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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08화 (208/324)

208화

잠시 미국으로 가기 전.

"읏…. 10년 전에 다친 무릎 상처가 재발을…!"

"…업고 가주면 되냐?"

"으!"

셀레나는 그 뒤로도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저항하려 들었다. 하지만 천후의 태도는 강경했다.

천후의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게 희주라면, DS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을 처리하는 건 셀레나였고, 그건 다루는 돈이 늘어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더 능통해져서…. 본래 디제스터 잡는 것 외에 다른 수입원이 없어야 하는데도 어디선가 돈이 굴러들어오고 있었다. 덕분에 천후는 여기에 완전히 길들어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심이 될 이야기에서 빠지겠단 걸 봐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바쁘면 이야기할 때만 잡아놓고 금세 다시 돌려 보내줄게."

"으…. 아니, 그런 게 아닌데…."

"그럼 뭔데?"

"하아…."

살짝 얼굴을 양손을 감싼 셀레나는 모든 걸 포기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냐…. 오랜만에 가는 거니까 괜찮겠지…."

"?"

그때까지만 해도 천후는 그녀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

일본에서 빠져나가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그가 병실에서 빠져나오자, 수많은 정치인, 언론, 유명 인사들이 찾아와 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걸 전부 거절하고서 차량에 탑승하는 것만도 엄청난 고역이었다. 게다가 2차로….

"오오! 미스터 DS! 무사한 모습을 뵈니 기쁩니다!"

미국으로 향하기 위해서 하네다 공항에 대기하고 있는 노블레스 클럽의 전용기를 타러 가는 길. 그 비행기 계단 앞에 무슨 농성 하듯이 유우베 고죠 총리와 정부 인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후를 마중 나온 노블레스 클럽 승무원들은 차마 그들에게 비켜달라고 하지 못하고 저쪽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쯧."

그냥 빨리 떠나고 싶었는데 마지막까지 이러는군. 하지만 천후라고 여기서 저들을 밀치고 말 한마디 없이 탑승할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총리님."

"정말 그렇소.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고 들었는데 괜찮소?"

"네에.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왜 이리 빨리 가시오? 좀 더 머물지 않고."

"좀 중요한 용무가 있어서 말입니다. 기업가인지라."

돈 더 안 나올 곳에 엉덩이 붙이고 있을 시간은 없단 뜻이었다. 그 말에 유우베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면서도 힘들게 웃었다.

"그, 그렇군요."

"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다음에도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그, 그것 말입니다만, 텔레포테이션 해금에 대해-"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구두로 약속드릴 사항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만 서면으로 말씀해주십시오."

"그 서면이 여기에…."

이번엔 천후의 얼굴이 굳었다. 이 철저한 인간들이 아예 이런 상황까지 예측하고 서면을 준비해온 것이다. 여기까지 하는 데 안 받을 수도 없는지라 천후는 문서가 든 케이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 사안에 대해선 DS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검토해서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꼭! 꼭 부탁하오!"

억지로 손을 마주 잡아오는 걸 피하는 것도 힘든지라 천후는 어쩔 수 없이 같이 악수를 나눴다.

결국 어거지로 이것저것 쥐여주는 걸 몇 개는 사양하고 몇 개는 받아들이며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던 천후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돼는데…."

지금 여기엔 일본 정부의 어용 언론만이 간신히 출입해서 방금 장면을 찍고 있었다. 오고 간 대화나 행동들이 와전될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에바가 뒤에서 뿅하고 나타나 그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오올. 아저씨 양복 멋진데."

"야, 이 녀석. 비행기 뜨자마자."

벨트 풀어도 된단 소리가 나오자마자 장난치러 달려오다니. 쓰게 웃으며 돌아보니, 에바는 한 손에 캠코더를 들고서 베시시 웃으며 그를 찍고 있었다.

"자. 오빠 김치~."

"김치~. 근데 그거 뭐야?"

"응? 캠코더."

"그건 아는데. 어디서 난 거야?"

그 말에 에바는 꺄르르 웃으며 그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원래 가지고 있었잖아. 내 꺼. 촬영장비."

"아. 아아…."

얘 원랜 강호 선배 오퍼레이터였지. 여태 잘렸단 걸 입 다물고 있던 천후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랑~. 무선 헬기랑. 미니카랑 해서 몇 개 있어. 원래."

"그랬지. 근데 왜 갑자기 찍고 있었어?"

