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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11화 (211/324)

211화

천후의 가족들은 신년을 이 별장에서 지냈다. 필요한 건 거의 다 마련되어있는 곳이었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아웃도어 파인 천후는 매일 하는 운동을 한 이후에는 강가에서 낚시를 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리 성과는 없었지만 말이다.

아이들은 개나 말하고 씨름을 했고, 다른 이들도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곤.

"으…으으…. 블루레이…. 블루레이가 필요함다…."

"뭐하는 금단증세냐?"

"만화…. 애니…. 드라마…. 이곳은 저에겐 지옥과도 같은 곳. 으으…."

주방에는 오븐에 전자렌지에 냉장고가 다 들어 있었지만, TV는 중앙 거실에 하나 덜렁 있는 이곳은 매체 중독자인 라즈베리에겐 너무나도 가혹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특유의 불면증 때문에 야밤까지 깨어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동안 볼거리도 없으니 자는 이그네스의 머리카락 꼬기. 자는 이그네스 발가락 간지럼 피우기, 자는 이그네스 옆구리 찌르기 등 엄청난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후우. 도저히 못 살겠다. 어서 돌아가자꾸나. 이런 곳도 좋지만 말이다."

적당히 잠들만 하면 저러니 같이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던 이그네스는 결국 참다 참다 못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그네스 역시 이런 분위기의 별장은 좋아하는 쪽이었지만, 이러다간 그녀도 불면증에 시달릴 판이었다.

"음. 슬슬 그럴까, 그럼."

나흘 동안 낚시의 정령이 되어있던 천후는 아쉽다는 듯이 낚싯대를 내려놓았다. 맘 같아선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슬슬 아이들도 즐길 거리가 떨어져 가고, 셀레나도 귀국하면 일이 쌓여있을 거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가시…나요?"

그가 떠날 채비를 하자, 그동안 함께 지냈던 프리니가 물어왔다. 그녀는 마침 같이 휴가를 받아서 같이 지냈는데, 주로 희주나 아이들, 그리고 이그네스와 시간을 보냈다.

"응. 이제 다시 가봐야지. 다음에 여유가 있다면 다시 올게."

"네…."

"잘 있어, 프리니!"

"나중에 또 봐!"

붕붕 크게 손을 내젓는 아이들에게 살짝 손 인사를 해준 프리니는 그러다가 시선을 이그네스에게로 옮겼다.

"이그네스."

"음."

이그나스는 그동안 독서를 즐길 때 그녀가 빤히 자신을 바라봤었단 걸 알고 있었다. 그때마다 한두 마디 주고받은 것이 다지만, 사람의 연이란 원래 별것 아닌 것부터 시작하는 법.

그녀는 되려 아이의 관심에 제대로 응해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프리니는 가만히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목 아래에 손을 올렸다.

거기엔 반지. 엘리제 3세가 그녀에게 주었던 루비 반지가 끈에 엮인 채 목걸이가 되어서 달려있었다.

"이거…."

"이런. 미안하구나. 이것은 선물 받은 것이다. 줄 수가 없구나."

가지고 싶었나 싶어 이그네스는 그렇게 말했지만, 프리니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냐…. 그런 게…."

"음?"

"그게 아니라…. 잘…. 간직해. 이거. 이그네스에게… 소중한 거."

"……."

처음 만났던 날 보았던 황금안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확언하며 그녀를 올려보고 있었다.

내내 게슴츠레하던 눈동자에 약간의 물기가 돌았다. 순간 이그네스는 그녀가 첫날에 이미 자신의 미래를 보았음을 깨달았다.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지면서 입이 벌어졌다. 당장 그녀의 몸을 세차게 흔들어서라도 그녀가 보았다는 비전이라는 것을 죄다 토해내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걸려있다는 SA랭크 마법사의 금제는 단지 미래 예지를 하는 횟수뿐 아니라, 그 결과에도 관여하는 것…. 그녀가 더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미 모든 걸 설명해줬으리라.

이그네스는 이 순간 SA랭크 마법사란 것들이 너무나 원망스러워졌다.

"……."

이그네스는 반지와 함께 프리니의 손을 조심히 매만져보다가 답했다.

"알았다. 명심하마."

한차례같이 고개를 끄덕인 프리니는 그녀에게서 떨어져 손을 흔들었다. 마주 인사한 이그네스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내내 반지를 만져볼 수밖에 없었다.

*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천후는 한동안 바빴다. 오로치 사태 종료 이후 일본에선 무슨 행사만 있을 때마다 와달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대한민국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후는 독도와 대마도에서 사진을 찍어야 했고, 한일간에 오로치 사태 후, 협의서에 쓰여있던 문구 해석에 대한 의견이 엇갈릴 때마다 그를 불러냈다.

