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183화 (183/324)

183화

일본의 피해자 행세와 우경화 조짐은 일본 자국민들을 달래는 일종의 수단이었다. 해외에서 어떻게 생각하던, 자국민들에게는 통하는 키워드였고 일본의 여당은 정치권은 이것을 내부 여론을 장악하는 무기 중 하나로 삼았다.

이런 방향성에 맞물려 일본 정부는 라이징 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 공격대의 주인 진구지 하야토는 극우세력 중에서도 지나친 면이 있었지만, 그의 행동 방향은 일본 정부와 일치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그의 행동을 크게 뜯어말리지 않았다. 되려 '지나친 그의 발언을 중재하여 제시하는 일본 정부'의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6년 동안 라이징 선은 아시아에 존재하는 유일한 공격대였고,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일본 정부는 각종 외교적인 이득을 얻어왔다.

일본에 절대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수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비난을 억누르고, 과한 발언을 해도 라이징 선이란 존재로 무마시켜왔다. 그렇게 서로 발맞춰 움직여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구지 하야토가 날이 갈수록 기고만장해서 날뛰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해왔다. 아무리 꼬리 불붙인 말처럼 날뛰어도 아무도 진정시키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슬슬 불이 꺼질 때가 왔다.

*

"……."

조간신문을 읽은 천후는 그것을 왼손 하나만으로 저쪽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돌돌 만 신문지는 용케도 펴지지 않고 그대로 날아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뭐. 그래서. 주한일본대사가 왔다고요?"

"네."

"제 뜻은 분명 전했을 텐데. 굳이 끝까지 우겼다고요."

그의 말에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정부의 반응은 빨랐다. 비난을 기사화하고, 주한일본대사를 청와대에 한차례 보내고 다시 DS에게 보냈다. 여기까지 이틀이니 국가 기관의 행동으로 보자면 상당히 빠른 속도다.

물론 천후는 불쾌감이 한도를 넘었기 때문에 그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희주나 셀레나가 먼저 그를 맞아 돌려보내려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좋아요. 그럼 들어오라고 하세요.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죠."

나올 답은 같은데 굳이 얼굴 보자는 놈이 무슨 소리를 할지 들어나 봐야겠단 생각에 천후는 그가 사장실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본대사 다카기는 유창한 한국어로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빠르게 이야기를 끝내죠.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요."

"네. 하지만 그 전에 저어…."

다카기는 사장실 안을 돌아보았다. 그를 직접 만나기 전에 만났던 비서뿐 아니라, 여성 일리미네이터 둘에 초등학생 뻘로 보이는 아이까지 하나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국가의 대소사를 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그는 주저했다. 하지만 천후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말씀하시죠. 어차피 제가 다시 모든 걸 말해줄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쓸데없는 걸로 시간 끄는 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불편하시면 돌아가시죠."

대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좋지 않군.'

그는 DS에 오기 전에 이미 대한민국 정부의 답변을 듣고 왔다. 그들이 말해준 결론은 간단했다.

'사전에 협의도 없이 그런 거라 어쩔 도리가 없다. 저질렀으면 수습도 알아서 해라.'

평소 대한민국 정부의 태도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폭언 사건 등이 있을 때마다 사용해왔던 물밑 접촉 루트가 전부 막혀버렸다.

공식 접촉의 상징과도 같은 다카기 대사는 당연히 아예 문전박대 당해버렸다. 이 시점에서 다카기는 이번 교섭이 절대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이후 DS 본사에는 들어올 수 있었지만, 영천후를 만나려고 몇 단계를 거쳤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간신히 만난 지금, 다카기는 일본 정부가 설정한 상황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체감했다.

하지만 그는 공무원. 맡은 바 일은 해야했기에 최대한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입에서 내기 시작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이번 사건의 보상과 추가 퇴치보수를 지급해드릴 테니 DS 공격대 파견을-"

"거절합니다."

"……."

단칼에 말을 잘라 내버린 천후는 출입문을 가리켰다.

