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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173화 (173/324)

173화

엘리제 3세의 품에 안긴 이그네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동자만 떨 수밖에 없었다.

이그네스의 기억에 그녀는 없었다. 아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영국인이었다 한들 언제 여왕을 만나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손길이, 이 품 안이 너무나 익숙하고 편안해, 그 기시감에 사로잡혀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천후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그네스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던전의 정체는 대충 짐작이 갔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왕가의 묘역에 잠들어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점이 남아있었다.

'설마.'

그에 대해 유추하던 천후는 떠오르는 답안들을 머리에서 지웠다. 하나같이 입에 담기에는 불경스러운 것들이었다. 아무리 영국에서 귀빈 중의 귀빈 취급을 받게 되었다지만 말이다.

결국 함께 침묵한 천후는 두 사람의 교감을 그저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그네스를 품에서 놓아준 엘리제 3세는 천후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DS. 이 아이를 데려간다고 하셨나요?"

"네.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제 개인적인 선물을 하나 주어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여기서 그녀가 이그네스를 잡으려 들었다면 천후는 분명 흔들렸을 것이다. 지금 이 현장에는 그의 감정적인 충동을 막아줄 사람이 없었기에 더욱. 하지만 그녀가 한 말은 달랐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줘요."

방을 나선 엘리제 3세는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녀의 방은 그녀가 살아온 긴 세월 동안 여러 번 변했다. 젊을 때는 이것저것 화려한 장식이 많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치워져 지극히 단조로워졌다.

엘리제 3세는 그중에서 화장대로 다가갔다.

영국은 입헌 군주제. 왕은 직업. 그리고 그 왕이란 직업은 말하자면 엔터테인먼트의 궁극이었다.

그녀의 '메이크업'은 결코 그녀 혼자 하지 않았고, 이 화장대는 사실상 거울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 엘리제 3세는 그 화장대로 다가가 서랍을 열었다. 그리곤 작은 보석함에 소중하게 담겨있는 것 중 하나를 손으로 집었다.

"……."

그것을 내려다보던 엘리제 3세는 그것을 꼭 쥐고는 방을 빠져나와 다른 이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아랫사람을 시켜도 될 것을 자기 발로 드넓은 궁 안을 오간 엘리제 3세의 숨은 약간 가빠져 있었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이그네스에게 다가가 다시 손을 잡았다.

"그대를 보고 매우 기뻤습니다. 이건 제가 드리는 작은 선물이에요."

"……."

이그네스는 답변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내려 엘리제 3세가 자기 손에 쥐여준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반지였다. 몸체는 순은에 가운데에는 루비로 장식되어있는 반지. 한눈에 보아도 10캐럿은 넘어 보이는 그 루비는 이그네스의 눈동자만큼이나 아름다운 적색을 뽐내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반지의 크기였다. 10살 아이와 같은 고사리 손에는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엄지에나 좀 끼는 시늉을 할 수 있을까? 때문에 이그네스를 그것을 받아들고서 조심스레 양손 위에 올려둘 수밖에 없었다.

"부디…. 소중히 간직해주세요."

"…응."

떨리는 엘리제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이그네스는 그것을 양손으로 꼭 감싸며 받아들였다.

그냥 보기에도 10캐럿이 넘는 루비. 여왕이 이미테이션을 쓸 리도 없으니 저것은 굉장한 가치를 가질 터였다. 너무 고가의 선물에 천후는 잠시 당황했지만, 총리인 로이드나 선물을 준 엘리제 3세 둘 다 아쉬워하는 내색 하나 없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언젠가 다시 한 번 찾아와주시오. 영국 왕실은 그대들을 언제나 환영하오."

"감사합니다."

떠나기 전 엘리제 3세가 남긴 말에 고개를 숙여 보인 천후는 로이드와 함께 버킹엄 궁을 떠났다.

"……."

이그네스는 성 밖으로 나서기 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다가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후우…."

그 모습을 창가에서 내려다보던 엘리제 3세의 입에서는 회한이 담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고목 같은 손. 손톱 끝은 그렇게나 관리를 받았는데도 조금 갈라졌다. 어느덧 슬하에 손자마저 생긴 할머니의 몸.

그것이 오늘만큼 아쉬운 적이 없었다.

"기억해내기 힘드셨겠지요."

저 아래. 붉은 머리의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엘리제 3세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렀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메리 언니."

*

"낯익은 느낌이었다."

영국에서 소화하기로 한 모든 일정이 끝났다. 천후는 공대원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런던 히스로 공항으로 향했다.