굉장히, 엄청나게 귀찮았지만 천후는 대한민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게끔 대부분의 건에 응해주었고, 그때마다 일본에선 곡소리가 튀어나왔다.

여기에 더해 엘모세와트 대비는 언론에 드러나지 않도록 처리하기 위해 또 따로 움직여야 했으니, 분신술이라도 배우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패트릭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어이. 천후. 물건은 잘 받아서 봤네. 생각보다 잘 만들었던걸?"

"….네?"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내용의 전화가.

"어. 패트릭. 무슨 소리죠? 못 알아듣겠는데?"

"응? 아니 있잖아. 자네가 한두 달 전쯤에 보내줬던 기획안. 그거 PV가 나온 걸 보고 있는데."

"……."

그것은…

악몽의 결과물이었다.

*

"세에에엘레나아!!!!"

덜컹. 집안으로 들어온 천후는 곧장 셀레나를 찾았다. 그녀는 강호처럼 동거하고 있진 않았지만, 일할 때와 잠잘 때를 제외하곤 거의 그의 자택에서 지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응? 왜?"

소파에 누워 태블릿을 두드리고 있었던 그녀는 흔치 않게 천후가 언성을 높이자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퇴근하고 쉬는 동안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는데, 엉덩이만 간신히 가리는 핫팬츠 아래로 긴 다리가 쭉 뻗어있는 것을 보고서 천후는 잠시 움찔했다.

'아니! 아니지!'

저거에 눈을 빼앗길 때가 아니야! 잠깐 혹한 자신을 다잡은 천후는 그녀의 바로 옆까지 다가가 째려보았다.

"야. PV란 게 뭐야?"

"……. 응? 무슨 소리? 셀레나는 그런 거 몰라여."

가증스럽게도 윙크를 하며 발뺌하는 걸 본 천후는 그녀의 어깨를 짚고 짤짤 흔들었다.

"말해. 다 들켰거든? 패트릭이 뭐 이상한 거 받았다고 연락 왔다고."

"아, 정말? 이런. 왜 그쪽으로 연락을 한담. 에이."

아쉽다는 듯이 손가락을 딱 튕긴 셀레나는 베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에이. 별거 아니야. 전에 말했던 그 기획 있잖아."

"무슨 캐릭터 상품 만든다는 거?"

"응. 그게 다됐거든. 그런데 DS 꺼만 하자니 좀 심심하길래 패트릭 씨한테도 좀 협력해달라고 해서 여차여차 만든 거야."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투에 천후는 그녀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보여줘."

"…응?"

"보여달라고, 그럼. 그 다 됐다는 거."

"……."

셀레나의 눈동자가 여기까지 와서야 살살 옆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천후는 여기서 도망가게 놔줄 생각이 없었다.

"다 들었거든? '재미있는 동영상'이라는 거?"

"…아차아."

하긴. 전화를 했으면 이미 어떤 물건인지는 다 들었겠지. 셀레나는 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보여줄게. 대신…. 각오는 했겠지?"

"무슨 각오?"

천후의 물음에 셀레나는 대답하지 않고 생긋 미소 지었다.

살면서 이것보다 불길한 미소를, 천후는 본적이 없었다.

*

그 후. 셀레나는 집안사람들을 거실로 한데 모았다. 아무래도 거실에 있는 TV가 가장 대화면이었으니 말이다.

소식을 듣고 2층에서 내려온 라즈베리는 흥분한 듯 콧김을 내쉬면서 물었다.

“드디어 완성된 겁니까?”

“응. 짧은 PV 수준이지만 말이야. 진짜로 뭐 하려면 내년 중순까진 가야 할걸.”

“괜찮슴다. 그거만 해도 감개무량이지 말임다.”

양손을 꽉 쥐고서 부들부들 떠는 라즈베리를 보고 천후는 한없는 불길함을 느꼈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자. 그럼 틀게.”

조명을 다 끈 셀레나는 리모콘을 조작해 그 PV란 것을 틀었다.

<하아아아아아!>

<키웨에에에에에에!>

처음 나온 것은 오로치 레이드 영상.

홍적의 궤적이 떨어져 내려, 오로치의 거체를 완전히 관통해 놈의 몸 뒤에서 튀어나오는 영상이었다.

놈의 몸에서 빠져나와 마지막 일격을 가하느라 힘이 다한 천후가 신위를 해제하며 머리를 쓸어 넘기는 영상.

여기까지는 정상적이었다.

…딱 여기까지만.

그 시점에서, 갑자기 편집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친 천후가 눈을 감은 채 중앙에 서 있고, 그 뒤 배경에선 지금까지 그가 치른 레이드 화면들이 시간순으로 빠르게 떠올랐다 사라지기 시작했다. 블랙 레오파드, 텐타클 뱀파이어, 키메라, 드래곤…. 그때마다 잠깐씩 보였던 달려들기 전의 준비 자세나, 진지했던 얼굴들이 촤르르 지나가다가…….