장비야 예전부터 있었지만, 에바 자신에게 촬영하는 취미는 없었다. 이강호가 솔로로 행동할 때부터 그녀는 장비는 갖춰뒀지만 그걸로 현장을 찍게 하진 않았고, 퇴치 후 사체를 강호가 직접 찍거나 해서 오퍼레이터 자격 요건을 야매로 통과시키곤 했다.

그러니 사실상 에바의 장비는 여태 먼지나 쌓여있었단 소리다.

"응? 아~. 오늘 오빠 멋있게 입고 나올 거라고 희주 언니가 찍어놓으랬어."

"어…. 잠깐 그럼 오빠가 녹화한 거 좀 봐도 돼?"

"응? 어. 봐. 어떻게 쓰는 줄 알아?"

"몰라."

"그럼 에바가 알려줄게. 이걸 이렇게 해서…."

어른에게 뭘 알려준다는 것에 신이 났는지, 에바는 옆에서 조목조목 기능을 설명해주었다. 천후는 순순히 그녀가 알려주는 대로 녹화된 화면을 보았다. 보아하니 어용 언론들조차 잡지 못한 자리…를 넘어 코앞에서 아주 프리하게 유우베와 천후가 나누는 대화를 찍어둔 게, 전모를 드러내기 아주 좋았다.

'이거 때문이구나.'

천후는 그제야 희주가 이 문제로 곤란해질 걸 예상했었음을 깨달았다. 정작 희주는 재잘거리는 라즈베리 옆에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말이다.

'나 진짜 주변에 사람 없으면 큰일 나겠네.'

이강호보고 혼자선 라면 하나 못 끓여먹네 생각했던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 쓰게 웃은 천후는 걱정을 조금 내려놓고서 미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으음…? 왠지 귀가 가려운 느낌이."

옆자리에 앉았던 강호는 귓가를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말이다.

*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이전의 라스베이거스가 아니라 미네소타 주였다.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천후는 지평선 저 끝까지 펼쳐진 농경지를 볼 수 있었다.

"와…. 끝내준다. 엄청 넓네?"

"원래 미국은 1차 산업 깡패니까."

그렇게 말하는 셀레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생기가 없었다.

"이쪽으로 오는 걸 보니 머니 크래프트가 이번 만남을 주선한 모양이네."

"네. 맞습니다."

천후 일행을 인도하던 안내인이 답했다. 그 답을 들은 셀레나는 그 뒤론 말이 없어졌다.

그 뒤, 리무진으로 갈아탄 이들은 도심을 조금 벗어나, 농경지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초원 언덕 위에 지어진 커다란 저택으로 들어섰다.

주변이 전부 사유지인지, 울타리 하나 보이지 않는 집이었는데 건물 바로 밖에 수영장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도보로 조금만 이동하면 강이 하나 있어 바로 낚시나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저택 뒤편으로는 산이 줄지어 서 있었고, 조금만 나오면 말과 양 등을 키우는 것이 보였다. 저것들 역시 이 별장 내에서 즐길 수 있는 일종의 '컨텐츠' 개념의 목장인듯했다.

"나이 먹고 살긴 딱 좋아 보이네."

"사람 수십 명쯤 부려가면서 말이지."

등산하고 싶어지면 등산 좀 하고, 간만에 말이 타고 싶으면 부리는 사람들이 잘 키워둔 실한 놈 하나 골라서 타고. 1년에 두 번쯤 양털도 직접 깎아보고… 그런 체험현장 류의 별장이었다. 실제로 가축을 기르는 건 절대 별장주인이 아니지만 말이다.

"도착했습니다."

"아. 고마워요."

안내인의 말에 따라 차에서 내린 그는 저편에서 하얀 티셔츠에 멜빵이 달린 청바지를 입은 흑인이 천천히 걸어오는 걸 보고 쓰게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패트릭."

"여어! 미스터 영!"

한차례 주먹을 부딪치며 인사를 나눈 천후는 그와 나란히 걸으면서 물었다.

"뭐예요, 그 차림은?"

"하하. 기껏 이런 곳에 왔으니 분위기는 즐겨야지. 저쪽에서 바비큐를 굽고 있는데 자네도 와서 도우라구. 아랫마을에서 막 잡아온 실한 놈이야."

"내 참…. 옷 어디 있어요?"

"껄껄."

패트릭은 그의 등을 두드리며 옷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다. 천후는 씨익 웃으면서 그쪽으로 향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런 분위기의 별장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아했지.

"멍멍멍!"

"우오!"

"커다래애!"

