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놀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 분위기를 깬 것은 다리를 끌어안고 있던 아이였다.
“선생님….”
“아. 괜찮아, 샤샤.”
그녀가 무서워하자 강호 역시 흠칫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동안 아이를 진정시킨 복지사는 강호를 올려보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줄래? 조금만 지나면 교대시간이니까.”
“응. 그러지.”
그렇게 답변한 강호는 그녀가 다시 아이들 사이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중학생 시절, 좋지 않게 인연이 끊겼던 그녀와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이야.
*
시간이 지나. 그녀가 말한 대로 교대시간이 되어 다른 복지사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하루에 4교대로 아이들을 주야로 돌보고 있었다.
아이들이 사는 아파트 안에서도 그냥 놔두면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함께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 토, 일요일은 따로 팀을 정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그중 이번 주는 주간 근무였던 DS 보호시설의 사회 복지사, 민주희는 이강호와 함께 인근의 카페에 들어와 있었다.
“놀랐다. 네가 이곳에서 일하고 있을 줄이야.”
“그러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세상 참 좁네.”
이마가 완전히 드러나도록 머리를 뒤로 넘겨서 한 줄로 땋은 여성이었다. 예전, 천후와 만나기 전 강호가 자주 하던 스타일의 머리였다. 주희는 이제 풍성한 머리칼을 풀고 있는 강호를 보면서 말했다.
“요즘은 풀고 다니네?”
“응? 아아…. 매번 꼬는 것도 귀찮은 일이니 말이다.”
“그래? 그런 것치고 관리를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에 강호는 가슴이 시큰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중학생 시절. 민주희는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남자행세를 하고 돌아다니는 자신을 벽을 세우지 않고 받아들여 줬던 유일한 친구. 어쩌면 평생 간직할 수 있었을 우정이었지만, 강호는 자기 손으로 그녀를 쳐내버렸다.
참고 참던 그녀가 결국엔 폭발해서 화를 냈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것은 강호가 심장 뒤에 묻어두고 있던 수많은 과오의 잔재여서, 그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에 파묻힐 것만 같았다.
그런 강호와는 달리, 주희는 마치 오랜만에 연락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딱히 과거 이야기를 꺼내오지도 않았고, 입가엔 가볍게 미소까지 짓고 있기까지 하다.
이 여유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강호로선 놀랍고, 어떤 면으론 부럽기까지 했다.
결국, 좀 더 과거에 속박되어있는 강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동안…. 잘 지낸 거냐?”
그 말에 주희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건 원망하거나, 책망하려는 것과는 조금 다른 빛이었다. 아주 약간 굽어서, 웃음기와 함께하는 눈빛이 보였다.
“그럼. 이렇게 멀쩡하게 앞에 있잖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강호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간신히 마주치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옆으로 피했다. 그걸 지켜보던 주희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옛날 일 때문에 그래?”
“다, 당연하지 않나? 그때 난….”
“후후.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이야? 이미 잊었어도 될 일인데….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니?”
“…….”
대수롭잖다는 듯한 그 말에 강호는 오히려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그 일에 의미를 두고 있었던 것은 자신뿐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그녀로선 쉬이 알 수 없었다.
생각보다 마음의 상처가 남지 않은 것 같으니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이 그녀에게 그리 큰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을 슬퍼해야 할지.
후자가 떠오른 순간. 다시 한 번 암담함과 죄책감에 몸서리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그때였다.
“널 잊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 뒤로 오래 울었지. 너는 그 뒤론 학교에 나오지도 않았고. 집으로 찾아가 보니 아랫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하고.”
“그, 그런!”
“그런 일이 있었어. 그리고 네 생각이 날 때마다 늘 생각했지. 뭐가 문제였을까. 나에게 뭐가 부족했던 걸까.”
“아니다!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다.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없었다. 문제가 있었던 건 자신이었다. 관계를 유지할 생각조차 없었던 맹목적이었던 자신. 그러나 민주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에게도 문제는 있었어. 나는 제대로 네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거야. 네 모든 사정을 들었는데도 막연하기만 했던 거지. 그때 내가 너를 좀 더 진지하게 잡았다면… 그때는 좀 더 다른 결과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예를 들자면.
