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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03화 (203/324)

203화

<단호한 결단>

진구지 하야토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일본 정부에 빠르게 알려졌다. 그들은 유그드라실에 치료받았다는 연락을 받았었는데, 그 뒤 다시 이야기가 나온 것을 듣고 사건의 전말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렇지만 뻔한 범인을 잡는 노력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내 유일의 A랭크가 사망했고, 그 여파로 라이징 선은 완전히 공중분해 되었다. 또한 일본 일리미네이터를 대표할 인물 역시 모두 죽었으니, 이대로 멸급 디제스터를 잡겠다는 것을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동이 트기도 전부터 각국의 문을 두드렸다.

"진구지가 죽었다고?"

당연히 DS에도 그 소식이 들어갔다. 일본 정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접근한 것이 그들이었으니까. 멸급 디제스터를 주 대상으로 삼는 유일한 공격대. 다 쓰러져가는 와중에서 그들은 결국 다시 DS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 거야? 받아들일 거야?"

"일단은 그럴 셈이지만…. 그 전에 한국 정부에선 뭐래?"

"이번에 완전 단단히 작정을 했어. 독도에 아예 치근덕거리지 못하게 하겠다는데. 대마도까지 받아낼 생각인 것 같아."

일본 내의 B랭크 사망자가 너무 많고, 자체 회생 가능성이 거의 완벽하게 사라지자 일본은 호구가 되었다.

당장 웨이브를 막아주고 있는 머니 크래프트와 컨퀘스터를 잡아두고 있는 것만도 막대한 돈이 들어가고 있어서 현금 지불력이 극도로 떨어진 상태. 엔화는 쓰레기가 된 지 오래였다. 이런 상황에서 멸급 레이드를 전제로 두고 공격대를 부르면 이렇게 되는 건 필연이었다.

"우리 쪽에선 모자라면 미국 채권으로 받아올 생각이야. 빚도 일부러 좀 남기고 말이지."

"얼마나 받아내려고 그러지?"

셀레나는 빙긋 웃었다.

"이번에 유럽 우주국에서 혜성에 위성을 안착시키는데 1조 8천억 원쯤 들었다고 하더라."

"어."

"그거 한 15개 쏘고 좀 남을 정도?"

"……."

천후는 그냥 구체적인 액수를 묻는 걸 포기했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보인 태도는 고스란히 지불 금액으로 환산되었다. 영국 사태와는 그 심각성도, 위급함도 격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의뢰국의 사정을 봐줘 가면서 뜯어냈다면, 이번엔 정말 가차 없어 보였다. 돈 문제에 감정이 들어가면 무섭다. 그것도 주지 않을 수 없을 때는.

잠시 몸을 떤 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 문제는 일본 정부 의향도 들어야 할 거야."

"응?"

"같이 봤으니 알겠지만…. 오로치는 강해. 레이드에 있어선 정말 최악이야."

어제. 크리스마스가 최악의 날로 변하는 걸 실시간으로 보았던 천후는 그렇게 평했다. 이후 공격대장들과 나눈 이야기에서도 같은 말이 나왔다.

"지금까지 멸급 디제스터가 여럿 나왔어. 하지만 대부분, 아니 전부 포인트맨 정도로 공격을 유도할 수 있었어. 그런데 이놈은 달라. 동시 타겟팅을 할 수 있고 그게 전부 광역공격이야."

"드래곤보다 더 힘들 거란 소리야?"

"패턴이 다 나오진 않았으니까 그건 확신 못 하겠어. 일단 드래곤이랑 오로치가 그냥 괴물 대 괴물로 치고받으면 드래곤이 이길 거야. 드래곤은 그 정도로 괴물이었지. 하지만 지금 저걸 잡을 건 사람이라 문제지."

레이드의 기본은 괴물을 잡기 위해서 50명이고 100명이고 터를 잡고서 집단으로 두드려 패는 게 기본이다. 사용하는 무기가 좀 다르지만, 원론적으론 아직도 창으로 사냥하는 부족이 코끼리 한 마리를 거의 침봉 수준으로 만들어 죽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코끼리한테 한대 들이 받히면 사람은 누가 되든 죽지만, 정면에 선 주의를 끄는 동안 창을 꽂아서 코끼리가 고통에 멈칫하고 돌아보면 이제 다시 대상이 된 사람이 도망 다니고 또 공격하고…. 이것의 반복인 것이다.

즉 일종의 다중 드리블 플레이. 가장 좋은 건 이러면서 아무도 안 다치는 거고, 한둘이 죽는 정도면 선방한 것이다.

