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2월. 영국은 추웠다. 올해 추위는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것이었다. 눈도 빈번하게 내려서 몇 년 만에 최고의 강설량을 기록할 수 있었다.
"후우…"
낮은 한숨과 함께 창에 흰 김이 서렸다. 방금까지 내려다보이던 백은에 뒤덮인 세계가 그 입김 덕에 잠시 가려졌다. 숨을 내쉰 소녀는 따로 그 입김을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이그네스. 화마의 이름을 가진 적발의 소녀는.
"곧 도착하니 벨트를 착용하시지요."
"…그러마."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그네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제 모습을 되찾은 창에 흑발의 여성이 그 모습을 비췄다.
차분한 인상의 여자였다. 외관만 보자면 까마득한 연상의 여자.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만난 직후부터 늘 극존칭으로 자신을 대해왔다. 아니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대했으며, 자신이 편히 불러도 개의치 않고 받아줬다.
말은 안 했지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라 안전벨트를 착용한 이그네스는 그러다 다시금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에 덮여있던 지상은 이제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오랜만이다. 이곳에 돌아오는 것은.
그것에 자신이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지만….
이그네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비행기가 내려앉았다.
*
"무슨 생각이냐? 영국에 가자니? 이제 와서…."
"그렇지도 않아. 널 막 구해왔을 땐 경황도 없었고, 차분하게 둘러볼 시간도 없었잖아. 그러니 또 모르지. 뭔가 생각날지도."
"……."
"어쨌든 영국은 네 고향이 맞는 것 같으니까.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웃으며 하는 말에 이그네스의 눈썹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나.'
답지 않게 조급함을 느껴버렸다. 그래서 조금 답답한 마음을 표현해버렸는데, 그것이 염려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빚만 늘어날 뿐이다.
확신 없는 투자는 낭비일 뿐. 간다 해서 뭔가 성과가 나오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녀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곁에 앉은 천후가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아이들의 머리를 만질 때와는 다르게 옆에서, 목덜미 부근부터 가볍게 쓸어넘긴다. 그 때문일까? 이전 같으면 무의식적으로 쳐내버렸을 그의 손은 무사히 불꽃의 폭포를 만질 수 있었다.
그녀의 특성에 영향을 받은 머리칼은 그 자체만으로도 따듯했다.
"가보자. 나도 마침 쉬고 싶었어."
"…널 하루라도 쉬게 하는 건 세상에 민폐를 끼치는 기분이다만."
얼마간 세상 물정을 알아가면서 이그네스는 일리미네이터가 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중 영천후가 어떤 인물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그의 시간은 천금을 줘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독대를 다른 사람이 받으려면 얼마나 큰 노력을 해야 할지 이그네스로선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녀의 답변에 웃어버린 천후는 가볍게 말했다.
"이그네스는 정말로 어른스럽네. 그런 거까지 신경 쓰고. 애처럼 굴어도 되는데."
"시끄럽다."
"그러지 말고 한 번 가보자. 지금 이렇게 설득당하는 시간도 아깝지 않아?"
"……."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이그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도 은근히 고집이 센 부분이 있어서, 자기가 그러겠다 한 것에선 죽어도 타협하지 않는 면이 있었다. 아무래도 영국행은 확정된 모양이었다.
"그래, 뭐… 가자꾸나. 까짓 영국. 못 갈 것도 없겠지."
"하하. 잘 생각했어."
참 속도 좋은 녀석이다. 이그네스는 구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후의 사정에 대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그녀에게 가지는 동질감이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 편린을 볼 때마다, 그녀는 그에 대한 고마움이 조금씩 사무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건 말하자면….
세상에서 정말이지 유일하게.
자신을 인간으로 보고 있다는 증명과도 같아서.
*
천후는 처음엔 이그네스와 단둘이 다녀올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곧 마음을 바꿔서 희주를 대동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이그네스랑 단둘이 다니면 눈에 너무 띌 거 같네요."
"네. 단둘이 계실 때 신분이 밝혀지면 더욱…. 곤란해질 겁니다."
말은 그냥 곤란해진다로 끝냈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훤했다. 이그네스는 일단 영국정부의 주선을 받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와있는 몸이었다.
체류하고 있는 동안 그녀의 신병을 천후가 보장한단 식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단둘이 영국에서 여행하고 있는 게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그러다가 부주의하게 숙소라도 같은 방이라도 잡는다면…. 아주 재미있는 의혹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전 세계적으로.
그렇지만 곁에 여자가 있는 상황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럼 이제 학교가 쉬는 동안 고향에 함께 놀러 와준 훈훈한 미담으로 덮을 수 있게 된다. 괜히 오해받을 일도 없어지고 말이다.
덕분에 여행은 셋이 오게 되었다. 천후의 경우 선글라스나 옷차림, 목도리 등으로 얼굴을 가렸고, 이그네스의 경우 눈에 띄는 적발을 최소한만 드러냈다.
대외적으로 얼굴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희주 만이 완전히 드러낸 채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럼 어디 먼저 가볼까? 웨스트 민스터 사원?"
"글쎄다…. 내가 처음 발견된 곳이 그곳이라고 하니. 가보는 것도 괜찮겠지."
"오케이. 출발."
공항 택시에 탑승한 천후는 행선지를 불러주고는 몸을 실었다. 영국의 택시비용은 끔찍할 지경이었지만, 여기서 그걸 신경 쓸 사람은 뒷좌석에서 미터기 올라가는 걸 보고 표정이 굳은 이그네스 하나밖에 없었다.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군."
이그네스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택시 운전사가 그걸 들었는지 답해왔다.
"날이 워낙 추우니까, 꼬마야. 눈도 내리고 말이다."
