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해당 안건이 올라오자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금 당황했다. 바로 얼마 전에는 귀찮게 굴지 말라고 엄포를 놨던 인간이 바로 손바닥을 뒤집고 이러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당황은 길게 가지 않았다.
"이미지 문제겠지요. 일본과 엮인 문제에서 함부로 행동했다간 지금까지 고생하며 쌓은 이미지가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모처럼 이야기가 나왔으니 얼른 결정을 내봅시다."
이번만큼은 해명진이 직접 지휘봉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일본 관련 이야기가 나오자 그도 사람인지라 적극성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일본에서는 망언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독도 관련은 물론이고, 위안부 문제, 고노 담화 부정에 일본 총리는 마루타 부대 숫자가 써진 전투기에 오르질 않나, 탱크에 타보질 않나 미친 짓거리의 연속이었다.
미국은 불쾌해 하면서도 그것을 방치하고 있었고, 그동안 일본은 한껏 그 폭주의 정도를 높여나갔다.
"멸급 디제스터 퇴치가 아닌 이상 이 모든 걸 처리할 순 없겠지만, 자제시킬 순 있을 거요."
그동안 일본엔 A랭크 일리미네이터와 그가 만든 정규 공격대, '라이징 선'의 힘으로 디제스터에 있어서는 안전한 국가였다. 하지만 드디어 시련의 때가 왔다. 한국 정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그놈의 방사능 수산물 규제 풀어달라는 거나 확실하게 차단합시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일본은 많은 국가에서 일부 수산물에 규제를 받았다. 하지만 유독 대한민국에는 규제를 풀어달라고 WHO에 제소까지 하겠다고 윽박지르고 있는 게 현 상황이었다.
"그보단 독도 문제가 우선 아니겠습니까?"
"고노 담화 준수부터 확실하게 못 박아둬야 합니다."
한 번 물꼬가 트이자, 그들은 앞다투어 의견을 냈다. 순식간에 지금껏 쌓여왔던 울분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행동은 빨랐다.
의견은 하나하나가 요구조건으로 변하여 정식 문서로 정리되었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 일본으로 전해졌다.
한 번 DS에게 데인 것도 있었고, 일본 관련으론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국제 정세에서 오랜만에 일본 상대로 칼자루를 쥔 상황을 정부는 최대한 즐기기 시작했다.
*
일본과의 협상을 정부에게 맡겨놓은 동안, DS는 고정적으로 출몰하고 있다는 디제스터에 대한 전력분석 및 훈련이 한창이었다.
"현재 일본에서 출현하고 있는 디제스터는 3종. 경급은 '하쿠멘콘모우큐비노 키츠네', 일본에선 줄여서 '하쿠네'라고 부른 것 같습니다. 파급은 '카마이타치'와 '시라누이'입니다."
"하. 유그드라실에선 일본은 디제스터 임시 명칭을 일본어로 짓게 해주나 보네?"
약간 빈정 상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었지만, 태원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나라도 신청만 하면 해줍니다. 다들 귀찮아해서 그냥 붙여주는 대로 쓰는 거죠."
"아아. 그건 그래."
디제스터 명명권리는 기본적으로 최초 교전한 일리미네이터에게 있다. 이 명명권은 퇴치된 이후에도 사용할 수 있고, 그 때문에 '임시명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일리미네이터는 그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이 적었고, 명명권을 그냥 포기하거나 정부에 넘기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정부에 넘기면 그 권리를 받게 되는 정부는 굳이 그것에 인력 낭비를 하지 않았고, 그냥 그렇게 임시로 붙인 명칭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흔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대부분 비슷합니다. 보통 경급 이상, 그것도 좀 특수하게 강한 디제스터에게나 따로 이름을 붙이죠. 일본이 유난히 명명을 꼼꼼히 하는 편입니다."
어깨를 으쓱한 태원은 설명을 계속했다.
"돌아와서. 일단 파급인 '카마이타치'는 파급치곤 조금 작은 2m 정도의 족제비 모양 괴물입니다. 대신 양손이 사마귀처럼 굽어 있는데, 그걸 휘두르면 날카로운 바람을 내쏠 수 있습니다."
그와 함께 유그드라실에서 받은 데이터를 재생한 화면에선 카마이타치가 낫을 휘두르자 5m 이상 떨어진 거리에 있는 전봇대가 깔끔하게 잘려나가는 장면이 보였다.