“그때 그렇게 연이 끊기진 않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나.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일이 하고 싶어졌었어. 그래서 사회복지사가 됐어.”
“…….”
“그리고… 반년 전쯤에. 그러니까 한참 취업 준비하던 때였던가? DS 광고에서 네가 나오더라? 만화 광고에도 나오고. 그때 생각했어. 만약 DS에서 내가 참여할 수 있을만한 사업을 그쪽에 지원해보자고. 그러다 올해 마침 공고가 뜨더라. 그 뒤론 뭐…. 이렇게. 일하고 있습니다. 응."
“그럼….”
"맞아. 그러니까 오늘. 너와 내가 만난 건 반쯤은 필연이야. 아까 이렇게 만날 줄 몰랐단 건 사실 조금 거짓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는 하고 있었어. 그러다 이렇게 날이 왔네."
그 말에 강호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언제나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강호는 그녀를 찾을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이미 다 지난 일이라고.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지나간 과거는 어느 순간 모든 장애물을 넘어서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자신은 건널 생각도 못했던 강을 넘어서.
맑게 웃고 있던 주희는 가볍게 그녀에게 손을 내뻗었다.
“그러니까. 우리 이제 다시 인사할 수 있을까?”
욱 하고. 심장 근처에서 무언가가 걸렸다. 그것이 얼굴까지 올라오는 것을 강호는 간신히 억눌렀다. 간신히 억누르며….
“미안. 미안했다…. 내가…. 바보였어.”
9년 만에 재회한 친구의 손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막고 있던 것은 결국 흘러나와 흐느낌이 되었다.
주희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무적인 양 모든 것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생각했지만.
둘의 인연은 베이지 않고, 여전히 엮여 있었다. 9년 전 그 일이 후로도. 주욱….
*
그 뒤로 둘은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한 번 제대로 말문이 터지자, 둘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길게 하는 편이 아닌 강호였지만 그녀에게는 달랐다.
“그동안 분위기가 많이 변했네. 남장은 포기한 거야?”
“얼마 전까진 계속 하고 있었다.”
“으와…. 할아버님 진짜 끈질겼구나? 그런데 왜 갑자기. 아. 남자 생겼니?”
“…….”
강호는 잠시 대답을 주저했다. 하지만 그 기색만으로도 뻔하다는 듯이, 주희는 호호 웃으면서 그녀의 팔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쳤다.
“그럴 거 같았어, 얘. 완전히 선머슴같이 굴더니 지금은 꾸미기까지 했으니까.”
“그게….”
강호는 얼굴을 붉히며 꼼지락거렸다. 그걸 보고서 주희는 내심 크게 놀랐다.
그녀가 기억하는 강호는… 학교 일진이랍시고 거들먹거리던 녀석을 딱 세 대 때려서 녹다운시킨 이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위험한 늑대였다. 아무튼 공기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함부로 시비 걸면 다 죽여 버리겠다는 살기를 옷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나마 주희를 대할 땐 조금 자신을 내비쳐서 허술한 면모를 보이곤 했지만, 그때도 ‘남자다움’이라는 대명제에 속박당해있는 게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누군지 몰라도 대단하네.’
주희는 굳이 자신이 먼저 상대가 누구인지 묻지는 않기로 했다. 때 되면 알아서 알려줄 것이니 말이다.
“하여간 잘됐어. 인물이 아까웠지. 넌 예전부터 예쁘게 생겼었는데 그렇게 하고 다녔으니까.”
“크, 크흠.”
대놓고 하는 칭찬에 부끄러워진 강호는 손을 부채질했다. 이 화제는 역시 길게 끌 거리가 아니다. 강호는 이야기를 돌렸다.
“일은 할 만한 거냐?”
“응. 애들이 얌전하니까 어려울 건 그리 없지. 기저귀 갈아줘야 할 나이도 아니고. 밥이랑 화장실, 잠자는 것만 챙겨주면 되니까 이만큼 편한 일이 어디 있겠어? 근무 여건도 좋고, 월급도 이만큼 주는 데 별로 없어. 나 나름대로 수십 대 일 경쟁률로 들어온 엘리트다?”
“그, 그래?”