말마따나 조금씩이나마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세진 않지만 기온 자체가 낮아서, 굳이 눈 맞으며 돌아다녀야 할 이유가 없다면 밖에 나오기 싫을 만도 했다.
"……."
꼬마라는 말에 이그네스는 움찔 반응했지만, 옆에서 희주가 잡아오는 손길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항에서 웨스트 민스터까진 거리가 있어서, 그동안 런던 시내를 두루 돌아볼 수 있었다. 창을 통해서 바라본 거리는 아름다웠고, 잘 정돈되어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런 느낌만을 주었다.
아무것도 낯익지 않다. 보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처음 보는 이 느낌은 신기하다는 감상일 터였다. 이그네스의 표정은 굳어갔다.
그동안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해 일행을 내려주었다. 영국 왕가에 관한 모든 것이 있는 곳. 리얼 테마파크, 웨스트 민스터.
그중 웨스트 민스터 사원 앞에 도착한 천후는 택시에서 내리며 이그네스에게 물었다.
"춥지 않아?"
막 도착했을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로 쌀쌀했다. 하지만 이그네스는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열 변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녀는 추위에도 매우 강해서, 사실 지금 알몸이라 해도 추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희주의 몸이나 챙기거라."
"하하."
피식하고 웃으며 그의 입에서 김이 새어나왔다. 그동안 이그네스는 시선을 앞에 두었다. 오늘의 목적지에.
"…아직 다 지어지지 않았군."
점심을 조금 지난 시간. 이 추위와 날씨에도 인부들이 기를 쓰고서 공사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웨스트 민스터 사원은 이그네스가 폭주하면서 완전히 녹아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던전 경계 안에 있었던 수백 미터 안은 완전히 자연적으로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땅으로 바뀌었다.
허나 영국 정부는 그 땅 위에 다시금 사원을 세우고, DS의 이름을 본뜬 거리를 만들기로 했다. 다리에서부터 웨스트 민스터 사원까지 통하는 그 거리는 완성되어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다시 왕가의 묘역으로 쓰일 웨스트 민스터 사원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서 재건축되어야 했기에, 이제야 간신히 그 토대를 다지고 있었다.
과거의 아름답고 장엄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면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여겨지고 있었다.
"……."
공사현장 출입금지 테이프를 다가가 괜스레 만져본 이그네스는 멍하니 터를 둘러보았다. 이전에 있었던 기시감이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주변의 공원을 제 발로 걸었다. 근처의 땅도 전부 망가졌었지만, 그 위에 흙을 다시 깔아서 내년엔 제대로 된 공원이 될 준비를 해둔 것이 보였다.
자신의 과오와 마주 보게 된 그녀의 말은 극단적으로 적어졌다.
"주인님."
"음…."
그 기색을 눈치챈 천후는 희주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않다. 이것은.
좋은 의도로 데려온 것이지만, 오히려 그녀를 더욱 괴롭게 하고 말았다. 천후는 공원을 돌아보다 멈춰있는 이그네스에게 다가갔다.
"…다른 데로 갈까? 이야기하면 엘리제 여왕님을 다시 뵐 수 있을지도 몰라."
"바쁘신 분이 아니냐. 그럴 것 없다."
"……."
천후는 할 말을 잃었다. 비슷한 처지의 그라도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을 감상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녀의 입에서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궁이나 한번 보러 가자꾸나."
"그럴까?"
이전에 왔을 땐 버킹엄 궁이 익숙하다고 했으니 이번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화색을 보인 천후는 그녀와 함께 버킹엄 궁으로 향했다.
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일반인 개방 구역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기에 섞여서 셋은 궁 밖을 돌아다녔다.
사진 같은 것도 일절 찍지 않고, 그저 멀찍이서 본궁을 바라보며 그저 걸었다. 그러다….
"……."
어느 순간이었다.
그것은 버킹엄 궁 개방구역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나올 즈음. 이그네스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멎었다.
그 순간 눈을 머금고 있는 강한 바람이 불어와, 옷 안에 집어넣고 있었던 그녀의 불꽃과도 같은 머리칼을 강제로 뽑아내 자기들 사이에 물감처럼 섞었다.
순식간에 세상이 홍염으로 바뀌며, 바람에 맞춰 사방에 번져나간다.
간신히 머리에 걸쳐있던 모자를 벗은 그녀는 완전히 바람에 자신을 맡긴 채, 말없이 궁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침묵이 심상치 않아, 천후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그네스."
"후후."
들려오는 것은 웃음이었다. 낮은 웃음. 가벼운 웃음. …달관한 웃음.
"나도 어리석구나. 무엇을 바랐단 말인가…."
목소리에 섞인 것은 자조였다.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천후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충분히 상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상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이그네스…."
이럴 때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천후로선 알 수 없었다. 곁에 다가가니, 그 눈동자는 흩날리는 앞머리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단 한마디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춥구나…."
"……."
"너무나도…."
톡.
깃털처럼 가벼운 그녀의 머리가 그의 가슴께에 닿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은 없었다. 차라리 울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녀는 우는 법을 잊어버린 양 울지 않았다.
그저,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지금껏 꼿꼿이 유지해오던 높은 자존감이 지금 이 순간, 아주 잠시 꺾여서….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타인에게 기대보고자 하고 만다.
천후는 기꺼이 가슴을 빌려주기로 했다.
홍염이 나부낀다. 소녀는 흐느낌 하나 없이 그저 눈을 감은 채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곳에 와도.
이런 곳에 와도.
자신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현실을.
그녀는 자신이 과거와 완전히 단절된 인간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11살 외양의 소녀. 이그네스일 뿐이라는 것을.
============================ 작품 후기 ============================
요즘 날이 너무 춥네요.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전 당분간 밖에 나가지 못하는 몸이 되어서 면역입니다만(..) 그래도 춥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