디제스터를 퇴치하기 위해 외국으로 향할 땐, 그리고 퇴치 직후엔 유그드라실의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체류기간이 길어지고, 퍼레이드까지 참가한 후 귀국할 땐 유그드라실에선 큐브 엘리베이터 사용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영국에서 이동 비용을 내주겠다고 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천후는 비행기 하나를 전세 내서 공항에 대기 시켜두고 탑승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 와중. 엘리제 3세가 건내 준 반지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이그나스가 말문을 열었다.

"영국 여왕도. 그 성도. 이 반지도…."

"그래?"

"음. 하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구나…."

한숨을 내쉬자 안 그래도 작은 어깨가 더 쪼그라들었다. 등이라도 쓸어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위험한 존재'라는 자각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타인과 접촉하는 걸 극도로 꺼려 그럴 수도 없었다.

터치가 되지 않는다면 이제 남는 수단은 말뿐이었다.

"금방 기억날 거야."

"글쎄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게 좋은 일이 될지 모르겠구나."

"……."

단박에 말문이 막혔다. 역시 그녀는 외견과는 달리 내면은 완전히 어른이었다. 그것도 매우 현명한 어른. 이제 막 정신을 되찾아 정신이 없는 상태일 텐데도 자신의 원래 기억이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꼭 이득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단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러면서도 이그네스는 천후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흥. 잠깐 부정적으로 말했다고 풀이 죽었구나. 걱정 말아라. 이 정도로 주눅이 들지는 않는 게야."

"하하."

억지로 강한척하려는 것이 너무 보인다. 그래도 이것이 그녀의 자아를 유지하는 방편 중 하나이리라.

어느새 공항으로 도착한 그들은 비행기로 이동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DS."

"……."

공항에 들어서려는 그때. 입구를 가로막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고서 천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선배. 이그네스를."

'음? 아, 알았다."

강호는 갑자기 등장한 이들을 보며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는 이그네스와 함께 뒤로 물러섰다. 여기에서 주고받는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로 물러난 것을 확인한 천후는 그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웬일로 유그드라실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군요. 당신은 영국지부장이십니까?"

"감이 좋으시군요. 영국지부장 길리엄입니다."

노년의 남자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

‘역시 나왔군.’

이그네스의 최초 상태를 봤을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이들이 개입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고. 굳이 영국 총리에게 이그네스를 보이고, 퇴치금의 일부를 환수해주겠다는 조건까지 걸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이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영국을 벗어나기 전에 그들이 지상에 직접 내려와 개입해왔다. 그런 예상들이 하나씩 맞아 나갈수록 천후의 마음은 엉망으로 짓이겨졌다.

바로 이것이….

이전 최완이 말한 ‘유그드라실이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한정된 사건’ 중 하나인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으니까.

“무슨 일이시죠?”

“서로 시간을 과하게 낭비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멸급 디제스터 이그네스의 신병을 넘겨주시겠습니까? 미스터 DS?”

공항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건 20명 안팎이었지만, 이들이 유그드라실 전체의 의지를 대변하고 있는 이상 눈에 보이는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천후는 숨을 가다듬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멸급 디제스터는 퇴치되었습니다.”

“이러지 마시죠. 위성 촬영화면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치부를 덮어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

그 순간 길리엄의 얼굴에 가득하던 여유가 약간 무너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서로가 확신하고 있는 정보를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모두 말해보도록 할까요? 제가 지금 이 자리에 공격대만을 대동하고 왔단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시겠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국제공항 입구에 3대의 리무진이 멈춰 서면서 정장 차림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영국 총리 로이드였다.

로이드는 두 집단의 대치상황에 빠르게 끼어들어 천후의 편을 들었다. 그는 능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 미스터 DS.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유그드라실 직원이 저에게 와서 이번에 저와 함께 대한민국으로 가기로 한 ‘영국인 교환 학생’을 내놓으라고 하지 뭡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잠시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뭐요?”

로이드는 그 소리에 이마에 핏발을 세우고 길리엄에게 다가갔다.

“이보시오. 길리엄. 당신들 대체 뭐요? 대체 뭔데 우리나라 국민을 멋대로 데려가겠다고 하는 거요? 뭔가 사정이 있으면 나에게 설명부터 해야 하는 게 정상적인 절차가 아니오?”

“아니, 이건….”

로이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길리엄은 당황스러워했다. 손쉽게 끝낼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일이 단숨에 꼬이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등장하는 것은 로이드뿐 아니었다. 로이드와 DS의 이동에는 항상 언론이 따라붙었고, 그에 따라 지금 오가는 대화는 실시간으로 녹화되고 있었다.