“응. DS는 그런 쪽으로 유명해. 참 사람이 됐어. 다들 인건비 못 깎아서 안달인데. 수익성 생각해서 하는 일은 아니라지만, 이러면 정말 손해를 많이 볼 텐데.”
‘셀레나가 매일 우는소릴 하긴 하지.’
강호는 잠깐 식은땀을 흘렸다. 그렇게 웃고 있던 주희는 그러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다만… 힘든 게 있다면 아이들을 보는 것 자체랄까? 너무 안타까워. 이제 막 놀아야 할 나이인데 온종일 말 한마디 안 하는 경우가 많아. 아까 본 샤샤 정도면 마법사 아이들 중에선 매우 양호한 편이야.”
“그렇군…. 아. 그러고 보니 너는 마법사가 아니지 않던가? 마법사 아이들을 돌보는 게 힘들진 않고?”
“큰 차이 없어. 아이들의 큰 언니라는 DS 직원… 이름이 라즈베리였던가? 그 애가 올 때마다 마법은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거든. 자기도 모르게 쓰는 경우가 없진 않은데, 생활마법 정도야… 보다 보니까 익숙해지더라. 너무 심하게 남발하는 경우엔 유그드라실 쪽에서 내려온 전문가가 따로 관리하니까. 그런 것보단 좀 더 빨리 애들이 기운을 찾았으면 좋겠어.”
그 말에 강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편으론 주희의 태도에 감탄했다. 바로 몇 달 전까지 바로 이 아이들이 폭탄이 되어서 보통 사람들 상대로 테러를 일으켰다. 그런데도 그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걸 보고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사실 절대 쉬운 게 아니었다.
과연 수십 대 일의 경쟁을 뚫고서 이곳에서 일할 자격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때였다.
딸랑딸랑. 카페 문이 열리며 그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키는 180 정도에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눈을 작게 뜬 웃는 낯의 남자였다.
그는 카페 안을 둘러보다가 그녀들이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그 인기척을 느낀 주희는 반색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자기.”
“웬일로 퇴근하고도 이 시간까지 밖에 있어? 모시러 왔어.”
주희는 그 말에 빙그레 웃음 지으며 어깨에 올려진 그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그 광경을 보며 강호는 조심스럽게 무섭다.
“주희야. 이분은….?”
“아. 인사해. 내 남편 될 사람이야.”
“안녕하세요. 한정규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강호는 몇 번이나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겨, 결혼할 사람?’
강호와 마찬가지도 주희도 이제 스물넷. 대학을 막 졸업한 사회 초년생일 텐데 벌써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니?
그렇지만 앞에서 지켜보니, 둘이서 깨가 쏟아지는 것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건만 된다면야…. 사랑하는 사람끼리 함께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강호야. 그럼 나 들어가 볼게. 시설엔 자주 찾아올 거지?”
“응. 다음에도 찾아가마.”
“그래.”
카페에서 나와 남자가 몰고 온 차를 타고 돌아가는 것을 배웅해준 강호는 손을 흔들다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부럽다….”
멍하니 그렇게 말하던 강호는 자기 입을 가렸다. 좋지 않은 생각이다. 천후가 자신에게 소홀히 대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아니…. 하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관계가 된다는 것 자체에 동경을 가지게 된다. 자연스러운 욕망.
“…….”
자기 입술을 손끝으로 가볍게 누르고 있던 강호의 머리칼이 불어오는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그렇게. 수년 전 절친과 다시금 만나 관계를 회복한 일은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며칠 후.
천후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국내에 나타난 경급 디제스터를 처리한 강호는 피 칠갑을 간신히 씻어내고는 바이크를 타고 자택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바로 직선거리로 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시간이 남으면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이 취미였다. 그리고 오늘은 번화가를 돌면서 사갈 물건을 찾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응?”
강호의 눈에 거슬리는 장면이 잡혔다. 얼마 전에 본 차량이 주차되어있는 게 보였다. 저 차 자체야 국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자. 어서 들어가자.”
“한잔만이야?”
그 앞에서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여성의 허리를 팔에 감고 있는 남자까지 눈에 익었다. 하지만 그가 옆에 둔 여자는 주희가 아니었다.
“…….”
강호는 그가 끝내 근처 술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건….”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무척이나 뜨거운 불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