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다크 드래곤 슬래쉬!>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냥 PV영상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고, 그와 동시에 진행될 콜라보네이션 상품들…, 오리지널 코믹 북 콘티에서부터 게임 캐릭터 초안까지 쏟아져나왔다.
지금은 3D로 구현된 캐릭터가 기술명을 내지르는 것을 보고 있었고…. 천후는 오열했다.
"이게 뭐야아아아아아…."
죽겠다…. 죽겠어…. DS라고 타이틀 달고 다니는 것도 부끄러운데 이건 그걸 비웃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일단 캐릭터 디자인부터가 자기랑은 완전히 달리, 오른손에 웬 붕대를 두르고서 그걸 풀면서 기합을 지르면 거기서 검은색 용이 장풍으로 나가는데, 너무 오그라들어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강호의 경우엔 실제로 하고 다녔던 남자 한복 복장을 하고 있다가, 필살기 등을 발동시키면 삿갓이 하늘로 날고 머리가 풀리면서 큰 컷인이 딱 박히다가, 다시 돌아오는 컨셉이었다.
단박에 넉다운된 둘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입을 딱 벌리고 축 늘어졌다.
"오. 오오오오. 이 재현도! 과연 프로는 다르지 말입니다!"
한편, 아이디어 제공자였던 라즈베리는 눈에서 빔을 쏘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자신의 망상을 아주 완벽하게, 아니 120% 이상 재현해준 결과물에 흥분한 것이다.
"싸부! 이건 팔림다! 대박 날 검다!"
"……."
이 말에 대체 어떤 말로 대답을 해줘야 한단 말인가. 천후는 핼쑥한 얼굴로 어버버 거리다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폐기."
"네?"
"폐기야, 폐기! 이런 걸 어떻게 팔아!"
캬오오. 도저히 참지 못하고 폭발한 천후가 입에서 불을 내뿜었다. 쪽팔리게 하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대체 뭔…. 뭔 생각이야. 날 쪽팔려 죽게 만들 생각이냐?! 아니, 생각해보니까 얼마 전에 사고 쳐도 봐달라고 한게 이거의 복선이었냐?!"
"아하. 들켰어?"
"아오, 이 여자가!"
도끼눈을 뜬 천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양 관자놀이를 엄지로 꽉 눌렀다. 그러자 셀레나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꺅! 아파! 잠깐만! 이거 나름 진지한 프로젝트야!"
"나도 진지하게 싫어!"
살면서 지금 이 순간만큼 진지해 본 적도 드문 것 같았다. 정말로.
"그리고 이게 어떻게 진지한 프로젝트야! 이걸로 돈이 벌리겠냐?! 문화산업 무시해? 만만해 보이냐?"
부들부들. 성질이 나서 외치자, 셀레나는 갑자기 급 정색을 하며 말했다.
"벌려. 원래 대자본이 들어가면 어지간하면 평타는 치게 되어있어."
"……."
갑자기 나온 진지한 목소리에 소름이 다 돋았다. 덕분에 천후가 잠깐 움찔하자 그 사이에 앞으로 쇽 빠져나온 셀레나는 하나하나 설명했다.
"일단 시작은 DS 가디언즈 애니메이션이랑 코믹스 동시 시작. 내년 하반기에는 게임이 나올 거야. 이건 온라인 게임이랑 콘솔 게임이 시간차를 두고 같이 나올 거고. 일본, 미국, 영국에 동시 발매되는 걸로 이미 이야기가 끝나있어."
"으아…."
일을 얼마나 크게 벌여둔 거야. 천후의 안색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하지만 셀레나는 부연설명을 했다.
"이건 이미 성공 케이스가 있는 일이야. 안소니 크라우저를 모티브로 딴 아메리칸 코믹스가 이미 있어. 그쪽에 묻어가는 식으로 합류하려고 하거든. 미국 쪽은."
"이 부끄러운 짓을 이미 했다고?!"
"응. 요는 친밀감이라 이거지. 다음 세대부터는 친근한 우리들의 히어로~ 정도로 마법사를 받아들일 수 있게끔 저변부터 다져가는 작업이랄까."
"…그럴싸하게 들리게 하려는 거지, 지금?"
셀레나는 그 소리에 베시시 웃을 뿐이었다. 그걸 보고 떨떠름하게 눈썹을 꿈틀거린 천후는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아. 싫은데…. 으…. 선배도 뭐라고 좀 해봐요."