한편, 막 차에서 내린 아이들은 풀어놓고 기르는 개들을 보고서 입을 딱 벌리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일으켜 세우면 키가 그 둘보다 큰 대형견들이 꼬리를 펄럭펄럭 흔들며 옆에서 뛰어다니고 있으니 놀란 것이다.

"쪼, 쫌 무섭다."

"그치?"

무섭기도 하고 말이다. 조금 겁먹어서 움찔대고 있자, 같이 내렸던 이그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중 한 마리에게 다가갔다.

"이깟 개들이 뭐가 무섭단 말이냐?"

"멍!"

그녀가 손을 내고 쓰다듬어주자, 늑대인지 개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녀석들이 주변을 맴돌다가 기분 좋다는 듯이 방방 뛰어다녔다.

"겁도 없지 말입니다."

사실 같이 조금 겁먹고 있었던 라즈베리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한 걸음 나아갔다. 그러자 다른 한 마리가 그녀의 다리 옆으로 스스슥 지나다니며 몸을 훑었다.

"히이이익!'

"꺄하하하!"

"라즈베리 언니 좀 봐!"

"흐, 흥임다. 무서운 건 무서운 검다!"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라즈베리는 빠르게 바비큐를 굽고 있는 곳으로 뛰어가 버렸다. 하지만 개들은 오히려 그 반응에 이끌려서 그 뒤를 쫓았다.

"으악! 왜 따라오는 겁니까?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멍멍!"

"뭔 일이여."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온 천후는 벌써 꺄꺄 소리가 나자 고개를 갸웃하면서 고기 굽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가 말한 대로 부위별로 해체된 통고기들과 소시지. 그리고 각종 술이 이미 세팅되어 있었다.

"안소니는요?"

"저택 안에. 사람들 다 오면 나온대. 춥다나."

"요즘 좀 쌀쌀하긴 하죠."

낄낄 웃은 천후는 입술을 핥으며 불판에 고기들을 올려놓았다. 그동안 천후의 가족들은 개들의 추격에서 벗어나 자리에 앉았다. 놈들은 훈련이 워낙 잘 되어있어, 아예 일정 영역 안으로는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 그런데 머니 크래프트의 마스터는?"

"안소니랑 같이 있어. 아. 나왔군."

패트릭의 말에 천후는 저택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편한 복장을 한 반백의 노인과 그 손녀뻘로 보이는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손을 잡고 나오고 있었다.

처음엔 정말 손년가 하고 보고 있던 천후는 그러다 그녀의 생김새를 훑어보고는 어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유그드라실 자체가 다국적 집단이다 보니, 천후는 보통 한국사람들보다 서양인 이목구비 구분을 잘하는 편이었다. 그 때문에 더욱 눈에 띄었다.

마치 어느 나라 공주님처럼 분홍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 아이는 웨이브 치는 긴 금발과 벽안을 가지고 있었는데, 눈매가 약간 가라앉아있는 것을 제외하면 누구 씨랑 완전히 빼다 박았다.

"아. 왔나? 추워서 좀 들어가 있었네. 이제야 밖이 따듯하군. 사실 불 뗀 지 얼마 안 돼서 말이야."

"조심하셔야죠. 그런데…. 이 옆의 아가씨는?"

천후가 조심스레 묻자, 안소니는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의 작은 등을 슬쩍 토닥였다. 그러자 그 소녀는 천후를 올려보더니 치마의 양 끝을 잡고서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프리니 로즈 루셀…. 머니 크래프트 마스터…하고 있어요."

"어…?"

천후의 고개가 자동으로 옆으로 돌아갔다.

"엄…. 셀레나 씨?"

"하아…."

그녀, 프리니가 모습을 드러내자 자리에서 일어나 옆자리에 와있던 셀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잠시 표정을 여러 차례 바꾸다가, 간신히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안녕, 프리니. 오랜만이네."

"네…. 셀레브리아 언니. 오랜…만.“

“혹시 이모도 같이 오셨니?”

“아…니. 여기는. 나 혼자.”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셀레나는 그녀와 포옹과 입맞춤을 나누고서 소개했다.

"얘는 프리니 로즈 루셀. 내 사촌이고…. 다국적 식량 기업 루셀의 주인이자 루셀 가문의 현 가주야."

"……."

"머니 크래프트 마스터이기도 하고"

천후의 머리는 점점 복잡해져, 이윽고 생각을 포기하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내용이 생략됐는데, 아이들+이그네스는 한국에 있다가 전용기 타고서 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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