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과거와의 대치>
던전 경계가 무너지자 한 차례 난리가 났었다. 이그네스가 튀어나온다고 생각한 영국 정부는 일리미네이터 전원을 현장에 투입했다.
그들은 단 하나 있는 목숨을 걸 각오를 하고서 현장으로 향했다. 막상 때가 왔을 때, 그곳으로 향하는 것을 피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의외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그네스가 던전에서 뛰쳐나왔으니 주변은 완전히 불지옥으로 변해있어야 했는데, 사우나를 연상케 할 정도로 덥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이전 던전이 형성되어있던 곳은 완벽하게 죽음의 땅으로 화해있었지만, 그 밖은 생각보다는 온전히 유지되어있었다. 무엇보다 버킹엄 궁이 멀쩡했다.
또한 DS 공격대 역시 움직임을 멈추고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자기도 모르게 겁먹은 목소리를 낸 영국 일리미네이터는 그러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두려워할 만한 일이었으니까. 그 답변은 천후가 해주었다.
"디제스터는 퇴치되었습니다. 영국은 이제 안전합니다."
환호성이 터졌다.
*
이그네스 퇴치 소식은 빠르게 영국 정부와 여왕에게 알려졌다. 100km 밖에선 만세 소리 울려 퍼졌고, 정부와 왕실은 의장대를 준비했다.
이번에 DS에 지불하기로 한 금액은 천문학적이었지만, 이 레이드 성공에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는 게 쓰는 돈을 아까워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거리에는 구름처럼 몰려나온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꽃을 뿌려주었다.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대하는 태도에 공대원들의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이야…. 한국에서도 못 받아본 대우를 여기서 받네."
"눈물 날 거 같다."
드래곤을 막 퇴치했을 때. 영천후를 제외한 다른 일리미네이터들은 만찬에 참여한 것을 제외하곤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정부가 드래곤 사태를 자연재해로 처리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그들을 대대적으로 띄우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것이다.
이게 굳이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 역시도 일리미네이터 자체는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면이 있었다. 특히 돈 받고 기업이 당연한 일을 해냈다는 인식이 아주 강했다. 오히려 의식이 개선되었기에 더 그랬다.
이런 사정 때문에 그들은 돈은 많이 벌었지만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까지 환영받아본 적이 없었다.
공격대원들은 얼굴을 붉혔다.
"도저히 날로 먹었다곤 말 못하겠는데."
"그러게. 사장님은 어쩔 생각이지?"
그들은 현재 자리를 비운 천후를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천후는 레이드 직후, 이 퍼레이드 상황을 공격대원에게 넘겨주곤 본인은 자리를 비웠다. 영국 상층부와 나눠야 할 이야기가 너무 중요하단 이유로.
거기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에 따라 현장에서 받고 있는 이 환호가 야유로 변할 수도 있으리라.
공격대원들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지금을 즐겨두자고 마음을 먹었다.
*
멸급 디제스터. 아니 마법사 이그네스를 '구조'한 천후로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크게 고민했다.
천후는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가장 믿을만한 사람. 레이나드와 태원, 이강호, 라즈베리 만을 불러서 잠시 현장을 이탈했다.
던전에서 갑자기 어린애 하나를 짠 하고 안고 나오자 강호와 라즈베리는 의아하게 여겼다.
"이그네스야."
"뭣!?"
"와오. 이 꼬마가 말임까?"
강호와 라즈베리는 놀람의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레이드 시작부터 감을 잡고 있던 태원은 되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놀라시죠? 사장님이 A랭크 마법을 걸었을 때와 완전히 빼닮았었지 않습니까? 어린애가 된 건 저도 좀 신기하긴 합니다만."
오랫동안 손발 맞춰온 사람이 왜 놀라느냐는 듯한 말에 강호는 우물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의식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라즈베리는 다른 걸로 분해하는 듯했다.
