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수령이 멈춘 이후. 일리미네이터와 유그드라실, 그리고 삼국 연합국의 군인은 본거지 내부를 샅샅이 수색해서 생존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리나 그윈들링을 반 시체상태로 제어하던 시스템이 무너지자 정신지배는 멈추었고, 그와 동시에 마법사 아이들은 모든 의욕을 잃고서 멈춰버렸기에, 그들을 제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중에서 그나마 마지막까지 저항한 건 연구원들이었지만, 아이들의 상태를 보고서 분노한 마법사들을 막기엔 도저히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곧장 줄줄이 엮여서 군에 넘겨졌고, 아이들의 문제가 남았다.
마법사만 해도 천 명에 가까운 데다, 비 마법사도 그에 육박하는 상황. 이 상황에서 주변 삼국은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저어해하고 있었다. 그때 천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제가 맡겠습니다. 보호시설을 만들지요. 하지만 이들의 정신적인 에프터 케어를 할 수 있는 건 유그드라실 뿐이니, 시설로 마법사를 파견하는 식으로 운영하고자 합니다.”
지하 핵심 시설에 있는 아이들을 수습한 천후는 그렇게 말했다.
마지막 공격으로 산 하나를 완전히 관통해 시설에 내리꽂혔지만, 놀랍게도 수조 안에 들어있던 아이들은 무사했던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힘인가.’
당시의 자신은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한 시도였다.
“으음…. 하지만 마법사를 집단으로 모아놓는 것은….”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유그드라실도 지금은 천 명이 넘는 마법사를 한꺼번에 수용할 여력은 없을 텐데요?”
“그건……그렇소. 당신 말이 맞군. 감사하오. 마법사를 위한 당신의 노력과 호의. 절대 잊지 않겠소.”
“…….”
유그드라실 간부들이 하는 말에 천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신뢰를 다시 보이는 것은 그에겐 이제 와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그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직원 파견 외에도 시설에 정기적으로 감사를 실행해주셨으면 합니다. 운영하는 노하우가 모자라니까요. 그리고 사실상 상주하게 되는 유그드라실 직원도 생길 겁니다.”
“그건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니, 문제없소.”
“그리고…앞으로도 이런 시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겁니다. 재발 방지에 최선을 다해주시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오. 정규공격대의 영향력을 알았으니, 이후부턴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조짐이 보이면 당신들에게도 바로 정보를 공개하겠소.”
유그드라실 입장에선 앓던 이가 뽑힌 기분이라서일까? 그들은 평소와는 달리 선선한 태도로 천후가 내거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것들이 진짜로 지켜질지는…이후 정식 문서에 서명한다 해도 확신까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자신이 움직일 테니까.
유그드라실만한 광범위한 감시 시스템을 만들어낼 순 없겠지만, 그는 여러 국가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입장. 이만한 시설을 만들어내려면 일개 개인의 재산으론 불가능한 만큼, 그 낌새를 눈치챌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짚어왔다. 안소니 크라우저였다.
“한국 정부에서 그 많은 마법사를 다 받아주긴 힘들겠지. 자네 혼자 다 끌어안을 생각은 없어. 미 정부를 설득해보지.”
“유그드라실의 의견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보호소는 세계에 흩어놓는 게 좋을 거예요. EU 쪽에도 이야기를 해보죠.”
스컬린이 해온 말에 천후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매지션 레이지로 위장된 대규모 테러와 반 마법사 시위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말은 쉽게 해주고 있지만, 사실은 상당히 어려운 일일 터였다.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걸로 뒤처리 문제도 어느 정도는 끝났다.
단 하나만을 제외하고는.
*
“파파….”
마지막 데이터를 넘기고 나서 축 늘어져 버린 기계 인형의 몸체를 한 여성이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응당 있어야 할 빛이 없었다.
“마마….”
열려있는 관의 안쪽을 바라본 여성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속박하고 있던 것의 정체를 마주 본 순간부터,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들이 최후를 보고 나서야, 레졔나. 그리고 라즈베리에게는 온전한 기억이 천천히 떠올랐다.
이미 학계에서는 완전히 연구를 포기한 마법사 관련 이론을 제시한 학자였던 루카스와 모리나는 단란한 부부였고, 슬하에 레졔나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다.
마법사 관련 이론이라고는 해도 파고들어 갈수록 극단적인 내용이 되어갔기에 루카스는 점점 발표를 자제하면서, 학자의 길에서 물러나려고 하고 있었다. 모리나가 마법사란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기도 했다. 덕분에 가정은 단란해졌다.
젊었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 둘과 함께 꽃밭을 거닐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 직후. 아버지의 가슴팍에서 치솟았던 피도.