"응? 으음. 아니. 생각해보니 내가 안보고 신경 꺼버리면 되는 문제 아니냐? 상관없을 것 같다."
"……."
심플도 하셔라. 분명 저러다 한번 크게 후회할 텐데. 혀를 내두른 천후는 이번엔 희주를 바라보았다. 내용을 보니 희주도 배역이 있던데….
"저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가상의 내용이니."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 캐릭터가 수정에 갇혀 있는 걸 주인공이 구해주는 장면을 몇 번이나 되돌려보고 있었다. 은근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슬쩍 셀레나 쪽을 보니 어째 입꼬리가 올라간 게 의기양양하시다. 희주가 이럴 걸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둘이 만난 지가 언젠데 이 정도 취향 파악도 안됐을까.
"크으윽…!"
고립무원. 주변에 아군이라곤 보이지 않는 상황에 천후는 힘겨워했다. 여기서 강짜를 부려서 캔슬할 수야 있겠지만, 보아하니 이미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라 정말 죄다 취소하면 손해가 클 테고, 일을 맡은 사람들은 무슨 죄인가?
천후가 초조해져서 끙끙거리고 있을 때. 셀레나가 밝게 웃으며 말해왔다.
"네가 그렇게 싫어할 거 같아서. 너를 직접 설득할 자료도 가져왔어."
"뭐라고?"
지금 나를 뭐로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눈매를 날카롭게 세워봤지만, 셀레나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으며 이번엔 다른 영상을 보여주었다.
눈에 들어온 것은 미취학 아동이 잔뜩 모여있는 어린이집이었다. 그 아이들이 한곳에 모여서 TV를 감상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방금 봤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화면이 지나갈 때마다 웅성웅성하는 모습과 재미있을 것 같다고 중얼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나왔다.
그 뒤 아이들 하나하나를 잡고서 하는 인터뷰 영상이 나왔다.
<재미있을 거 같아요!>
<언제 시작하는 거예요? 네?>
그 뒤론 좀 더 연령을 올린 초등학교, 학원 등에서 인터뷰 영상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그때마다 긍정적인, 가끔 뼈아픈 지적을 하는 아이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서도 진짜 제대로 나왔을 때를 기대하는 반짝이는 눈빛들이 보였다.
"……."
"어때? 이 정도로 기대받고 있다고."
"아오…. 넌 진짜 악마야."
순간 솔깃한 자신이 밉다. 아이들이 진짜로 좋아한다면야 뭐~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잠깐 이마를 짚었던 천후는 입을 어물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아. 모르겠다. 해라, 해. 대신에 제대로 만들어라, 진짜."
"응. 정말, 아~주 제대로 만들 거니까 걱정 마."
불길하다. 저 말이 너무 불길해. 순간 천후는 소름이 돋았지만,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는 손을 털었다. 아. 딱 한 가지만 빼고.
"이거 라즈베리 아이디어였다고, 원랜?"
"넵. 하지만 역시 프로는 다름다. 팔리게 만들었슴다."
"응. 그런데 그 아이디어에서 셀레나는 뭐였어?"
"핫?!"
순간 천후가 뭘 생각하는지 깨달은 셀레나가 라즈베리의 입을 막으려 들었지만, 그녀는 눈치 없이 입을 열었다.
"색기 담당이었지 말입니다."
"…오. 그래? 그런데 자기는 한 컷도 안 나오고 쏘옥 빠지셨다고? 오호라."
천후는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셀레나를 쏘아보았다. 움찔한 그녀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으으으."
"똑바로 만들어라. 응? 두고 본다, 내가."
"으으. 거의 다 넘겼었는데에!"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에 천후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나만 쪽팔릴 순 없지. 같이 죽자…!
*
그 뒤론 일사천리였다. 이왕에 한 번 부끄럽기로 한 거, 천후는 프로젝트가 어떻게 돌아가고,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현장을 직접 확인했다.
"흠…. 코믹스는 판매가 시작되고 난 뒤에야 작가한테 돈이 돌아가고, 에니매이션이랑 게임은 하청인가."
"응. 보통 그렇게 되더라고."
"그럼 이 사람들 전부 고용해서 DS 홍보팀으로 돌려."
"…엑?"
"어차피 할 거면 제대로 하자고. 음. 아니구나. DS 게이밍이나 DS에니매이션 만드는 게 더 낫나?"
