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터져 나온 것은 섬광이었다. 사람의 작은 몸체에서 터져 나온 그것은 유그드라실에서도 직접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넓게 퍼져나갔다.
빛은 처음엔 사방을 밝혔지만, 조금 지나자 그 기세는 천천히 수그러들었다. 이제 그것은 시작된 원점. 사람의 몸 주변에만 머물고 있었다.
아니. 이것을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그것만은 의문이었다.
흑염을 두르고 있을 때는 그나마 인간의 윤곽선이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이제 백열 그 자체가 길쭉하게 서 있는 것에 가까웠다.
"하아…하아…."
'집중해. 이것도 못 이겨내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영천후의 의식은 방금까지 있던 암흑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의 몸에서 뻗어나온 힘 때문에 호수에 파문이 그려지는 게 보였다. 거기에 비쳐 보이는 자기 모습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저 위에 거의 비슷하게 생긴 새빨간 불길이 보인다. 정말 터무니없이 닮아서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외형은 닮았지만, 그 근원은 달라. 아. 뭐 말해봐야 입 아프겠지. 하여간 내가 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니까. 그동안 할 수 있는 걸 하라구. '친구'.'
"그래…야지…"
S랭크 마법 스펠 세이브를 일시에 풀어 SA 랭크 신위 상태가 된 천후는 그 대답을 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컨트롤을 하게 해준다더니, 말과는 다르게 그냥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만도 힘이 든다.
하지만 이게 어딘가? 아예 이성을 잃고 날뛰는 것보단 훨씬 나으리라.
"간…다!"
피잉. 그가 있던 자리에 십자형 섬광이 터져 나오며, 신형이 쏘아졌다.
"아-----"
그 기색을 읽은 이그네스가 사전에 붉은 파형을 만들어냈다. 지금까진 전혀 뚫을 수 없었던 방어. 그러나.
"하아!!!"
콰지지직! 빛이 닿자마자 붉은 파형이 으깨지며 그는 자유롭게 그녀에게 접근했다. 순식간에 그녀에게 접근한 천후는 그녀의 어깨…로 추정되는 곳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이그네스."
"아---------"
놀란 걸까? 그의 손이 닿자, 그녀는 아리아를 내지르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여러 번 폭발이 일어나 그를 뒤로 밀쳤다.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프리트들이 거구를 움직여 천후를 압박해왔다.
주변을 뒤덮고 있던 화염이 좀 더 거세지고, 놈들의 손아귀가 사방 천지를 막으며 그를 가두려 들었다.
"하."
위협적인 움직임이지만, 천후는 코웃음을 쳤다. 뭐야, 이것들은. 아아. 하긴. 어차피 그녀의 피조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아니지. 어찌 보자면 디제스터보다도 감이 좋지 않다.
지금 이 모습을 보고서도 달려들 디제스터는 없을 텐데-
"귀찮다! 꺼져라!"
손날을 세운 천후는 그것을 횡으로 그었다. 그러자 단지 그 동작만으로 주변을 감싸던 이프리트의 손이 잘렸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푸확! 허공에 백색의 선이 그어진다 싶더니, 놈들의 허리높이를 기준으로 세상이 갈렸다. 몸통이 완전히 잘려버린 놈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하찮은 것들이."
그녀가 쉽게 만들어낸 것을 그가 쉽게 없애지 못할 리가 없다. 이런 것에 의지해서 나를 거부하려 들다니. 역시 이성이 온전치 못한 게 틀림없다.
"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그네스는 아리아를 자아냈다. 그 음색은 확실한 경고를 담고 있었다. 이 이상 접근하면 너를 태워버리겠다는 경고. 천후는 웃었다.
"어디 해봐."
지금이라면 뭘 해도 당할 것 같지가 않다. 그럴 리가 없지. 그녀가 아무리 강대한 힘을 다루고 있다 해도 결코 그에게 닿을 순 없다.
그 자신감에 그는 양팔을 벌리고 공격을 종용했다.
"아-----"
당황했는가, 이그네스는 주춤거렸다. 아아. 순해 빠진 것. 그 지경이 되어서까지 정말로 힘을 다하진 못하는군….
백열이 웃는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는 그녀의 바로 앞에 나타나 있었다.
"아----!"