이제 여기서 특수 능력을 붙이고 덩치를 불리면 디제스터와 일리미네이터의 레이드가 된다. 멸급 디제스터부턴 이제 주의를 끄는 것도 혼자 할 수 없어서 여럿이서 팀을 짜고, 창을 던지는 이들도 마찬가지.

이러면 이제 포인트맨을 맡은 팀 한두 개가 죽으면 굉장히 선방한 것이 된다. 이전 드래곤 레이드 시절, 로마이어가 발악으로 시도한 게 이 그림이고, 당시에 있는 자원 안에서만 생각하자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정태원이나 다른 일리미네이터들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저놈은 너무 여럿을 공격할 수 있어. 그게 문제지."

드래곤 레이드 때 가장 큰 난적이 놈의 강습이나 몸통 박치기가 아니라 레인 브레스, 용오름으로 날아오는 건물 파편,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번개였듯이, 오로치의 공격은 전부 다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에,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드래곤처럼 여타 초상능력을 발휘하지 않는 대신 브레스 한방한방이 전부 강력해서 보통 공격대원은 마법으로 막아낼 수가 없었다.

이그네스 때 겪었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라고나 할까?

"내 생각엔 저건…DS만으론 못 잡아. 아니 잡을 순 있는데 피해가 너무 커질 거 같아."

"그럼 어떻게 하게?"

"일단 보조팀을 최대한 많이 굴려서 공격대원들 전부 브레스를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게 하고, 공격대는 최대한 질을 올려야 해. A랭크도 많을수록 좋고."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셀레나는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일본 정부랑 이야기해야 한단 게 그런 소리였어?"

셀레나는 방금까지 ‘철저하게 '보수'를 받아내겠다’ 의미로, 받아낼 것을 더 늘리겠단 의미로 한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건….

"응.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단 소리지."

*

후지산에 자리 잡은 오로치는 거기에서 하루에도 몇 발씩이나 도쿄에 불을 뿜어댔다. 위력 자체는 드래곤보다 약했지만, 대신 범위가 넓어서 시내가 잿더미로 변하고 있었다.

오로치 등장 전까지 왕왕 보이던 시위대는 이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행정부 주요 기능은 매일 같이 공격받는 도쿄에서 홋카이도로 임시 이전되었다. 그리고 일본 총리 유우베 고죠는 12월 말 홋카이도의 겨울 날씨보다도 차가운 이야기를 눈앞에 찾아온 남자에게 들을 수 있었다.

"DS에서는 오로치 레이드 참가의 최소조건으로 A랭크 2명 이상의 추가 지원, 일본 일리미네이터 B랭크 전원이 공격팀으로 참가, 그리고 나머지 일본 전 일리미네이터의 보조 팀 참가를 요구합니다."

"그, 그건…!"

유우베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조건은 지금 일본 정부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이 A랭크 2명 추가지, 지금 활동하는 정규공대를 끌어들여 달라는 소리와 다름없었고, 그렇게 되면 일본은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최악의 위기에 처할 터였다.

하지만 그때. 머니 크래프트와 컨퀘스터의 대변인들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A랭크를 지원할 수 없습니다. 하쿠네 웨이브가 너무 심해서 공격대 원형을 유지하지 않고 대응하기 힘듭니다."

머니 크래프트나 컨퀘스터나 경급 디제스터를 잡기 위해 만들어진 공격대. A랭크가 섞인 이상 하쿠네를 잡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았지만, 오로치 등장 이후엔 그렇지도 않게 되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나타난 하쿠네만 10체가 넘었고, 이 빈도는 아무리 특화되었다 하더라도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오로치와 교전하는 동안에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놈들을 전부 처리하려면 더욱 그랬다.

유우베는 그 말에 안도가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는군요, DS."

"그렇습니까? 어쩔 수 없군요. 정규 공격대 주인들이 참여해주는 게 일본 입장에서도 가장 좋았을 것 같은데…. 그럼 '제2안'을 들어주시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제2안? 순간 든 불길한 느낌에 유우베의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건 중국과 러시아의 A랭크 국가 일리미네이터 파견 동의서입니다. 여기에 서명해주셨으면 합니다."

"……."

"이미 이야기는 끝나있으니, 서명과 동시에 유그드라실을 통해 이곳으로 강하해올 겁니다."

유우베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중국, 러시아에서는 이전부터 일본에 도움을 주겠다고 몇 번이나 손을 내밀어 왔지만, 그걸 여태 전부 쳐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레이드 필수조건으로 내걸어올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그는 다급히 머니 크래프트와 컨퀘스터의 대변인들에게 외쳤다.

