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DS 본사 사장실. 평소엔 아이들이 노닐 때 외에는 조용한 편인 이곳에선 지금 큰 고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당장 지정을 철회하세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벌써 몇 번이나 나눈 이야기일 텐데요.>
“이그네스는 마법사입니다! 매지션 레이지 지정도 아니고 디제스터 지정이라니. 제정신입니까?”
<그건 당신의 판단이고, 우리의 판단은 다릅니다. 애초부터 유그드라실은 이그네스를 디제스터로 지정했었을 텐데요.>
통신기를 통해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천후는 이를 갈았다.
“그러니 그게 대체 무슨 기준이란 말입니까? 바로 얼마 전까지 집에서 같이 살았던 사람을 디제스터 취급하다니!”
<우린 그 둘을 동일 개체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뚜둑. 그 말을 듣는 순간 천후의 마지막 인내심이 끊겼다.
“동일 개체가 뭐 어쩌고 어째? 그게 지금 사람 상대로 하는 소린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지금 저희가 말하는 대상은 천급 디제스터 ‘엠프레스 이그네스’입니다. 미스터 DS. 흥분하신 모양인데. 레이드 일정이 잡힐 때까지는 진정하셨으면 하는군요. 그럼 연결을 끊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그드라실 직결 통신기의 연결은 정말로 끊겼다.
“으. 아아아아아! 씨바아아알!”
콰아아앙! 소리를 내지른 천후는 그대로 책상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고급 원목을 사용한 책상은 그 일격으로 삐거덕거리면서 흔들렸지만, 그의 신경은 그런 것에 가지 않았다.
천급 디제스터.
디제스터가 등장한 이후,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던 위계였다. 바로 그 판정이 이그네스에게 매겨졌다.
멸급 디제스터만 해도 한 국가의 모든 일리미네이터들이 죽네사네해야 잡을 수 있는 괴물이었다. 천급 디제스터는 유례가 없었으며, 그 강함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유그드라실의 판정 하나로 이그네스는 인류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살 해야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
‘멸급 디제스터 이그네스’의 상위 개체로 판단된다는 식으로 그들은 이그네스에게 ‘이그네스 엠프레스’라는 명칭을 부여하고서 모든 정규 공격대와 전 지구 모든 국가에 협조 공문을 뿌린 상태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제기랄!”
당장 엊그제까지 리미터를 거래하던 놈들이, 엘모세와트를 뿌리 뽑기 위해서 손잡고 싸우던 놈들이 갑자기 보이는 태도에 천후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부터 뒤가 구린 놈들이긴 했지만, 이 태도 변화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에게 디제스터 지정을 내리면 천후가 반발할 걸 모르지도 않을 놈들이 말이다.
“내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이러는 이유가 대체 뭐야! 젠장!”
게다가 이그네스에게 디제스터 딱지를 붙였으면, 그녀와 최전선에서 교전해야 할 당사자가 바로 영천후 본인인데, 잘도 말에 따라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정신이 나갔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헉…. 헉….”
영천후도 어디까지나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이뤄놓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려 드는 미친놈들과 마주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라즈베리의 실종은 그의 멘탈을 산산조각 내놓았다.
게다가 이번엔 이그네스까지 이런 일이 생기다니.
가장 버티기 힘든 것은 그 모든 현장에 자신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사회적인 지위가 어쩔 수 없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그 잠깐의 빈틈은 치명상으로 작용했다.
무력함이 그를 감쌌다. 분명 지금까지 이룬 것이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벌판이나 다름없었다.
그 모든 것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 위에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자, 천후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번에도…. 이번에도 어설펐던 건가?”
대한민국의 공권력을 믿었었다. 시민들이 그에게 보내는 지지를 믿었다. 설마 서울 한복판에서 폭약을 사용하거나, 총기로 무장한 인간 수십 명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고, 무인도라도 하나 사서 거기에 틀어박혀서 가족끼리만 오순도순 살아야 했나?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관여하지 말고?
폭력이 가족과 지인을 습격하는데, 자신은 그 정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것은 곧 공포로 다가왔다. 그 공포에 순응해서 숨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있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
약한 마음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어 와 그를 좀 먹어갔다. 천후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두껍고 단련된 손은 그러나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그는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감정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보일 순 없었다. 간신히 이겨낸다.
이겨낸 이후 찾아온 것은 회의감이었다.
“결국엔 이렇게 나온다 이거군….”
큭 하고.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떨리던 눈꺼풀은 진정되었고, 풀려있던 눈매는 이제 차갑고 날카롭게 변해있었다.
이그네스 건으로 한 번 대립을 한 이후로…. 언젠가 이런 식의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었다. 천후가 이그네스를 무조건 보호한 것 역시 그 연장 선상이었다.
이그네스를 자신의 곁에 꼭 데리고 있지 않으면, 이것들이 대체 무슨 짓을 꾸밀지 짐작도 가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어렸을 때 받았던 대우를 그녀가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조치는 그 선을 아주 가볍게 넘어버렸다.
천후는 내심 그들과 연계도 하고, 텔레포테이션 시스템 인프라 구축 등을 통해 교섭을 진행하면서 나름대로 관계가 개선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전혀!
정작 자신들이 요구당하는 입장이 되자 그들은 그 어떤 것도 수용하지 않았고, 중요한 질문엔 아무것도 답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천후에게만 유독 심했고, 날카로웠으며,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똑같이 적용되었다. 아마 지구에서 가장 위대한 슈퍼 히어로 취급을 받아도 똑같지 않을까?
천후는 이번 사건으로 그들이 보인 태도에서 그것을 확신했다.
“하. 하하하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광소다.
그래도 기억이 있었던 후부터 계속 지내온 곳이니까.