놀란 불꽃이 힘을 발휘한다. 다시 한 번 폭발이 일어나 그의 몸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몇 미터 밀리지 않는다. 그것에 위협을 느낀 것이리라.
화륵….
그녀의 몸을 감싼 불꽃이…. 나선을 그리며 그녀의 손끝에 모인다. 이전, SA 랭크들이 만들어놓은 결계에 금을 가게 한 그것.
지금은 어떤 위력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린다. 불꽃이 모인 것만으로도 주변 온도가 급상승하며, 호수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천후는 그걸 보며 실실 웃을 뿐이었다.
'글렀네, 이놈.'
귓가에 무슨 소리가 들려온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아아. 뭘 할 수 있지 이그네스?
보여줘. 보고 싶다고. 네가 과연…. '나'에게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아-----!!!"
홍적이 대기를 찢었다.
*
둘의 움직임은 유그드라실 위성으로 촬영되어 방영되고 있었다.
아예 남극에서 철수해 유그드라실로 올라온 일리미네이터들은 그 광경을 보고 창백하게 질렸다.
"저…저게 뭐야?"
"진짜 괴물이잖아?"
둘이 생긴 것도, 하는 짓도 거의 비슷하다. 솔직히 이쯤 오면 천후가 손짓하면 멸급 디제스터를 만들어내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대는 소리를 들은 강호의 표정은 어두웠다. 지금까진 그나마 아무리 흑염을 둘렀어도 정신을 유지하고 있어 그를 받아들여 줬지만, 그가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날아가 버리자 다들 기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저런 모습을 취하고자 한 이유 자체가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인 건 이미 머릿속에서 날아갔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것은 괴물을 상대하는 또 다른 괴물일 뿐이었다.
"천후야…."
그러나 그녀는 순수하게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가 받을 상처 역시도. 그걸 생각하면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편. 똑같은 화면을 바라보며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이성이 있긴 한 것 같은데… 얼마나 갈지 알 수가 없구려."
"이미 반쯤 날아간 것 같습니다만. 안 그러면 저렇게 충돌할 이유가 없으니."
"좋지 않군…. 가디언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작자…."
유그드라실 심부였다. 반혼령 상태의 유그드라실 원로 둘과 가장 지위가 높은 자들이 모여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차피 맹약에 따라 마지막엔 움직일 수밖에 없는 자요. 그보단 중국 쪽 상황은?"
"아직 출력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65% 정도일까? 게다가 지금은 인력도 빠져나간 상황인지라…."
"다시 보내면 될 게 아닙니까?"
"마력을 소모했지 않소? 보내봐야 시체만 늘어날 뿐."
"흠…."
그들의 입에선 침통한 듯한 소리가 나왔다.
“가야의 트리거는 너무 까다롭군.”
“최후의 발악이니 당연하겠지요. 문젠 당장 대처하기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놈의 이성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나.”
그러나 그거야말로 농담 같은 이야기였다. 홍염이 적색을 손끝에 모으자, 그 역시 힘을 끌어모으며 받아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본래의 목적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저자에 의지하는 게 과연 옳은 결정일까?
“만약의 때에는…. 어쩔 수 없지. 준비가 부족하더라도 실행하는 수밖에.”
그들이 고개가 똑같이 한 번씩 위아래로 움직였다.
“모든 것은.”
“인류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하여.”
*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심지가 된 느낌이었다. 말짱하던 정신이 조금씩 갉아 먹힌다. 무엇이 중요한 생각이고, 무엇이 지금 우선되지 않는지 그 경계를 알 수가 없었다.
힘. 넘쳐나는 힘.
이것을 제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요령을 알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아아. 휘두르고 싶다. 마침 앞에 적당한 대상도 있다. 홍적이 모인다. 오호라 대단하군.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파치치치칙!
마치 부서진 네온사인에서 튀는 스파크처럼 빛이 튀기며 그의 손에 모인다. 과연. 이전 머릿속에 깃들었던 영감탱이가 한 말이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게 정식 사용법이군. 힘이 만개하고 나서야 알 것 같다. 그전까진 없는 힘을 어거지로 끌어올리느라 신체에도 무리가 갔다. 하지만 원래는 그런 식으로 쓸 필요가 없는 힘이지.
“신위.”