유그드라실은 수틀리면 이 모든 것을 정신 조작할 힘이 있었지만…. 결코 그걸 남발할 생각도 없었고, 만약 그런다 해도 이 눈앞에 있는 남자, 영천후의 저항도 직면해야 했다.

영국 정부가 뒤를 봐주는 이상 그는 마법에 대항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 발휘할 것이고, 그건 이 자리에 있는 마법사들만으로 받아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마법사의 천적과도 같은 이강호의 존재도 걸렸다. 그녀의 시야 내에 노출된 순간 그들은 권총에도 무력한 보통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그 상태에서 입장을 계속 밀어붙일 순 없었다.

“잠깐.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요. 이그네스. 그러니까 저 소녀는-”

길리엄이 당황해서 입을 놀리려 하자, 천후는 그를 정면으로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봉인.”

“……!”

길리엄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도 천후는 멈추지 않았다.

“던전화 가능 멸급 디제스터 이그네스의 던전은 사실-”

“잠깐! 거기까지! 알았소. 알겠다고!”

와락! 천후에게 달려들어 그의 입을 막은 길리엄은 이 모습조차 여과 없이 카메라에 찍히고 있는 것을 보고 낭패의 표정을 지었다.

길리엄은 천후가 입을 다물 기색이자 그에게서 떨어져서는 그를 쏘아보았다.

“후회할 거요. 기껏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잃고 싶은 거요?”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였지만, 천후는 여유를 느꼈다.

역시….

유그드라실은 순진하다.

그들 행동의 일부엔 ‘미개한 인간들을 우리가 이끌어줘야지’와 같은, 과거 백인 우월주의적인 사상이 묻어있는 경우도 많았지만…. 막상 같은 영역으로 끌어내려서 대응하게 하면 어쩔 줄 몰라 했다.

자신들이 허가해준 텔레포테이션 사용 등이 아직도 온전히 자신들의 의지에 좌지우지될 거라고 믿는 점 등을 보면, 역시 유그드라실의 기본 이념은 선의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허나.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길리엄 씨. 더는 제가 어릴 적처럼 일방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관계가 아닐 뿐이죠. 저에게 뭘 얻어내고 싶다면 강제가 아니라, 거래를 해야 할 겁니다.”

“이….”

“그리고. 제가 당신이었다면 여기서 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겠어요. 솔직히 지금 당신들이 잘못하고 있는 게 맞으니까.”

내놓으라면 순순히 줄 거라고. 수틀리면 강제력이라도 동원하면 되지 하고 순진하게 그냥 앞길을 가로막은 시점에서 이미 결론은 나 있었다. 길리엄은 그것을 깨닫고는 이를 갈았다.

“후회할거요.”

어깨를 으쓱하며 마지막 사족을 받아낸 천후는 영국 국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 안에서도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고 있던 이그네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은 게냐?”

“뭐가?”

“뭐하는 자들인지는 모르겠다만, 너의 적이 되는 게 아니냐?”

적이라. 천후는 이후를 예상하며 답했다.

“그렇진 않아. 그저…. 관계 재설정일 뿐이야. 나는 저들에게 거래할 수 있는 패를 손에 넣었을 뿐이지.”

“그게 나인 거냐?”

“정확힌. 너와 나.”

“…잘 모르겠구나.”

이그네스가 긴 적발을 찰랑거리며 고개를 저어댔다. 천후는 그것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일단은 네가 현재 생활에 조금 더 적응하면 다 말해줄게. 이건…. 너에게도 꼭 필요한 지식이니까.”

결국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길리엄의 행동으로 모든 심증은 확신으로 변했다.

이그네스는 마력동화현상을 일으킨 마법사.

던전은 그녀를 가둬두고 있었던 봉인이자 ‘감옥.’

이강호의 진리구현자 특성에도 무너지지 않은 것을 보면 천후의 ‘신위’처럼 아주 특수하게 설계된 감옥이리라.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건 눈에 안 보이게 했건, 아예 다른 차원이나, 아공간 등에 처박아 놨었건. 뭔가 수를 썼는데 그것이 깨져서 드러나게 된 것이고.

이그네스에게 유그드라실이 멸급 디제스터 지정을 내린 건 이유가 갈리지만.

첫째는 ‘감옥’을 원래 형태로 되돌릴 방법이 없거나.

둘째는 그럴 생각이 아예 없었거나.

어찌 되었든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일리미네이터로 하여금 그녀를 제거하게끔 하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다고, 천후는 확신했다.

“이 정도까지 알아내 버렸는데…. 아직도 날 입막음 할 수 있다고 믿다니.”

그 사악한 순진함을 뜯어 고쳐버리겠다.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천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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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서 한 화 더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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