부모와도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지내고 있는 곳이니까 하는 생각으로 유지해왔던 스텐스가 깔끔하게 박살 났다.
그런 감상적인 걸 생각하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그들은 아니었고.
그럼 이건 협조관계도 뭐도 아니다.
그냥….
“호구지.”
그 결과가 이거다. 껄껄껄 하는 웃음을 흘리며 천후는 술을 찾았다. 양주 몇 개 정도는 사장실 안에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천후는 그중 하나를 병째 입에 물고서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쨍그랑.
병 깨지는 소리가 그 안에서 울렸다.
*
“희주야. 어때?”
“…….”
셀레나는 희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한숨을 내쉬었다.
이그네스가 천급 디제스터 판정을 받은 이후. 완전히 멘탈이 무너져버린 천후는 아무도 사장실에 올라오지 말아달란 말만 남기곤 틀어박혀 버렸다.
자신의 회사와 가족은 테러를 당하고, 자신과 비슷한 체질이라 생각해 거둔 아이는 그 결과 폭주해버렸으니 당연했다.
걱정된 희주나 셀레나는 가끔 올라가 보았지만, 그때마다 잠시만 혼자 있게 해달라는 말만 듣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하아…. 이럴 때 혼자 있어도 좋을 건 없는데.”
“그래도…. 남자분들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저러다 몸 상하겠어.”
가끔 올라가보면 깨진 술병들이 한가득 굴러다니고 있었다. 거기서 반쯤 풀린 눈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매일 보던 그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상황이 커지고 있어서 저러고만 있을 수 있을 수가 없는데. 하아….”
셀레나의 입에선 한숨이 터져 나왔다. 서울에서 남하한 이그네스는 아예 대한민국을 벗어나 점점 남쪽으로, 뉴기니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디제스터 판정이 내려져서 망정이지, 매지션 레이지로 판정 나고 그녀를 보호하고 있던 것이 천후였다는 식으로 전개되었으면 오히려 입장은 더 나빠졌을 것이다.
“퇴치는 몰라도 일단 어떻게 행동할지 다른 정규 공격대와 의견은 나눠봐야 할 텐데 저런 상태면 어쩔 수가 없잖아.”
“그렇지요.”
유그드라실과 각국 정부, 정규 공격대는 영천후를 계속 콜링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에서 귀를 틀어막고 잠적한 상태였다.
인류에게 닥친 미증유의 위기라 판단하여 안소니 크라우저가 노블레스 클럽 전원을 소집한 지금 상황에서 잠적이 길어지는 건 결코 좋은 판단이라고 할 순 없었다.
허나 이 자리에서 지금 당장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희주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천후는 아직 틀어박혀 있는 건가?”
“아. 강호 언니.”
당일 큰 화상을 입어서 유그드라실에서 치료를 받고서 내려온 이강호는 둘이 위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서 있는 걸 보고서 상황을 파악했다.
“그게…. 아무래도.”
“음. 그럴 테지. 하지만 지금은 잠시 만나봐야겠다.”
“그야…. 올라가는 것 자체를 가지고 뭐라고 하진 않지만.”
“그거면 됐다.”
고개를 끄덕인 강호는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의 후각엔 짙은 알코올 냄새가 잡혔다.
“어지간히도 마셨구나.”
“…나가줘.”
“그럴 순 없다.”
“나가줘, 제발…. 때 되면 내 발로 걸어 나올 테니까….”
그녀들이 걱정하고 있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주 조금 시간이 더 필요할 뿐이었다.
“나도…. 마음 정리할 시간은 필요해. 부탁이야. 제발. 혼자 있게 해줘.”
“그걸 방해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너에게 보여줘야 할 게 있어서 말이다.”
“…….”
강호가 고집이 있는 편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물러서지 않을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굳이 이야기를 꺼내자, 천후는 천천히 고개를 그녀에게 돌렸다.
그 후 한숨도 자지 않고 술만 입에 댄 탓에 그의 두 눈 아래는 퀭하니 움푹 파여 있었다. 그걸 안쓰럽게 바라보던 강호는 힘없이 들린 그의 손을 가져와, 그 위에 무언가를 올렸다.
“이거.”
“…….”
그것은 루비였다. 형태를 보자마자 어떤 루비인지도 기억이 났다. 그녀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것. 천후는 놀라 강호를 올려보았다.
“어떻게 이걸?”
“그녀가 떠난 후에 자리에 남아있었다.”
“…남아있었다고?”
눈매를 찌푸린 천후는 그 루비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마력 통제가 안 되는 이그네스의 몸에 계속 닿아있었으면서도 아무런 변형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루비는 가열 정도에 따라 잔류물이 남기 마련인데, 이것은 천연 루비의 자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것이니,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해서.”
“어…. 선배. 고마워.”
강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간단하게 대답한 천후는 그것을 몇 분이나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방금까지 폐인 꼴을 하고 있던 천후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왜, 왜 그러냐? 뭐 신경 쓰이는 부분이라도 있는 거냐?”
“응…. 선배. 이거 반지랑 체인은 어떻게 됐는지 알아?”
“완전히 녹아있었다만.”
“그래? 그렇단 말이지….”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멍한 목소리로 대답한 천후는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빠릿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외쳤다.
“선배. 셀레나에게 비행기 편 좀 알아봐 달라고 해줘.”
“비, 비행기 편? 아. 뉴기니 말이냐? 그쪽이라면 굳이 비행기가 아니라 큐브 엘리베이터를 사용해도…….”
현재 이그네스가 향하고 있는 곳이 바로 뉴기니였기 때문에 강호는 자연스레 그쪽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말에 천후는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아니? 뉴기니를 내가 뭐하러 가?”
“응? 그럼?”
강호의 질문에, 천후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영국 좀 다녀와야겠어.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