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182화 (182/324)

182화

<관례대로 안될 때도 있다>

라즈베리에게 언급을 들었을 때부터 조심하자 마음은 먹었지만, 실제로 만나본 진구지 하야토는 천후가 상상했던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는 놈이었다.

"21세기에 어떻게 저런 또라이가 세상에 있지?"

대한민국이 막 독립하고, 한국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6, 70년대에는 저런 생각을 가진 이들도 많았다. 과거 일제강점기에 실제로 살았던, 그중에서도 조선에 건너와 살았던 적이 있었던 노인들은 더 그랬고.

그러나 이미 긴 시일이 지났다. 그들의 대부분은 세상을 떠났고,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있던 이들 역시 세상을 떴다. 이제 일본에서도 대놓고 저런 소릴 하면 노인이라도 미친놈 소리를 듣는 세상이 왔다. 아니. 정확힌….

"최근에 점점 일본 내부에서 우경화 조짐이 심해지고 있어서 극단적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긴 해."

"저런 놈들이 많다고?"

"꽤."

"하."

과거에는 말을 꺼내면 멸시받던 무리가 세를 불리면서 사회의 구석이 아니라 피켓과 구호를 외치며 거리에 나오고 있었다. 물론 일본 대부분의 주민들은 아직도 그들을 경멸했다. 그러나 그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에선 이러한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덴노, 천황-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일왕이라 칭하는-을 모셔놓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것이 현재 일본 정부의 움직임이었다.

막상 그 천황인 아키히토는 그 자리를 몹시 불쾌하게 여겨 그 자리에서 빠르게 빠져나와 버렸지만 말이다.

"말이 안 나오네…. 그 자식 나이는 서른이 안되어 보이던데. 어쩌다가 그딴 정신 나간 생각을 하지?"

"집안이 전통적인 극우파 집안입니다."

"그건 알고 있었어. 극우파 의원 아들이었던가. 사전 조사는 했었으니까 성향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건 아니지."

유그드라실에 가승인을 받아 치료마법을 사용한 천후는 상처가 아문 볼가를 매만지면서 이를 갈았다.

천후라고 이번에 만날 상대의 조사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라즈베리의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뒤가 구리다 싶었지만, 이건 생각했던 것을 정말 완벽하게 뛰어넘었다.

불쾌함이 도를 뛰어 넘어섰기에 천후의 표정은 돌아오는 내내 좋지 않았다. 그걸 보며 라즈베리는 죄송스러워했다.

"미안합니다, 싸부. 그때 다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사실 미스터 진구지가 한국인을 멸시하고 있다는 걸 말할까 하다가, 설마 이런 자리에서까지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비행기에서 말을 돌렸던 게 이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쉰 천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됐어. 생각 못 하는 게 정상이야. 미친놈이 지금 자기 나라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칼을 휘두를 줄 누가 알았겠어?"

최소한의 정신머리가 있다면 그래선 안 됐다. 지금 아쉬운 쪽은 일방적으로 일본이었고, 천후는 라이징 선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에서 정식으로 요청해 일본으로 향했던 국빈이었다.

원래 라이징 선과 대면 이후에는 함께 일본 총리를 만나고 만찬을 함께하는 행사가 전부 준비되어있었을 정도였다. 그것이 진구지의 행동 하나로 모두 날아갔다.

천후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솔직히 내가 정말 화가 나는 건 저놈 하나 때문만이 아니야. 우린 그렇다 치고, 저쪽 공격대원들이나 일본 정부 측에선 저놈의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사전에 막을 노력을 하나도 안 했더군?"

또라이는 뭐 또라이라 치자. 그렇다면 그 또라이를 어떻게든 날뛰지 않기 위해 주변에서 자생적으로 노력해야 하지 않나? 왜 저 사달이 날 걸 뻔히 짐작하고도 아무 행동도 안 했지? 천후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치들이 정말로 의지가 있었다면 놈의 행동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정부와 공격대원이 전부 뜯어말리면 타협할 수밖에 없지. 놈도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상. 그런데 다들 뻔뻔하게 서 있다가 피를 보고 나서야 놀랐다는 듯이 행동하던데. 거기서 내가 크게 다치면 다치는 대로 이득이라고 생각했다고밖에 못 받아들이겠는걸."

그것은 곧 사람을 가지고 시험했다는 것. 물론 시험 좀 해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시험의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 돌아가서 생각하자고. 더러운 자식들."