치솟아오르던 백열이 손끝으로 모인다. 이것조차 닮아 빠졌다. 하지만 지지 않는다. 위계가 있다. 이 별에 존재하는 생명 중에선-
“하하!!!”
이 위는 있을 수 없다!
번쩍! 끝자락에 모인 힘이 서로를 향해 겨눠졌다. 발사되는 그 순간 서로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힘의 집결. 그것이 턱없이 아름답다.
“아------”
홍적의 아리아가 들린다. 거부가 담긴 그 목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그렇게 날 밀어내고 싶으냐? 미워하느냐? 그래. 그럼 어디 나를 꿰뚫어봐라.
다만. 공짜는 아니야. 나도 너를 칠 거다. 어디…. 너는 이겨낼 수 있을까? 으응?
퓨웅!
흉악한 마음보다 먼저, 적색이 하늘에 궤적을 그린다.
하지만 그 바로 전에.
백열의 손끝 모여 있던 빛이 그 손에서 떨어져 나와 그 앞에 구체가 되어 떴다. 그리고 그는 힘을 모았다.
발끝에서 무릎으로. 어깨로. 그리고 팔로. 언제나 신위를 발사할 때 쓰던 그 궤적을, 지금 와서 굳이 한 번 더 그린다. 그리고 당겨진 주먹은 그 광구를…
친다!
“하아아아아!”
번쩍!
타격과 함께 빛의 파문이 원형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천지가 진동하며, 구체가 포효되어 홍적을 향해 날았다.
찌잉-
처음 울린 것은 이명음. 부딪히자마자 주변의 대기조성이 엉망이 되며, 단박에 지면에 만들어진 호수가 끓어올라 기화되었다. 에너지 파장이 대기권에 퍼져나가 EMP가 되었고, 전리층이 흐트러지며 하늘에는 오오라가 강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빛의 커튼 사이로…. 맨눈으로 쳐다봤다간 눈이 멀어버릴 빛이 남반구에 끊임없이 퍼져나갔다. 그 중간에서….
“아----”
홍적은 비명을 노래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날카로운 홍적이 백열에 밀리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거기에 담겨있는 힘이 얼마나 강맹한 것인지 아는 듯했다.
화염 정령은 저항한다.
두려워. 두려워. 저 빛이 다가오는 것은 두려워 하고.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그것을 지상으로 되돌리려 하지만.
저 백색의 신은 걸걸 웃으며 그녀의 역량을 시험하며 더 밀어붙일 뿐이었다.
안쓰럽게도 그녀에겐 더는 힘이 없었다.
아니. 있다 하더라도 아마―
“아----”
아리아가 흘러나왔다. 방금까지 비명과도 같던 것은 이제 잦아들어, 진정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어느 시점일까….
그녀의 온몸에서 모이고 있던 백색의 섬광이, 갑자기 약해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밀고 올라가던 백열이 그것을 놓치지 않고 타고 올라가 그녀를 노렸다.
“아아.”
다했나? 겨우 이 정돈가? 아아. 아니지. 할 만큼 했다. 네 역량으로는 말이지. 그렇지만 이제 놀이는 끝났구나.
아가. 가련한 아가. 어차피 이 뒤에는 지옥이 기다릴 뿐이다. 그러니. 차라리 이게 낫단다. 자아. 이제 가거라!
콰앗! 백열이 그 힘을 더 키웠다. 홍적이 살라 먹힌다. 어느덧.
정령은 웃고 있었다.
“아! 아아아아악! 이그네스!!!!”
무슨! 무슨 미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멈춘다! 멈춰야 해!
백열은 이미 쏘아졌다. 그의 마음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런 걸 되돌리는 기술이 있었다면, 이미 그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었으리라.
그게 불가능하니 악마의 힘을 빌렸다.
그러나….
그래도!
“멈추라고오오오!!!!”
‘아니?’
“아----------?”
콰지지지직!
이질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공에 퍼지던 백색의 파장은 거짓말처럼 없어지고,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빛줄기는 실타래처럼 풀렸다.
다만 그 중앙을 한줄기.
얇은 홍적의 선 하나가 관통하고 있었다.
백열을 두른 마인과 함께.
“아-------천-----후-----?”
울음 섞인 노랫소리와 함께. 그의 의식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