"일본 일리미네이터를 하쿠네 웨이브 처리에 추가 투입할 테니 A랭크가 와줄 순 없겠소?"

"네? 아니 그런 오합지졸들을 어디에다…. 아. 실례."

"일본 일리미네이터는 멸급 레이드의 보조팀으로 활약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누를 끼칠 순 없습니다."

"……."

죽어도 오로치 레이드를 대신 뛰어줄 생각은 없다는 표현임을 알아챈 유우베는 절망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파견 동의서에는 그들이 일방적으로 제시한 조건들이 줄줄이 쓰여있었고, 유우베는 거기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서명하는 순간, 그의 정치 생명은 그날로 끝날 것이다. 아니, 정치 생명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 팔아먹은 총리로 일본 역사에 길이 남으리라.

유우베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천후를 올려다보았다.

"미스터 DS. 당신의 영향력이라면 노블레스 클럽에도 지원을 바랄 수 있을 텐데. 그쪽으론 안 되겠소?"

천후는 다리마저 후들거리고 있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조금만 방광이 약했다면 이 자리에서 요실금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천후는 노구를 가누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이번 오로치 사태에 월드 리버티가 일절 개입을 하지 않고 있으니 힘듭니다. 그뿐 아니라 정규 공격대가 3개나 활동하고 있는 자리에까지 움직일 것 같진 않습니다."

노블레스 클럽은 안소니 크라우저가 만든 일종의 최종병기와 같은 것이다. A랭크가 전혀 없고, 정규 공격대도 부를 수 없는 최빈국을 지원할 때나 자선적인 의미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엔 미국에 멸급이 나타났거나 혹은 멸급 이상의 디제스터가 나타나 전 지구가 위기를 맞이했을 때나 나설까.

그들이 오로치 사태에 움직일 가능성은 오직 하나. 이번 DS, 컨퀘스터, 머니 크래프트 연합 레이드가 실패해 정말로 끔찍하게 긴박한 상황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천후 역시 이번 일로 노블레스 클럽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일본 정부에 동정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애초에 월드 리버티에게 요청을 하지 않은 건 미국의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이상 안소니가 쉽게 움직여주진 않을 것 같군요."

노블레스 클럽이 무슨 악귀들의 집단인 건 아니니 대가를 받을 수만 있다면 움직이려는 개개인은 있을 터였지만, 아마 그들의 움직임을 안소니가 막고 있을 거라 천후는 확신했다.

월드 리버티는 또 다른 미국의 상징. 이들의 도움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미국의 이권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고, 안소니나 패트릭 둘 다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이 막으면 굳이 그 빗장까지 뜯어 열고 도와주러 올 만한 A랭크는 없을 터였다.

결국 그 창시자이자 관리자가 안소니인 이상, 월드 리버티와 노블레스 클럽은 한 몸이었다.

반면 머니 크래프트 역시 미국의 공격대였지만, 월드 리버티만큼 정부 친화적은 아니었고, 철저하게 돈과 효율만 따지는 곳이었으니 불렀지만, 그 결과는 지금처럼 나와버렸다.

"지금 당장 불러올 수 있는 유일한 A랭크들입니다. 이것에 서명해주시지 않는다면 DS는 오로치 레이드를 포기하겠습니다."

"으. 으으으…!"

상황은 최악 일변도로 흘러 유우베의 목을 죄어 메었다. 그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다른 수단을 떠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총리! 육상 자위대로부터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오로치가 후지산에서 나와 도쿄로 이동 중!"

"뭐라고?!"

도쿄의 민간인들은 대부분 대피한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도시가 전부 파괴되어도 괜찮은 건 전혀 아니었다. 그곳은 오로치가 잡히더라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일본의 수도였으니까.

놈이 직접 도쿄 시내까지 들어온다면 지금까지 멀리서 뿜은 불만 맞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피해를 볼 것이다.

유우베의 눈이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뭉치를 향했다.

바야흐로 선택의 때였다.

"자민당은 끝났다…."

쿵.

작은 소리와 함께 도장이 찍혔다.

오로치 레이드에 A랭크를 파견하는 대가로 쿠릴 열도와 센카쿠 열도를 완전히 넘기기로 합의를 하는 서류에.

============================ 작품 후기 ============================

쿠릴 열도는 이미 러시아 영토이긴 합니다만, 여전히 일본이 영토 소유를 주장하는 땅이고, 이 문서에는 완전히 러시아의 소유를 인정한다는 사항이 들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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