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홍염의 여제>
서울에서 벗어나며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사람이 없는 곳을 찾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람이 없는 곳은 어디일까? 결론은 쉽게 나왔다. 그냥 지구 밖으로 나가버리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시도해보았지만 실패했다. 대기권을 뚫고 올라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으며, 간신히 열권을 벗어나나 싶었더니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대기권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같은 시도를 두 번 이상 할 정도의 이성은 없었다. 목표지를 바꿨다.
알고 있는 지식이 그렇게 깊진 않았다.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사막이 떠올랐지만, 지금 자신이 부리고 있는 이 힘은 너무나 강하여 세계 어느 곳에 있더라도 영향을 미칠만한 것이었다.
그러다 본능적으로.
조금은 이 몸의 열기를 식힐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것은 어렵지 않았다. 북으로 가느냐, 남으로 가느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
북의 얼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남으로 가자. 그곳엔 사람도 거의 없을 테니까.
그것이 흐릿한 이성으로 내린 이그네스의 마지막 결정이었다.
눈과 얼음의 땅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연안 지역엔 몇몇 연구기지가 보였지만, 그 한복판엔 사람이 있을 수 없었다. 그제야 그녀는 완전히 안심하고서, 지금까지 거의 본능적으로 억누르고 있던 힘을 풀었다.
아아.
이곳은 제법 마음에 든다. 비록, 생각했던 것만큼 춥진 않아 진정시켜주진 못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이곳이라면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을 수 있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그저. 시간만 보내며.
영원히. 영원히. 여기서….
나 홀로.
"아--------"
마음이 아리아가 되어 새어나온다. 이미 인간의 형상이라곤 외곽선으로밖에 찾아볼 수 없는 몸이 된 이그네스는 마음 역시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외로움은 불꽃으로, 슬픔은 빛이 되어 사방을 녹여나간다. 노래 부르는 화염마인은 그것을 보고 허공에서 둥글게 몸을 말았다.
이것은 다 마음을 자극하는 것이 있어서이다. 그러니…. 잠들자.
어려운 일은 아닐 터다. 이미 긴 시간 그래 왔지 않은가? 다른 이들의 도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차이일 뿐.
도움. 도움.
흐릿하게. 이미 인간의 의식은 불타올라 사라졌음에도 저편에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미 정령이라 불러 마땅한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저 다시금. 아름다운…. 그러나 흐느끼는 것처럼 들리는 아리아를 내며 눈을 감을 뿐이었다.
그렇게. 영원히 잠들 참이었다.
그녀의 신경을 거스르는 묘한 감각만 없었다면.
인간이라곤 연안 근처의 연구기지에나 몇 있었던 이 땅에 다른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녀의 잠을 깨웠다. 그러나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은 잠을 자고 싶었다. 이전, 막 일어났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점점 늘어난다. 게다가 그뿐만 아니라 그녀가 잠든 이 얼음 요람 위에 숨 막히는 보를 덮어두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떠날 생각은 없었지만…. 떠날 생각이 없는 것과 아예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잠을 방해받았다. 어째서? 내가 자는 것이 너희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텐데?
분노. 단순한 감정이 그녀를 지배했다. 그 이상의 복잡한 생각은 이제 그녀에겐 무리였다. 하지만 잠이 더 우선이다. 그 생각으로 그녀는 둥글게 만 몸을 풀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더 지났을 때.
그녀는 잠을 방해하려는 자들이 더 많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다.
싫어. 이러지 마. 나는 잠을 잘 거야.
방해하지마. 나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
사람의 언어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경고를 담은 아리아만이 완전히 녹아내려 넓은 호수가 되어버린 남극점 한가운데에서 위협적으로 울렸다.
*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기습할 수 있을까요?"
이그네스 엠프레스의 도주를 막기 위해 투입된 2,000명의 유그드라실 마법사의 인기척은 이미 진작에 포착당했다.
미미르는 언제 공격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 끊임없이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현존하는 어떤 장비로도 볼 수 없는 큐브 엘리베이터 역시 성층권에서 대기권에 접어드는 순간 이미 포착당한 것 같다는 알림이 있었다.
그 안에서 캐스팅을 끝낸 후 딜레이 스펠로 기습을 걸 참이었던 일리미네이터들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차라리 일반 디제스터처럼 포착하자마자 그냥 무턱대고 공격해왔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이그네스 엠프레스는 분명하게, 노골적으로 더 접근하지 마라. 더 가까이 오면 공격하겠다는 경고의사를 보이고 있었다.
미약하나마 이성과 지능이 있음을 알려주는 그 표시야말로 두려움 그 자체였다.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건 이번 공격대의 총괄 공격대장을 맡은 레이나드와 정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원이 너무 많았기에 지휘를 이원화한 것까진 좋았는데, 시작부터 이런 상황이 될 줄은 아무리 그들이라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영국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위험합니다."
"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순 없습니다."
그냥 놔두면 이그네스는 정말 자연사할 때까지 영원히 남극 한가운데에서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전 지구에 재앙이 찾아오게 된다. 게다가 그녀가 매일 내뿜어내는 힘은 점점 커지고 있었기에, 그 시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상황.
해결해야 했다. 그걸 위해서 이 많은 사람들이 동원됐다. 피할 수 없는 싸움.
그 방아쇠가 자신들에게 들려있다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지만….
그래도. 누른다!
"이그네스 엠프레스 레이드 시작! 큐브 엘리베이터 지상 도착과 동시에 딜레이 스펠 해방합니다!"
슉. 슈욱. 지상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150명 이상의 일리미네이터가 그 즉시 남극 하늘에 뜬 또 다른 태양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남극이 아니라 작열 지옥에 온 것 같은 열기를 이겨낸 그들은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내지르며 풀 캐스팅을 뽑아냈다.
