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천급 디제스터 선포>
늦은 밤. 넓은 트윈 베드에서 한 사람이 상체를 일으켰다.
“…….”
적발적안의 소녀. 이그네스였다. 그녀는 옆자리에서 함께 잠들어있는 여성, 이강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특성은 잠든 사이에도 발휘되어서 이그네스가 마력동화로 화염마인으로 변하는 것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동생, 혹은 딸이나 다름없는 이브와 에바 역시 많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그녀들은 이그네스의 사정을 간략하게 말해주자 어른스러운 척을 하며 강호를 넘겨주었다.
“흠! 우린 괜찮아!”
“어디 다친 거 아니니까!”
가슴을 통통 두드리며 하는 그 말에 얼마나 마음을 치유 받았는지 모른다. 비록 그것이 완전한 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할지언정.
고마움 투성이다. 그렇지만.
이그네스는 천천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수면등까지 꺼져서 빛이라곤 없는 방안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그 빛의 발원지는 그녀였다.
그녀의 몸에서 아주 희미한 적색 빛이 흘러나와 방안을 밝히고 있었다. 그걸 내려보던 이그네스는 가만히 심호흡했다. 그러자 그제야 빛이 잦아들면서 꺼져갔다.
이그네스는 이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완전히 억제되지 않고 있구나.’
이강호의 진리구현자 특성으로도 무리다. 마법사의 마법이나, 디제스터의 초자연적 능력 대부분을 무효화시키는 능력자가 옆에 있음에도 완전히 억눌러지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이그네스 자신이 의식을 집중하면 보통과 비슷한 상태가 되지만, 정신상태가 조금만 흔들려도 이렇게 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이들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그네스는 잠시 강호가 잠들어있는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완전히 잠들어있었다. 그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이그네스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가 나지 않게 호텔 방문을 여는 것은 꽤 힘든 것이었다. 복도로 나온 이그네스는 길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옆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이 잠들어있는 문 앞이었다.
이그네스는 몇 번인가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떨렸다. 그렇게 몇 번인가 깜빡이자…거기에서 물방울이 흘러나와 뺨을 타고 흘렀다.
“아….”
마지막으로…. 한 번은 보고 싶다. 그 생각에 이그네스는 자기도 모르게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이 문은 카드 키가 없으면 안쪽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 그것을 깨달은 이그네스는 손을 뗐다.
그리고.
“후. 후후…. 무슨 생각을.”
단지 그 이유뿐 아니라…. 만나서는 안 된단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 눈앞에 있었다. 그녀가 잡았던 금속 문고리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변형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잠깐 감상적인 생각을 했을 뿐인데 힘이 방출되어버린 것이다. 그나마 강호가 근처에 있으니 이 정도지, 그녀가 없었다면 다시 한 번 아리아를 내지르며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으리라.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만나려고 하다니. 무슨 염치란 말인가. 이그네스는 그 마음을 접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지금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걸지도 모르지.”
입에서 나온 말엔 달관이 짙게 깔려있었다. 그에게 구해진 바로 그 날부터 예견되어있던 일.
그의 조력과 노력이 없었다면 이미 진작 벌어졌을 일에 지나지 않았다. 때가 조금 늦게 온 것뿐.
아아. 그렇다 해도 고마웠다.
그렇다 해도 즐거웠다.
이 짧은 시간 동안 겪은 추억들이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과 어울리는 게 싫지는 않았다. 아이 흉내를 내야 했던 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 정말로 그랬다.
그러나. 이제 이것도 끝.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떠나자. 이곳을.
뜨거워지는 몸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그녀는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
“어딜 가는 거냐?”
엄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목소리의 주인은 쉬이 알 수 있었다. 이그네스는 돌아보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깨어있었구나.”
“정확힌, 깼지.”
이강호는 영천후처럼 마음만 먹으면 어떤 상황, 어떤 장소에서도 잠을 청할 수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극도로 민감해서 주변 상황이 변화하면 바로 눈치를 채고 잠이 깨곤 했다. 이번의 경우 이그네스가 상체를 일으킨 그 순간부터 이미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워낙 심각한 사안이었으니 말이다.