갑자기 화면이 어두워지면서, 글자가 떴다.

<발표.>

<지금까지 있었던 실화를 토대로>

<또 다른 전설을 써내려간다.>

<세계를 멸할 괴물, 디제스터를 잡기 위해 결성된 이들….>

쿠쿵! 마지막에 쓸데없이 공들여 만든 제목이 떡 뜸과 동시에 천후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왠지. 이 뒤에 일어날 일들이 상상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은…구현됐다!

<암흑의 화염을 두른 나에게 불은 통하지 않아, 도마뱀.>

챠킹. 흑발에 검은색 일색인 옷과 망토까지 두른 10대로 보이는 남자아이, 정확히는 10대로 보이는 ‘만화 캐릭터’가 나타났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으로 한쪽 눈을 완전히 가린 소년의 몸이 옆으로 스르륵 옮겨지더니, 그 빈자리에는 <‘The Dragon Slayer’ 영천후>라는 글자가 떴다.

“어억….”

순식간에 양손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낀 천후는 말조차 자아내지 못하고 그걸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화면이 전환되더니, 방금 실사로 보여줬던 구도를 캐릭터가 똑같이 따라 하기 시작한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하늘로 떠오른 캐릭터의 오오라가 천후와는 달리…완전히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 게다가 오오라 색은 검은색.

그렇게 떠올랐다 오로치의 몸을 관통하고 빠져나온 캐릭터는 상처 하나 없이 왠지 전혀 이유를 알 수 없이 괜히 오른손을 확 떨치면서 중얼거렸다.

<내 메기도의 먹이가 되어 사라져라…!>

“으…. 으으으으으……!”

거실의 큰 화면, 큰 음량으로 저런 소리를 외치는 자기를 본뜬 캐릭터의 행태를 보자 천후는 양손을 쥐락펴락하면서 시뻘게진 얼굴을 들지 못했다.

“내…내 손발.”

저런 무서운 대사 한 적 없어! 메기도가 뭔데? 아니 왜 발에서 용가리가 튀어나와, 갑자기?

수많은 질문이 입에서 맴돌았지만, 그게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영상은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그 뒤로는….

<너한테만 모든 걸 맡겨둘 순 없지.>

<세계를 지키는 DS 가디언즈의 사령관 안소니 크라우저!>

<제군들, 출동이다!>

“으…와….”

유명한 일리미네이터들과 사전에 미리 협의해놨는지, 작정하고 만화 캐릭터로 만들어서는 그 안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이강호는 서브 히로인에 가까운 파트너로 나왔고, 희주는 디제스터에게 점령된 성 안, 사파이어 안에 갇힌 공주 신세.

그리고 라즈베리는 정말로 영천후 옆에서 기술 시전을 배우려고 하는 진지한 학생 느낌의 사이드 킥으로 활약하는 장면들이 짤막짤막하게 나오다가, 마지막에는 하고 자막이 뜨면서 영상이 끝났다.

“어…. 이건…. 어….”

도저히……. 도저히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서 천후가 어버버 거리는 사이에 생글생글 웃고 있던 셀레나가 말했다.

“지금 본 건 공식 PV 미완성본이고. 이번엔 캐릭터 상품화되었을 때 광고 예상 영상이야.”

“자, 잠깐!”

아직 충격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뭘 더 보여줄 셈이냐! 깜짝 놀라 말리려고 했지만, 그가 말하는 것보다 버튼 하나 누르는 게 더 빨랐다.

<오티스! DS 가디언즈!>

<디제스터 놈들이 마음대로 날뛰게 할 순 없지. 이 어두운 세상. 아픔을 안고 있는 건 나 하나면 충분해…!>

<간다! 오티스! 드래곤 스트라이크!>

<크아아아악! 두고보자아아아!>

대놓고 사람 말을 하는 디제스터가 운동화를 맞고 뻥 터지는 걸 본 천후는 힘이 빠져서 넉다운 되었다.

“이, 이게 뭐야………….”

각오고 뭐고 이건 상상을 초월했잖아. 천후의 눈이 반쯤 풀렸다. 그래도 위안거리는 하나 있었다.

남아용 운동화 광고가 끝난 이후, 갑자기 푸른 한복을 입은 서브 히로인…. 이강호 캐릭터가 검을 들고서 휙 지나간 뒤 마지막 광고문구가 울려 퍼졌던 것이다.

<여아용도 있어요.>

“허읍!”

데구르르르. 소파에 누워있던 애꿎은 이강호가 경악해서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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