푸화아악!
빛이 하늘을 꿰뚫으며 난다. 광선이 대기를 관통하며 그 파형이 오로라를 피워냈다. 그 하나하나가 멸급 디제스터에게도 큰 피해를 줄 수 있을만한 공격. 일리미네이터 등장 후 가장 강력한 화력의 집결이 세상에 강림했다.
"끝나라!"
누군가가 외친 그 한마디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염원 그 자체였다. 아니, 몇 명을 제외한 그 염원 그 자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
아리아가 울려 퍼졌다.
남극점 위에 떠 있는 제2의 태양이 일리미네이터의 마법에 닿자 점점 부풀어 올랐다. 처음엔 그것이 맞닥뜨려 폭발하려는 전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쿠화아악!
이그네스 엠프레스를 감싸고 있던 화염 구체가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그것들은 그녀를 향해 날아오던 빛줄기 하나하나에 대응하더니, 이윽고 그것들을 살라 먹기 시작했다.
"헉…!"
"말도 안 돼!"
"미, 밀린다고?"
150명이다. A 랭크만 20명이 넘는 상황에서 그 풀 캐스팅이 밀리고 있었다. 먼 거리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정태원이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이, 이건…!"
예상했던 수준을 넘어섰다. 그것도 훨씬!
DS에서 상정하던 이그네스의 화력은 S 랭크 방출계 주특기 마법사 수준. 그 예상 화력은 A랭크 일리미네이터 5명에서 최대 10명 수준이었다. 모든 전략은 이 판단을 근거로 짜여있었으며, 그렇기에 이 기습은 사전 포착을 당한다 할지라도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유그드라실의 여러 판단 중 단 하나는 확실히 들어맞은 것이다.
지금 이그네스는 과거 영국에서 나타났던 때와는 격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천급 디제스터 지정은 그럴만해서 매겨진 것이었다.
놀라운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
흩어진 태양이 있던 중앙. 허공에 몸을 말고 있던 정령과도 같은 존재는 천천히 끌어안고 있던 다리를 놓으며 일어섰다.
그들이 지금까지 알고 지냈던 이그네스와는 달리, 사람으로 치자면 성인 여성 정도의 신장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스윽하고 불꽃을 힘겹게 받아내고 있는 일리미네이터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윤곽선이 뭉개져 눈코입은 구별할 순 없었지만, 그냥 드러나 보이는 안면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 이 힘을 행사하는 데에 전혀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여기 모인 것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시험하듯 굽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 판단을 마쳤다.
"아------"
아름다운 아리아가 울려 퍼졌다. 정태원은 광역 화염을 예고했고, 모두 그것을 대비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녀가 취한 행동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가는 팔을 아래서부터 위로 한번 허공에 쓱 하고 가볍게 훑었다. 단지 그것뿐인 동작. 그러나. 그것의 여파는 컸다.
쿠화아아아악!
남극점에 생긴 호수가 끓어오르더니, 화산 지대에서 온천수 터져 나오듯 뜨거운 물기둥이 솟아올라 하늘 저 위까지 솟았다.
마치 용오름처럼 솟아오른 그런 물기둥은 총 4개가 솟아올랐는데, 그것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든 수분을 사방에 흩어내더니 물이 아니라 불꽃 기둥으로 화하다가, 마지막엔 날카로운 눈코입이 달린 크기 200m가 넘는 불꽃 거인으로 바뀌어있었다.
"저, 저게 뭐야?"
그들이 품은 의문에 답해준 것은 미미르였다.
<이그네스 엠프레스 하수인 소환. 임시 명칭 이프리트. 멸급 디제스터로 추정됩니다.>
"뭐, 뭐라고?"
일리미네이터의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놈들은 몸에 두른 불꽃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것은 본래 이그네스 엠프레스가 내뿜을 것이라 생각했던 광역 화염이 되어서 사방을 덮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팀을 5개로 나눕니다!"
"미미르! 광역 화염 버틸 수 있는 시간 카운트 시작!"
<네. 앞으로 6분 48초 남았습니다.>
차분한, 기계적인 목소리는 마치 사형선고처럼 다가왔다. 태원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이그네스 엠프레스를 올려보았다.
이프리트를 소환한 그녀는 잠시 고전하는 인간들을 내려보다가, 더는 관심을 둬 줄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지 다시금 몸을 웅크리기 시작했다. 아름답던 아리아 역시 더는 자아내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지금의 그녀가 얼마 전까지 사무실에서 차분하게 책이나 읽던 적발의 소녀와는 전혀 다른 존재임을 확실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분명.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 어떤 것 보다도 확실한.
인간의 천적이었다.
'사장님…!'
그때 문득. 그의 뇌리에서 영천후가 떠올랐다. 자신이 지금 이런 심정인데, 그는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허나,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사장님! 플랜 C!"
그의 목소리가 통신기에 울리자마자, 사방을 가득 채운 화염의 적색보다 짙은 흑염이 창공을 가로질렀다. 그 모습을 잠시 눈에 담았던 태원은 다시 이프리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앞으로 6분 40초. 그 시간 동안 자신은 모든 이들을 살릴 수 있는 지구 최고의 공대장이 되어야 했다.
"부탁합니다…!"
그 시간 내에 해결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성공하기를 기원하면서.
*
거치적거리는 것들은 치웠다.
이제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당분간 시끄러울 것 같긴 하지만. 곧 잦아들리라.
아아. 그래. 잘 수 있다.
그럴 수 있어.
그런데….
"……."
아리아는 나오지 않는다.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안정되리라.
그렇게 여기며. 이그네스 엠프레스는-
"이그네에에에에스!!!!"
소란을 찢으며 다가오는 목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