"용건은 그게 전부입니까? 그렇다면 나가보시죠."

"자, 잠시만! 대체 왜 이러십니까? 정확한 내용이라도 들어주십시오!"

"필요 없습니다. 대체 왜 이러냐고요? 몰라서 묻습니까? 라이징 선과 쌍으로 아주 절 웃겨주시네."

참자 참자 하고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결국엔 슬슬 풀려나오며 천후의 말이 짧아졌다.

"뭐? 누가 누굴 비난해? 장난하나, 지금. 사람이 병신으로 보여? 공식 입장은 저쪽이고 지금 나하고 딜하면 어떻게든 되리라 생각한 건가?"

"아니 그것은. 일본 내의 여론을 생각해서…."

"하."

코웃음을 친 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다가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눈엔 이제 명백한 적의와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이보세요. 당신이 지금. 오늘 이 자리에 가져왔어야 했던 건 당신네 나라에서 직접 부른 손님인 나를 제대로 지켜내지도 못한 것에 대한 진실한 사과였지, 이딴 게 아니야."

천후는 아주 잠시라도 일본 정부를 불쌍하게 여겼던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뭐? 진구지 하야토의 의견을 꺾지 못해? 그럴 리가 있나…. 그건 그저 라즈베리가 '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나온 착각이었다.

실상은 이렇게 배가 맞아서 죽고 못 사는 사이일 뿐이다. 진구지 하야토야말로 일본 내에 만들어진 극우파들의 우상이었고, 진구지는 정부에게 그런 자신을 이용하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다.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이었다. 또 피해자 행세를 시작하고 있었다. 선공도 자기가 해놓고 내가 더 많이 맞았네 하면서 왈왈 짖어대고 있는데.

"내가 왜 이 꼴을 보고 참아야 하지?"

"이, 이번 일을 우리 일본 정부가 원하는 방향성으로 마무리하면 한국 측에 유리한 경제 협상이-"

"그게 국가의 체면보다 중요하진 않을 것 같은데."

"……."

"내 명예보다도."

순간 다카기는 굉장한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DS는 아직 정부와의 관계가 완전히 확립되지 않았는가!'

드래곤 사태로 일어난 피해를 자비를 들여서 복구시켜주는 모습에 일본 정부는 DS가 극 정부 친화적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정부의 이득에 공격대가 따라줄 거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곳이 그런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눈치를 보는 것은 오히려 대한민국의 정부였고, DS는 어느 정도 거기에서 분리된 상태였다.

이 기미는 영국 사태 때 어느 정도 드러났었지만, 아직 이때 돌아가던 상황에 대한 정보가 일본에는 완벽하게 들어오진 않은 상태였다. 이면으로 영국과 한국 사이에 무언가 주고받았을 거란 게 국제 사회에서는 당연하게 생각되고 있었고, 그것은 판단착오를 불렀다.

올바른 상황 인식을 한 다카기는 그 자리에서 도게자, 완전히 땅에 엎드려 이마까지 땅에 붙이며 외쳤다.

"죄송합니다! 사죄하겠습니다!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그 모습에 강호나 라즈베리, 멀찍이서 바라보던 이그네스는 흠칫거리며 천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빌자 동정심이 움직였다. 목소리는 절박했고, 행동은 진실했다.

진실하긴 했다.

"당신 개인이. 말이죠?"

"……."

다카기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천후의 눈은 한층 더 차가워졌다.

"당신 개인이 미안하죠? 일본 정부가 저에게 미안한 게 아니라."

"……."

"진구지 하야토가 처맞고 나서 저에게 미안하다고 한 게 아니라. 당신이 미안한 거잖아. 안 그래? 한 명의 인간으로서 미안하다. 오케이. 고마워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천후는 강제로 그의 양어깨를 짚고는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카기 대사의 눈은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차가운 눈매 그대로 유지한 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지 마. 기분 나쁘니까. 그래도 당신 개인의 사과는 받아줄게. 고맙네. 자. 이제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다했어요. 나가보시죠."