"진심?"
"못할 것도 없잖아."
셀레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정말 못할 건 없었다.
"보니까 전체적으로 기간제나 파견직으로 일하는 사람들 천지던데. 나 은퇴 할 때까진 회사나 계열사에서 그런 일 없게 해. 보기 안 좋아. 프리랜서나 일부러 기간제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잘 챙겨주고."
"응. 그거야 신경쓰고 있어."
그 뒤. 업계에선 DS가 문화콘텐츠 사업에 신경 쓴다는 소문이 돌았다. 몇몇 회사를 합병하고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 등을 정식 채용해 그들이 조금씩 흘리는 이야기는 무서울 정도였다.
게다가 하는 김에 게임 프로그래머, 원화가 양성 과정까지 만들었는데, 들어가기만 하면 돈을 받을 수 있는데다가 아마추어 같은 경우엔 DS의 이름을 걸고서 화보집, 자작 게임들을 내주었다.
인디 게임 제작의 경우, 정식으로 게임 등록을 하기 위한 비용만도 부담스러운데 그걸 기업에서 내주는 것이다.
만화가나 게임 원화가 지망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한국 사이트를 따로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는데, 그중 상위권에 들면 또 따로 모아서 책을 내주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 측에선 별말도 하지 않았는데 심의비를 인하하고, 게임 규제를 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와. 지스타 보이콧 하려고 할 때도 꿈쩍도 안 하더니."
"역시 장난이 아니구나, DS는."
DS의 총 자본금은 국내 진짜배기 대기업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기업의 특성상 가지는 영향력은 막대했다. 벌어들인 돈 대부분이 영천후의 개인 사재가 되었는데, 그걸 별로 아까워하지 않고 뻥뻥 풀어대니 보고 있는 사람들은 눈이 핑핑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DS의 움직임에 제동을 건다는 것 자체가 사회 터부 수준이 된 상황이라, 그의 움직임을 막을 사람은 주변인들 외엔 전무했다. 여야 정치인을 가리지 않고 그를 욕되게 하는 시점에서 매장을 당할 수준이니.
덕분에 관에 못 박혔다는 컨텐츠 시장이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닌가 하는 희망적인 관측이 전문가들 사이에선 나오고 있었다.
"아. 이래저래 결국 한국에 돈을 많이 풀게 되네."
막상 본인은 그렇게 좋아하지만은 않았지만 말이다. 나라에서 당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물론 대한민국 정부에선 더는 그에게 터치하겠단 생각은 일절하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알아서 나라에 붓는 돈이 탈, 절세 후 그가 명목상 세금으로 낼 돈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다행임다. 싸부 덕에 이젠 한국 애니도 살아날 수 있지 말입니다."
"글쎄…. 그게 말처럼 쉽나?"
게임은 몰라도 유소년층이 만화나 애니메이션 볼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 빡빡한 교육 속에서 시간을 쥐어짜서 간신히 게임 몇 판 하는 게 지금 대한민국 어린아이들의 현실인지라…. 영상매체에 시간을 쓰는 건 대단한 사치였으니까.
결국 문화 산업이란 건 나라 전체에 여유가 있을 때나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라 전체를 덮고 있는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고, 그건 천후 혼자서 어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즈베리는 양 주먹을 꽉 쥐고서 말했다.
"괜찮슴다. 싸부가 죽기 전까진 살아나지 말입니다!"
"…죽을 때까지 돈 부으라는 거 아냐, 이 녀석."
순진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는 녀석이다. 몇 년지 대계야, 이게? 쓰게 웃은 천후는 그녀의 이마에 약하게 딱밤을 때려주고는 웃었다.
"아. 그래서. 저번에 말했던 건 준비 됐어?"
"저번에 말했던 거 말임까?"
"네가 좋아하는 거 보여준다며."
"윽…. 정말 괜찮겠슴까?"
"DS 가디언즈만 하겠어?"
그 어떤 오그라드는 걸 봐도 DS 가디언즈보단 양반이리라. 자기 자신이 손에서 용 모양 장풍을 쏴 재끼는 물건 아닌가.
"그건 그렇슴다."
납득했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인 라즈베리는 종종걸음으로 콜랙션 중 하나를 꺼내서 재생했다.
그날….
천후는 세상은 넓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손을 없애버리는 것이 컨텐츠 산업의 본질이 아닌가 의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