*

DS가 진구지 하야토에게 공격을 당해 상처를 입고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소식에 일본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아…. 하야토가 저질러버렸나."

일본 총리 유우베 고죠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역대 일본 총리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는 이였다.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서 직접 전차에 탑승하기도 하고, 자위대를 보통 군대로 만들기 위해 개헌 추진을 임기 내내 밀어붙이고 있는 극도의 군국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조차도 이번 사건은 눈앞이 깜깜했다. 아무리 과거 망상을 미끼 삼아 자신의 지지도로 삼는 방식의 정치를 하고 있다지만, 그는 그러면서도 정치가답게 손익계산을 철저히 하여 물러날 곳에서는 물러나고 수십 년 후를 기약할 줄 아는 자였다.

"한국에선 이미 공식적으로 비난을 보내고 있습니다."

"…막을 수가 없겠군."

DS, 영천후는 대한민국에서 단순한 일리미네이터가 아니었다. 멸급 디제스터 드래곤을 단독으로 때려잡은-것처럼 생각되는- 영웅이자, 드래곤 사태로 크게 피해를 본 서해 지역 복구에 6조 이상을 때려 부은 남자였다.

현세대에서는 거의 신격화되어있는 대상에 가까운데 그의 몸에 상처를 입히니, 이 비난은 피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가 없군. 이번 위기는 라이징 선과 다른 정규공격대만으로 넘어갈 생각을 할 수밖에. 그래도 혹시 모르니 DS에는 다시 의견을 타진해보지요. 조건을 좀 더 추가해서…."

한국 정부에선 지금이 기회다 하고 경급 디제스터 퇴치만으로도 꽤 많은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좀 더 많은 것을 내주게 생겼다. 유우베는 혀를 찼다.

'차라리 완전히 손을 볼 것이지.'

차라리 그가 죽어버렸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일본은 현 상황을 라이징 선과 다른 정규공격대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영천후가 죽어버렸다면 A랭크 일리미네이터를 잃은 대한민국은 당장은 길길이 날뛰더라도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우베로선 그것이 아쉬웠다.

바로 그때였다.

"초, 총리! 큰일입니다! 머니 크래프트와 컨퀘스터가 지원을 철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뭐요? 왜?"

"그, 그게. 이번에 DS 피습이 그들에게 일본이 일리미네이터들에게 위험한 곳이라는 인식을 준 모양입니다."

유우베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이건 또 생각도 못 한 상황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번 전조 단계 대응을 위해 머니 크래프트, 컨퀘스터, DS에 지원을 요청한 상태였는데, 그 셋이 전부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중에서 DS가 바로 옆 나라이기도 해서 가장 먼저 정식 계약을 위해 찾아온 상태였는데 피습당했단 이야기가 나오자 바로 발을 뺀 것이다.

"빌어먹을 돈 귀신 놈들이!"

월 가의 영향력으로 만들어진 머니 크래프트는 공격대 이름 그대로 돈만을 위한 공격대. 그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보수를 상향 조정할 기회로 보고 발을 빼버렸다.

컨퀘스터의 경우 원래부터 일본 지원에 부정적인 태도었다. EU의 사정상 독일의 영향력을 크게 받는 컨퀘스터 역시 진구지 하야토의 행동을 결코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네오나치가 공격대를 장악하고서 설치고 있는 꼬락서니나 마찬가진데, 그걸 마주하는 할 독일인이 과연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은가?

게다가 DS에 신세를 졌던 영국의 압력도 있었다. 이그네스 사태 때 주저했던 만큼, 영국의 기분을 신경 써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이런."

상황이 생각보다 크게 번지자 유우베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곧 평정심을 회복하고서 말했다.

"별수 없지. 다시 처음부터 거래조건을 설정하는 수밖에. 전조 2단계 중기까진 라이징 선과 우리나라 일리미네이터에게 완전히 맡길 수밖에 없겠군."

경급 디제스터 '하쿠네'가 던전화을 생성할 수 있단 걸 고려하면 이 결정은 매우 위험했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저 시점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의 결정에 다시 한 번 훼방 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리. 그것이…. 저…"

"뭐요! 꿍얼거리지 말고 말을 하시오!"

"그, 그게…. 진구지 하야토가 생사를 헤매고 있다고…."

"뭐요?"

유우베의 눈이 튀어나올 것같이 커졌다.