"크윽! 크림슨 폼입니까? 분합니다. 저도 강화계 마법이 강했으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둘의 반응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태원은 진지하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레이드야 날로 먹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그녀가 디제스터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유그드라실에게서 멸급 디제스터 지정을 받은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던전이 깨지기 전까진 위성으로 내부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가 없어, DS가 보낸 퇴치보고를 그대로 수용했지만….
멸급 레이드였다. 당연히 확인하려 할 터였다. 게다가 문제는 유그드라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마법사라고 한다면…. 그녀는 최소 S랭크. 그것도 방출계 주특기 마법사입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국가 일리미네이터로 두려 할 것입니다."
그녀가 영국의 주요 명소를 훼손해버린 건 틀림없는 사실. 그녀의 존재가 밝혀지는 순간, 영국은 그것을 핑계로 그녀의 신병을 원할 터였다.
현재 세계에는 S랭크 일리미네이터가 없었다. 이그네스가 보인 화력은 가히 초월적인 것. 대 마법사용 결전 병기인 이강호가 없는 상태였다면 제압하기 굉장히 난해했을 것이다.
만약 이그네스의 힘을 제어할 수만 있다면 세계 최강 화력의 일리미네이터를 얻는 셈이다. 아마 그녀라면 멸급 디제스터에게 단독으로 6초에 한 번씩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면 과연 그녀에게 자유민주주의의 수혜가 적용될 것인가? 태원은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태원씬 좋은 사람이군요."
"네?"
"벌써부터 거기까지 걱정해주고 있었다니."
잠시 밝게 웃은 천후는 아직도 정신을 잃고 있는 이그네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존재는 끝까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을 떴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 그녀를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는 천후나 이강호가 반드시 붙어있어야 했고, 그러다 보면 그녀의 존재는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번 노출되면 아무리 공대원들을 입단속 시킨다 한들 새어나갈 일은 새어나간다.
특히 수틀리면 정신계열 주문을 사용할 수 있는 유그드라실에겐 더하리라. 좀 더 근본적인 방편을 마련해야 했다.
"일단 영국 정부와는 딜을 좀 해보죠."
"허나…."
"그들도 생각이 있으면 아마 괜찮을 거예요."
담담히 대답한 천후는 이그네스를 내려 보았다. 이강호가 진리 구현자 특성을 계속 켜놓은 덕에 그녀의 체온은 이제 보통 사람보다 약간 높은 정도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 틈에 천후는 자기 옷을 벗어서 입혀두었는데, 상의 하나로 온몸이 다 가려졌다.
"흐으으음~."
한편 라즈베리는 이그네스가 천후의 신경을 독차지하자 못마땅한 마음에 검지로 그녀의 볼을 살짝 쿡하고 찔러보았다.
그때였다.
번뜩.
머리카락과 같은 진홍의 눈동자가 갑자기 열렸다.
"힉!"
깜짝 놀란 라즈베리는 그대로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반응에 이그네스가 정신을 차렸음을 안 천후는 꿇어앉아 몸을 일으키는 이그네스와 눈을 맞췄다.
"괜찮니? 정신이 들어?"
"……."
이그네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던전 경계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숨어든 건물 안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무감정에 가까웠던 눈동자엔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히 비쳤다.
말을 못하는 걸까? 천후가 그렇게 생각할 즈음에.
이그네스의 입이 열렸다.
"여긴…. 어디냐? 그대들은?"
두려움이 잔뜩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다행히 그녀는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고, 천후는 질문에 답해줄 수 있었다.
"여긴 버킹엄 궁 근처고, 우린 너를 구하러 온 일리미네이터야."
"일리미네이터? 그게 뭐지?"
"뭐?“
이번엔 천후가 당황했다.
일리미네이터를 모른다고? 디제스터가 등장한 이후. 그들의 존재로 인해 세계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물이나 공기처럼 받아들일지는 몰라도 아예 모르는 이는 없었다.
자국 내에 일리미네이터가 아예 없는 곳이라도 그 명칭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천후는 놀랐지만, 안정을 되찾아야 할 사람은 그녀였다. 천후는 당황한 기색을 빠르게 지우고 물었다.
