하지만 이제 장성해서 이렇게 잘 버는 몸이 되었지 않냐?”
“그래서?”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다들 사정이 조금씩 어렵다. 그래서 네 도움을 좀 받고 싶어. 친척 좋다는 게 뭐냐? 원래 친인척끼리는 상부상조하고 사는 게 아니겠냐? 응?”
손아랫사람을 어르듯이 대하는 그 태도에 천후는 씨익하고 웃었다.
“상부상조. 상부상조라….”
웃으면서, 그의 말을 딱 한마디로 일축했다.
“좆을 까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