*

천후에게 걸레가 될 정도로 얻어맞은 진구지 하야토는 즉시 유그드라실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이미연은 사건 경과를 듣자마자 한마디 했다.

"치료 불가예요. 지상에서 치료받으세요."

차가운 목소리에 라이징 선 공격대원들 모두 얼어붙었다. 그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위험했다. 이 상처를 마법 없이 치료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뻔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천후의 앞을 가로막았던 여자, 아야메가 이미연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이미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치료를 하기 싫다는 게 아니에요. DS에게 당한 상처는 치료마법으로 고칠 수 없습니다. 그가 마법을 사용하는 상태에서 맞은 게 아니라면요."

이미연은 시범으로 그의 얼굴에 회복마법을 사용했다. 그걸로 짓뭉개진 피부는 어느 정도 돌아왔지만, 주저앉은 코나 안와 골절, 부러진 이빨은 전혀 재생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효과는 있지만 여기까지예요. 어중간한 회복마법은 사용하지 않은 것보다 수술하기 힘들어질 수 있으니 어서 내려가는 게 좋을 거예요."

천후에게 칼부림을 했단 소리를 들었을 때 분노에 휩싸였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치료를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고칠 수 없는 건 고칠 수 없는 거다.

'꼬시다.'

속으론 이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결국 지상으로 내려온 진구지 하야토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고, 수술 난이도는 매우 끔찍했다. 안면을 집중적으로 공격당한 덕에, 그의 얼굴은 성형을 통해 원형을 복구하느라 무진 애를 먹었다.

물론 그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이 아니었고, 그의 몸은 당분간 레이드를 뛸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되었다. 지속적인 회복마법의 사용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긴 했지만, 그래도 달 단위의 시간이 걸릴 것이 예상되었다.

"오. 세상에."

그 보고를 받은 유우베는 절망의 비명을 질렀다. '하쿠네'는 그 특성상 최대한 빠르게 퇴치될 필요가 있었다. 그걸 위해선 A랭크의 존재가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라이징 선의 수장이 쓰러져버리다니? 그동안 있었던 몇 번의 하쿠네 레이드에서는 그의 존재로 인해 어느 정도 수월하게 처리해왔다. 그런데 그가 없다면?

단숨에 레이드의 난이도가 폭증하게 되었다.

단 한 번 칼 장난친 대가치고는 너무 컸다. 일본 총리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어쩔 수 없군…. 일단 정규 공격대와 교섭을 다시 한 번 끝내야겠소. 다만 DS에게는 조금 다른 수를 써야겠군."

현재 유우베 정권에선 한국에 대한 압박을 정권 유지 카드 중 하나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기조를 한순간에 돌린다는 것은 그의 정치 생명에 관여하는 문제였다. 함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두 개의 카드.

무조건적인 수용. 기만 섞인 교섭의 카드 중 후자를 뽑아들었다. 리스크를 안고서.

*

'일본 정부. 라이징 선의 진구지 하야토에게 상처를 입힌 DS를 비난.'

"음…?"

아침. 임시 국무회의에서 올라 온 보고서를 읽은 해명진은 눈이 침침해졌나 싶어 보고서를 다시 읽었다. 다행히도 그의 시력은 아직 괜찮은 편이었는지, 글자는 처음 보았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미쳤구만."

담백하게 말한 해명진은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일본이 자주 쓰는 수였다. 이래 놓고서 물밑으로 접근해서 다른 이득을 한국 정부에 제시해서 챙기게 하는 수단.

이미지를 돈으로 사는, 외교적으로는 꽤 자주 있는 그림. 아마 조금 시간이 지나면 주한 일본대사가 찾아올 터였다. 거기서 문전박대하는 쇼를 하면서 뒤로는 이것저것 챙기고 하는 것이 관례라면 관례였다.

문젠 이건 서로 사정을 알고 있는 정부 간의 이야기고….

"DS가 오늘 아침 뉴스를 보면 난리가 나겠군."

다른 정규 공대와는 다르게 DS는 한국 정부에 통제권이 전혀 넘어가 있지 않은 시점에서 그가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해명진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 작품 후기 ============================

원래 저런 작은 상처 치료나 자잘한 마법까지 유그드라실에 승인 신청을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만, 사이가 조금 틀어진 이후로는 괜히 귀찮은 소리 듣기 싫기 때문에 절차를 다 밟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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