"사전 동작은 있지만 그래도 위험합니다. 날아오는 게 눈에 안 보이니 말입니다. 민첩성이 뛰어나고, 근접거리에서의 교전을 즐깁니다. 먼 거리에서 상대해야 하죠."
네발로 기거나 두 발로 서는 걸 자유로이 하는 놈은 타고난 인간 살해자로 보였다. 화면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시라누이의 외형은 불꽃처럼 생겼습니다. 크기는 1m 정도. 마주 보고 있으면 사람을 홀리게 하고, 멍해진 사이에 몸을 뒤덮여 태워죽입니다. 비행이 가능하고 상당히 빠릅니다. 재생력도 상당해서 한방에 절반 이상 날리지 않으면 금세 살아납니다."
"음. 원거리 공격은?"
"지금까지 보고된 바로는 없습니다."
"그럼 그렘린 페이스 마이너 버전 같은 거네."
"별 거 아니군."
더 작고 더 끈질기고, 더 짜증 나는 놈에게 시달렸던 DS에겐 큰 적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하쿠네입니다. 25m 크기의 구미호 같은 모양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큰 특성으론 던전화입니다."
"컥…."
던전화 이야기에 다들 안색이 변했다. 던전화가 가능하단 것으로도 이미 놈이 동급에서 손으로 꼽히게 흉악한 놈인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놈의 던전 너비는 반경 2km입니다. 안에 들어가면 보통 사람은 방향감각과 이성이 점점 상실합니다. 정신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정신 방벽 처리는 필수입니다. 비행이 가능하고, 허공에 떴을 땐 몸체를 안개로 가리고 있기 때문에 공격을 맞추기 어렵습니다."
화면에 비친 하쿠네는 금빛 털을 가진 아름다운 구미호였다. 주변에 무너진 건물들과 감쪽같이 인간의 간이 있는 부분만 뜯겨 나가 있는 것을 제외하고 볼 수 있다면 말이다.
놈이 허공에 떠오르자 몸 주변에서 희끄무레한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놈은 그 위에 올라탄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몸 이곳저곳이 가려서 외곽선이 판별하기 어려웠다.
"주공격은 사지를 사용한 육탄공격과 입에서 뿜는 화염 브레스, 꼬리변형 공격. 마지막으로 꼬리를 여우 모양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아홉 꼬리가 분리되는데 하나하나가 서브 퀘스트 디제스터보다 강력합니다. 하쿠네는 위험해지면 실제 본체를 포기하고 이 아홉 중 하나로 둔갑해 잠시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합니다. 판단 방법은 던전의 지속 여부입니다."
"여우 모양새를 하고 있을 만하군."
"네. 재생력이 대단해서 이때 빠르게 파악해서 퇴치하지 못하면 다시 쌩쌩한 놈을 상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말 문제가 되는 건 퇴치 후입니다."
"퇴치 후?"
고개를 끄덕인 태원은 다음 화면을 재생했다. 꼬리가 변화한 여우를 간신히 일리미네이터가 잡은 그 순간이었다.
푸쉬익. 갑자기 그 몸체에서 녹색 빛깔의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따라붙었던 일리미네이터가 쓰러졌고, 놈이 쓰러진 자리가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스팔트로 된 도로와 주변 건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놈이 죽으면 던전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서 독을 남깁니다. 보시는 대로 체액과 몸체가 변형하는 건데, 연기처럼 변해서 주변을 전부 녹여내리는데 반경 100~200m가 영향권에 들더군요. 기상 상황에 따라 더 넓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놈을 마무리할 땐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합니다."
지금까지 디제스터의 시체는 아무리 거구라도 며칠이면 그냥 흩어져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저 구미호는 죽으면 주변을 초토화하는 놈이었다. 던전화 때문에 어디로 유인할 수도 없었다. 끔찍한 조건이었다. 고생해서 잡아봐야 삶의 터전이 녹아내린다니?
"이것 때문에 유그드라실 쪽에선 퇴치 즉시 정화 마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여의치 않은 모양입니다. 적어도 한 달은 더 지나야 완전히 대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동안 일본 도심지는 엉망이 되겠군."
디제스터의 출현은 인구밀집도에 비례한다. 전조 1단계에서야 어떻게든 되겠지만, 하루가 멀다고 나타나는 시점이 오면 주요 도시는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으리라. 심지어 그냥 잡아도 저 정돈데, 저 상태에서 날뛰기까지 한다면 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최적의 퇴치방법은 던전 내에서 최대한 손상을 입어도 되는 지역을 골라 유인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나마 일본 정부에선 그저 빨리 퇴치하는 것에 집중해달라는 요구였습니다. 하쿠네의 특성상…."