"구조대 같은 거야. 그보다 너는 누구니?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고."
"나? 나는…. 그날. 결국 부왕께선 어찌하시지 못하고 나를…. 마법사…. 다섯…. 아…. 아아…!"
과거를 떠올리기 시작한 그녀는 괴로운지 자기의 양 관자놀이에 양손을 짚고서 덜덜 떨었다. 어느새 눈에선 눈물이 흘러나와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깜짝 놀란 천후는 그녀의 양어깨를 짚고서 진정시켰다.
"아가!"
"아…."
멍한 목소리를 낸 그녀는 천후를 마주 보았다. 흘러내리던 눈물이 그 순간 멎었다. 대신, 가늘디가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그대여. 나는…, 누구지?"
"……."
"나는 대체…. 누구인 거냐?"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
결국 그녀에게선 아무런 정보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녀는 모든 기억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천후는 일단 임시로 그녀를 이그네스라 부르기로 했다.
"이그네스…. 어쩐지 익숙하구나. 그거라면 좋다."
멸급 디제스터 지정 시 임시명칭을 익숙하다며 받아들인 그녀는 천후의 오른손을 잡고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가 구해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이제 막 정신을 차렸는데 기억까지 날아갔다면 불안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천후는 그것을 용인했다.
"키가 줄어든 건 알고 있어?"
"잘은 모르겠느니라. 하지만…. 어쩐지 불편한 감은 있구나. 아마 나는 원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던 듯하구나."
기억은 날아갔지만 위화감은 남아있는 듯했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걷는 것 자체를 힘들어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천후는 그녀의 외형에 구애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원래는 라즈베리만큼 다 큰 아가씨였던 건 알고 있다. 당장 그녀가 구사하는 말투만 해도 어린아이의 말투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가슴팍에도 간신히 닿는 키의 10살가량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였고, 그에 따라 천후의 태도는 굉장히 상냥했다.
"이그네스. 일단 몇 가지 확인해봐야 할 것이 있어."
"뭐지?"
"자신이 마법사였다는 것은 기억해?"
"음…."
잠깐 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던 이그네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지 외에 다른 감각은 느껴지는구나. 그게 지금은 아주 강력한 힘에 억눌려있고."
"그걸 잠시 풀 거야."
"그건…."
이그네스가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본능적으로 힘의 해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후는 그녀를 설득했다.
"평상시엔 어느 정도 선으로 유지되는지까지는 알고 있어야 하니까. 함께 지내려면 말야."
"함께…."
꿈결 같은 목소리로 읊조린 이그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생명의 은인이 하는 말이니."
"그래."
기특한 마음에 천후는 평소 이브나 에바에게 하던 습관대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그의 손을 쳐내버렸다.
"아…!"
이그네스는 자기 행동에 자기가 놀랐는지 쳐낸 손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외쳤다.
"저기! 아니다! 이, 이것은!"
"아. 괜찮아. 진정해, 이그네스. 알고 있어."
웃음으로 그녀를 진정시킨 천후는 그러나 속으로는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쉬이 짐작이 갔다.
'아마도.'
그것은 이미 확신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선배."
"음. 알았다. 이그네스. 이쪽으로 오너라."
강호와 이그네스는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그녀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끔 배려한 것이다.
"그럼 '억눌림'을 풀 거다. 힘을 발휘하지는 말고. 그냥 자연 상태에선 어떤지만 볼 셈이다."
"응."
"그럼. 후우…."
강호는 정신을 집중해 본래 항시 발휘하는 것이 당연한 진리 구현자의 특성을 제어했다. 그리고….
"어땠어요, 선배."
결과에 대한 답은 강호가 하지 않았다.
"왜… 왜 이런…."
이그네스가 혼란스러워하는 목소리에 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옷은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원래 입고 있던 천후의 상의는….
곳곳이 탄 천 쪼가리가 되어 이그네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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