"…알겠습니다."

천후의 말대로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외교관으로서도, 모든 것을 양보한 '척'을 하는 것도 통하지 않았다. 보통 이 갭을 실제로 눈앞에서 겪으면 사람의 마음은 약해진다. 약해지기 마련이다.

평소에 악플에 시달리던 연예인이, 무전취식으로 도망친 범인을 잡은 식당주인이 막상 붙잡힌 놈들이 눈앞에서 울고불고 짜고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면 용서하고 동정심에 합의를 봐주고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허나 그 진의는 어떤가. 그 뒤에 그들이 진정한 반성을 할까? 그건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적어도 이번 경우, 일본 정부 자체나 진구지 하야토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저 직업상 입장이 몰린 다카기가 '이런 방법을 쓴 자신'을 사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진실되지. 하지만 그건 천후가 바라는 사과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것이었다.

"후우…."

다카기를 내보낸 천후는 양손으로 눈을 짚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곁에 희주가 조심스럽게 앉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아…. 정말! 하아!"

입안에서 온갖 욕지기가 맴돌았지만, 바로 옆에 희주가 있어서 간신히 참았다. 어디다 화풀이할 곳도 없어서 천후는 그대로 몇 분이나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희주는 더 말하지 않고 그의 허벅지를 그 가는 손길로 쓰다듬을 뿐이었다.

"잘도 간파해냈구나."

그동안 옆에 다가온 이그네스의 말에 천후는 손을 떼고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긴 적발 아래로 신기하다는 듯이 깜빡이는 빨간 눈동자가 보였다.

"그런 거 같더라고. 진짜 힘들었다…."

"음. 수고했다. … 그런데 왜 만지작거리는 거냐!"

조물락조물락.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볼이나 코를 집어대던 천후는 그녀가 날카롭게 쏘아보자 헤 웃으며 일부러 더 만져댔다.

"응? 어쩐지 이러면 기분이 풀리는데. 좀."

"그게 뭐냐! 사람을 애완동물 취급하다니!"

꼬집꼬집. 두꺼운 손을 세게 꼬집어 버린 이그네스는 흥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저쪽으로 가버렸다. 까칠하기가 이를 데 없다. 역시 이브나 에바처럼 대해선 안 되는 모양인데 천후로선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애로보이는 걸 어쩐단 말인가.

"싸부. 죄송함다. 저 땜에 일이 커진 거 같아서."

"너 때문 아니라니까. 칼 들고 설친 놈이 미친놈이지. 신경 쓰지 마."

라즈베리는 제대로 된 정보제공을 하지 못했다는 것에 아직도 구애받고 있었다.

"됐고. 라이징 선에서 진구지가 못 움직일 땐 누가 가장 영향력이 있어?"

"음…. 아마 스즈키 언… 스즈키 아야메 일검다."

"그게 누군데?"

"미스터 진구지 애인이지 말입니다."

"내 발길질 막았던 여자?"

"네."

"그 여자도 진구지랑 비슷한 경향이야?"

라즈베리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님다. 훨씬 상식인입니다. 엄청 착하고, 엄청 예쁘고, 엄청 잘해주고…."

라즈베리는 그러다 말끝을 흘렸다.

"왜? 뭐 신경 쓰이는 게 있어?"

"아닙니다. 그저 좀. 옛날 생각이 나서. 하여튼 미스 스즈키는 좀 지나치게 수동적이긴 해도 좋은 사람임다."

"그나마 좀 말이 통할까…."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천후는 회의감을 느꼈다. 방금 다녀간 다카기라고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결국 이해가 맞아떨어져야 할 문제였다.

"다음엔 그분과 이야기를 하게 되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죠.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아직은 일본 내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진구지 하야토가 없다고 해도 말이다.

그들이 아쉬워할 시간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멸급 디제스터 출현 전조는 이제 막 2단계에 접어들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때를 기다려보도록 하죠."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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