"인간에 대한 공격성이 너무 높은 거군요?"
"네."
디제스터는 원래가 인간의 천적이다. 하지만 막 등장 당시. 그리고 한 차례 피를 본 이후엔 잠시 행동을 멈추거나 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화면에서 보이는 하쿠네의 특성은 그렇지 않았다.
던전 안에 있던 인간들이 스스로 걸어 나와…. 놈의 앞에 선다. 그럼 하쿠네는 그대로 인간의 상체에서 생간과 내장만 뜯어먹었다.
그렇게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있다가, 일리미네이터가 오면 그들 모두를 인질 삼아 싸운다. 쉽게 유인도 당하지 않는다. 유인당하는 대상은 너희라는 태도였다.
이 때문에 일본 일리미네이터는 초기에 많은 희생을 치렀다. 사람이 말려들지 않게 하려고 애쓰다가 말이다.
"구조 전담팀을 만들고 구할 수 있는 사람만 구하는 식이 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잔인한 말이었지만, 사람을 선택해서 구해야 하는 상황이란 엄연히 존재하는 법이고. 지금이 그랬다.
말없이 브리핑을 함께 듣고 있던 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끔찍하군요. 정부가 협상을 끝나는 대로 응하도록 하죠. 모두 괜찮겠죠?"
"……."
그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한국인이었다. 일본은 주는 것 없이 미운 놈이었고, 미운 짓을 실제로 하는 놈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민간인 피해가 너무 컸다. 잡아도 크고, 잡지 못하면 지옥이었다.
드래곤 사태를 직접 겪었던 그들은 전조 단계가 더 길어졌을 때 일본이 무슨 꼴이 날지 눈에 선했다.
"…태도는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그럴 수가 없겠죠."
"졸라 짜증 나지만…. 이건 걍 놔두면 그냥 나라가 망하겠는데."
"대신 엄청 뜯어내 버리죠."
괜히 전조 1단계부터 자국 내에 정규공대가 있는데도 전 세계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키메라 때처럼 전투 피로를 끌어안고서 싸우기엔 너무 버거운 적이었다.
"그럴 생각입니다."
초기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사정을 자세히 파악하자 다들 참전의사가 생겼다. 참극에 대한 걱정이 불쾌감을 이겼다.
얼마 후. 그는 정부의 협상이 끝났단 소리를 들었고, 일본 대사를 대동해 일본으로 출발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때. 예상치 못한 반대에 부딪혔다.
"싸부. 꼭 저도 가야 합니까?"
같이 가면 좋아할 줄 알았던 라즈베리의 표정이 어두웠다.
"왜? 일본 싫어해?"
"네? 아뇨. 아닙니다. 나라 자첸 좋습니다. 좋아하는 만화도 많이 만들지 말입니다. 그저…음…."
"그런데 왜?"
"으…. 그게. 가면 라이징 선도 만날 겁니까?"
"응? 어. 당연하지. 아예 공항까지 나와 있겠다던데."
"……."
라즈베리의 표정이 더더욱 굳었다. 그녀는 잠시 천후의 눈치를 보다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싸부. 실은 조금…. 무섭습니다. 그 사람을 보는 게. 그래서…."
"……."
그러고 보니 라즈베리는 이전 라이징 선에도 입단하고 싶어 했지만 거절당했다는 소리를 언뜻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지만, 라즈베리의 눈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 모습에 천후는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턱 올렸다.
"무서워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 테니까."
흠칫. 라즈베리는 천후는 올려보며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라즈베리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속없게 웃는 그를 올려보는 얼굴이 다른 때와는 조금 달랐다. 목소리도.
"…정말이에요?"
조심스레. 그녀답지 않게 약한 목소리로 묻는 말에 천후는 그녀의 머리를 어지러뜨렸다.
"당연하지. 나는 네 싸부잖아."
"…응!"
와락. 라즈베리는 와락 하고 그의 오른팔을 끌어안으며 웃었다.
그렇게 도착한 일본 하네다 공항.
"DS라고 해서 어떤가 봤더니. 역시 춍은 A랭크래 봐야 이 정돈가."
천후의 볼에 그어진 긴 자상에서 흐른 피가 공항 바닥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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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1월이네요. 함께 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