침대에서 벗어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화장실이라도 가는가 싶어 그냥 놔뒀지만, 그녀가 방에서 아예 나가버리자 강호는 바로 무장을 챙겨서 이그네스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나 확인한 것이 있었다.
“힘이 흘러나오고 있군. 그것 때문에 떠나고자 하는 거냐?”
“…그래.”
강호에게 있어 이그네스가 발휘하는 현상은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이전, 영천후의 몸을 검을 완전히 꿰뚫었을 때. 분명 특성이 발휘되고 있는데도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최완 역시 그녀의 영향력 아래에서도 이그네스의 상태를 체크한 적이 있었다. 뭔가 그 사이에 기준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것에 대해선 아직 강호 역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그녀의 힘이 제어되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였다. 강호는 최대한 톤 변화 없이 말했다.
“일단 너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영향을 받는 모양이니, 조금 더 시일을 두는 게 어떠냐?”
매달리지 않는다. 너의 뜻은 존중한다. 하지만 차도를 볼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최대한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만할 말을 골라서 조심스럽게 입 밖으로 낸다. 강호가 보기에 지금 이그네스의 상태는 아주 불안정했다. 힘이 흘러나오고 어쩌고 이전에, 정신적으로 몰려서 어떤 극단적인 선택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랄까?
차라리 자기가 소중해 미칠 것 같은 이들이라면 이럴 때 걱정할 것이 없다. 그들은 어떻게든 상태를 호전시키려고 알아서 최선을 다하니까. 다른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끄는 것 정도는 별것도 아니다.
이럴 때 가장 무서운 사람은 달관한 사람이다. 자신의 삶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이 눈앞의 작은 아이의 몸을 한 적발의 주인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몸을 돌리고 있는 소녀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그제야 몸을 돌려 마주 봐온 그녀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시일. 시일이라. 몇 달 동안 방법이 없었던 것이 하루아침에 무엇이 바뀐다는 게냐?”
적색의 눈동자에 광점이 보이지 않는다. 강호는 그것을 보고 텅 빈 그릇을 본 것 같다고 느꼈다.
“나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보아라.”
이그네스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붉은 오오라가 그녀의 팔을 따라 움직이며 주변 온도를 갑작스레 올렸다. 그걸 보고 강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름대로 마음을 가다듬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상태인데도 주변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갑자기 떠날 마음을 먹은 이유 그 자체였다.
“이것뿐이 아닌 게야. 점점…. 머리가 뜨거워지는구나. 지금은 어떻게든 견디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어찌 될지 모르겠다. 그 전에 여기서 나가야 할 게다.”
잠시만 다른 생각을 하면, 자신이라는 작은 편린이 쓸려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것을 간신히 다잡고 있었지만, 이그네스는 그것도 곧 한계에 다다를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자신이 화염마인으로 화하는 때이리라.
“나는…내가 얼마나 큰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지 알고 있느니라. 하물며 너희와 아이들이 머무는 이곳에서 일이 커지길 바라진 않는구나. 아니면….”
이그네스는 강호가 가지고 나온 칼. 난화와 난정에 흘낏 시선을 던졌다.
“그걸 써줄 테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니…. 진심이다. 아직 완전하지 못한 지금 상태라면 분명 해낼 수 있겠지. 그러니….”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말아라!”
버럭하고 성을 낸 강호는 차고 있던 검들을 내려놓고는 이그네스의 팔목을 잡아챘다. 그러자 이그네스를 잡은 손에서 치이익 하고 살 익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무슨―”
“이미 연락은 해뒀으니 곧 천후가 올 거다. 정 안되면 일시적으로 널 가둬둘 시설이라도 만들어 볼 테니 잠시만 기다려다오!”
“…….”