그때부터. 아버지의 존재는 왜곡되었고, 어머니와 자신은 그들에게 이용당했다. 그것이 사람조차 아닌 먼 과거. 냉전 시대의 망령이 만들어낸 프로그램에 붙어서 행한 일이었다니.
그러면서 그동안 자신은 그 가짜 아버지에게 의존해왔다니. 어머니가 이런 관 속에 틀어박혀서 힘을 빨아 먹히는 걸 당연히 여기고, 어머니의 체세포를 이용해서 자신의 자매들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걸 방조해왔다니.
레졔나와 레졔나 시리즈에게 심어진 과거 그 꽃밭의 환영조차 단란하던 그때의 기억에 기계인형의 외형을 합성하여 조작해놓은 세뇌 이미지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여기까지 와서야 알았다.
“…….”
무너질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자신의 머리 옆에 닿았다. 거기에선 희미한 녹색의 오오라가 피어올랐다.
“죽자….”
자신에겐 세상을 살아갈 자격이 없다. 감히 어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이라면. 싸부조차 없는 지금이라면 자살하는 건 어렵지 않다. 깨끗하게―
“언니.”
그때였다.
작은 목소리가 울린 것은.
“…….”
어깨를 떨면서 움직임을 멈춘 라즈베리는 천천히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거기엔 자신을 닮은 어린아이가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서 있었다.
‘두고…가신 건가….’
워낙 넓은 시설이다. 못 보고 지나친 아이 하나 정도는 나올 수도 있다.
“……조금 기다리면 사람들이 올 거야. 확인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따라서 가.”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갑다. 방금 먹었던 마음가짐의 영향일까. 그렇다 해도. 이것조차 후회된다.
저 아이들에게 차갑게 말할 필요는 없는데도.
하지만 아이는 그런 기색을 신경 쓰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와 그 옷깃을 잡았다.
“언니랑 나갈래. 다른 사람들 무서워.”
“…….”
라즈베리는 고민했다. 지금이 지나면…분명 기회는 오지 않으리라. 천후도 있으니. 더더욱. 하지만…그렇다고 이 아이를 여기에 그냥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곳은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공포를 자극하는 곳이니까.
“가자. 응?”
“……그래.”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난 라즈베리는 눈물을 훔쳐내고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분명 잡고 있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아무 느낌도 없다. 솜사탕을 쥐고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
몇 번인가 기계 인형과 어머니의 관이 있는 뒤를 돌아보던 라즈베리는 간신히 시선을 돌려서 앞을 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왜 울고 있었어?”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라즈베리는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왜일까? 파파와 마마가 죽은 게 슬퍼서? 아니…. 그런 건 아니다. 물론 그건 슬프지만, 이미 오래 지난 일.
그보단, 그들이 자신들의 자의와는 다르게 몇 년이나 이용당했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 결과. 수많은 아이들이 아픔을 겪었다는 것이 슬펐다.
그래. 그러니까 단순히 말하자면.
“미안해서….”
좀 더.
그녀가 좀 더…. 빨리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면.
이런 일까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좀 더 빠르게 모든 상황이 해결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바보 같은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눈물이 나왔다.
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구나.”
“응….”
아이는 이유를 깊이 묻지 않았다. 그 한마디로 이해했다는 듯이. 그저 다시 걸었다. 그러자니, 저편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령의 방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가장 빠른 루트. 저택의 서재로 통하는 출입구에서 들어온 빛이.
라즈베리는 여기서 그녀를 보내줄 생각이었다. 이제 건물 밖으로만 나가면, 그녀를 챙겨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앞으로도 힘든 삶이 되겠지만……. 여기보다는 나으리라.
하지만 그때.
“자. 그럼 나는 여기까지만 같이 올게.”
“응?”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아래로 내려보니, 거기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거기에 있었다.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잠깐! 어딜 가는 거야!”
“그 너머는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너’를 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길 안내. 거기에 계속 있으면 안 될 것 같았거든. 조금 아쉽지만.”
“무슨―”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순간. 한 가지 예감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소녀가 말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레졔나. 저항하지 못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니까. 그러니. 너는 앞으로 너의 삶을 살렴. 아직 너에겐 할 일이 많잖니.”
“아……!”
소녀는 점점 멀어졌다. 점점 멀어지면서, 그 몸이 천천히 희뿌예지며. 점점 더 커졌다.
그것은 마치―
“안녕. 레졔나. 아니 이제는 다른 이름이려나?”
“마마!!!!”
손을 뻗는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당연했다. 그녀는 이미 닿을 수 없는 영역. 살아있는 사람은 갈 수 없는 영역에 있었으니까…….
“마마…….”
뚜벅뚜벅. 발소리가 났다. 그녀는 왜 하필 지금 그녀가 자신을 이곳으로 올려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간신히 참아냈다 싶은 눈물이 다시 한 번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주저앉지 않는다.
그녀의 뜻을 안다. 그 의미 역시도.
그렇기에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마지막까지 함께 해준 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바로 뒤에서 멈출 때까지.
그녀를 발견한 발소리의 주인이 말했다.
“라즈베리.”
익숙한 목소리. 약간 놀란 기색이 섞여 있었다. 자신이 스스로 여기까지 올라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는 듯한. 그런 기색. 틀리지 않다. 혼자였다면 분명 자신이 있는 곳은 이곳이 아니리라.
“…가자.”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오며,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졌다. 쓰다듬지도 않고, 그저 올려놓기만 한 것뿐이었지만….
“응.”
간신히. 그 따뜻함에 기대어 등을 돌려보면, 거기에는 빛과 함께 자신의 히어로가 서 있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겨들고서 소리 내어 울었다.
얼마간이고.
얼마간이고.
계속해서 울었다.
*
그 뒤로 며칠이 지나서야, 천후와 라즈베리는 대한민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엘모세와트 건에 있어서 아이들에게 죄를 묻기 어려웠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라즈베리의 경우엔 자신이 테러를 저지른 적도 없었으니 더더욱. 연구실을 날려버릴 뻔하긴 했지만, 그건 미수로 그쳤기도 하니.
비인륜적인 행위를 방조한 죄가 있었지만, 마법이란 특수한 힘이 개입한 이상 죄만을 묻기도 어려운 것이다.
덕분에 엘모세와트의 연구자들은 연구 기억 봉인 후 곧장 삼국에 넘겨졌지만, 라즈베리와 엘모세와트의 아이들은 유야무야 유그드라실에 그 처분을 맡기는 형식이 되었다. 사실 이런 건 국가에서도 떠맡기 싫어하는 일이었으니까.
대한민국 정부에선 리미터 착용과 DS의 보호감찰을 전제로 그녀들의 입국을 허가해주었다.
그렇게….
“오우. 웰컴 투 코리아!”
“늦어~! 겨울 다 지나가겠다!”
아이들이 빽빽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엔체스터 호텔에 입성했다. 천후의 자택은 이 기회에 아예 새로 짓고 있었기 때문에 이쪽으로 오게 된 것이다.
“미안해. 고향 쪽에 조금 일이 많았어.”
희미하게 웃는 라즈베리를 본 아이들은 흠칫 놀라더니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말투가 말짱해졌어.”
“컨셉 바꾼 건가?”
다 들리는 말에 라즈베리의 눈썹이 자기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그녀는 어흠어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고향에서 좀 일이 있었거든. 당분간은 얌전하게 지내기로 했어.”
“아아…. 무의미한 일을.”
“어차피 일주일이면 그만둘 게 뻔한 것인데.”
요 녀석들이? 이마에 혈관이 드러난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화를 삭였다.
그 뒤론 다시 한 번 거창한 환영식이 있었다. 이그네스 때와는 달리 라즈베리는 이것저것을 먹이는 환영식이었다. 그녀의 배가 빵빵해져서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만들고 나서야 만족한 왈가닥들은 그제야 만족하고선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안자고 뭐해?”
홀에 내려와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라즈베리는 천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그뿐 아니라 희주와 강호까지 같이 나와 있었다.
“아…. 별거 아냐. 그냥. 눈이 오길래.”
그녀의 말을 듣고 시선을 옮기니 과연. 겨울이 슬슬 끝나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부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
하지만 천후는 그녀가 그저 눈을 보기 위해서 일어나있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여전히 불면증?”
“응. 아무래도.”
그날 이후. 며칠 지났지만 그녀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의식은 통합되었으니 레졔나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잠이 들면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 두렵다.
바로 셋에게서 걱정하는 느낌이 확 들었다. 그것을 본 라즈베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이 정돈. 며칠만 지나면 말짱해질 거니까.”
“그렇긴 하지만….”
천후의 말에 라즈베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뭐야. 그럼 싸부가 같이 자줄래? 옆에 사람이 있으면 덜 무서울 테니까.”
순해 빠진 사람. 그래도 자기 여자들이 바로 옆에 있을 때 이런 말은 하면 쉽게 응하지 못하겠지. 그런 생각으로 던져본 말이었지만…….
그 직후 그녀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생각이군요.”
“음…. 뭐 하루 이틀 정도야.”
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같이 서있는 희주와 강호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녀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어. 어라. 이게 아닌데.’
긴. 긴. 눈 내리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