절박한 목소리에 이그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미 호텔 내부에 연락이 돈 걸까? 복도에는 어느새 경비요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조금 더 지나면 천후나 희주, 셀레나까지 모여들 것이다.
아아. 이들은 정말로 자신을 생각해주고 있었다. 정말 터무니없이 착한 녀석들이다. 괴물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위해 여기까지 해주다니.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눈물은 나오고 있었다.
적색 눈동자가 일렁이며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그것이 턱선까지 가기도 전에 기화되어 말라버리는 것을 느낀 이그네스는 통감했다.
바로 그래서 이곳에 더 있어서는 안 된다.
이들에겐 고마울 따름이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다니. 이런 기적은 다시 겪기 힘들겠지.
“감사한다. 그동안 정말로 고마웠다.”
“이그네스!”
“이런 기적을 준 너희에게. 더는 폐를 끼칠 순 없다. 괴물은 괴물인 게야. 사람이 될 순 없다. 그래도 이 얼마간….”
분홍 입술이 잠시간 멈췄다가. 간신히 마지막 말을 자아냈다.
“사람으로 대해줘서 고마웠다. 안녕.”
화륵!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몸이 불꽃에 휩싸였다. 이강호는 그래도 손을 놓지 않으려고 했지만, 순간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무형의 충격파에 붕하고 뒤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큭!”
그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눈을 부릅뜬 이강호는 땅에 떨어진 난향을 주우며 컴벳 캐스팅으로 자신에게 강화마법을 걸었다. 엘리베이터 문째로 잘라버리고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콰아아아아앙!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폭음과 함께 커다란 진동이 건물 전체를 흔들었다. 순간 이강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서컥! 단숨에 엘리베이터 문을 베어내 버린 강호는 엘리베이터 박스가 박살나있고, 그뿐만 아니라 통로 저 위의 천장까지 구멍이 뚫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아….”
강호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결국은 떠나버리고 말았다. 망연자실해 강화마법을 풀어버린 그녀는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떠나버리면…. 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게냐?”
결국엔 그녀를 통제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영천후의 곁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억지하는 데 가장 좋은 환경이었다. 그녀를 위한 무슨 수가 나와도 이곳보다 빠르고, 제대로 나올 곳은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떠난다는 것은 곧 자신을 되찾지 못하고서 불꽃의 마인으로 살아가겠다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 천장을 올려보던 강호의 발치에 무언가가 닿았다. 박스 상단을 구성하던 유리나 철근은 완벽하게 녹아내려, 엘리베이터 박스 안에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파편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닿는 것이 있다니?
흠칫한 강호가 내려다보니, 거기에는 붉은빛을 띠는 보석이 있었다.
언제나 이그네스가 지니고 다니던, 엘리제 3세로부터 받은 루비.
그것이 반지 몸체나 은제 체인은 사라지고 보석만이 남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이그네스….”
강호는 그것을 조심스레 주워들어, 소중히 손안에 품었다.
*
뒤늦게 현장을 찾은 천후는 눈앞에 일어난 현실에 망연자실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뛰쳐나간 옥상에 선 그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고 덜덜 떨었다.
‘무력하다.’
너무나 무력해. 단 한 번의 실수로.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 또 이렇게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성이 휘발될 것 같았다.
“데려오겠어.”
“천후야.”
“데려오겠어! 제길! 내 곁을 떠나봐야 아무런 수가 없잖아!”
호텔을 떠난 이그네스는 곧 완전히 화염마인으로 변하여 서울 하늘을 밝게 물들이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남하하고 있긴 했지만, 그가 전력을 다하면 따라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강호는 슬픈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간다 해도 방도가 없는 건 똑같다.”
“그렇지만!”
이대로 가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였다. 최악의 사태가 되리라.
그리고…. 그 최악의 사태는 빠르게도 찾아왔다.
<천후야! 유그드라실에서 이그네스에게 천급 디제스터 판정을 내렸어!>
휴대전화를 통해 들려온 셀레나의 말에, 천후의 눈에서 번개가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