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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157화 (157/324)

157화

<제자가 생겼다?>

밤. 노블레스 클럽 멤버의 회동도 끝나고 다들 다시 각자의 장소로 돌아갔지만, 패트릭은 그 호텔 방에 아직 머무르고 있었다.

머무르고자 하면 열 명이라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VIP용 스위트 룸. 패트릭은 양주병과 잔을 백발의 노인 앞에 내려놓았다.

안소리 크라우저. 월드 리버티, 그리고 노블레스 클럽의 창시자인 남자.

패트릭이 가져온 술은 독주였다. 몇 잔만 마셔도 성인 남자가 픽픽 쓰러질만한 그런 술. 하지만 노인은 그것을 단숨에 들이키며 물었다.

"어땠나. DS는?"

세팅을 마친 패트릭은 맞은편에 앉아 같이 술을 털어 넣으며 답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남자였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그들과의 연관성은?"

"없을 겁니다. 아마도. 그렇게 믿고 싶군요."

"음…."

노인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의 속눈썹은 노화의 영향을 받아 머리카락과 같은 반백이었다. 그 속눈썹이 떨렸다.

"후. 내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10년 전. 세계를 뒤집어버린 괴물이 나타난 시점부터 이미 기업가였던 그는 자신의 기반을 활용하여 재빠르게 그것들에 대응해 미국의 구원자로 이름을 떨쳤다.

두 건의 멸급 레이드에 참가했고, 그때마다 승리하였다. 정치권에선 이미 그를 '미스터 펀더멘탈'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가 없었다면 미국의 국가 경제가 박살 났을 거란 의미로 붙인 별칭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몸을 떨고 있었다. 세상 두려울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지금 이 순간에는 노인의 모습을 여념 없이 보이고 있었다.

"설마 이 노블레스 클럽 안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을 줄이야."

"안소니."

"알아. 알고 있네, 패트릭. 허나…."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DS가 그들의 수족이 아니라면 아직 길은 있을 겁니다."

"음. 그렇지…."

안소니와 패트릭에게조차 떨어지지 않았던 마법사 능력 활용 확대 권한을 부여받은 남자. 노인은 회장에서 본 젊은 아시아인 남성을 떠올렸다.

"얼마 지나면, 그도 마주치게 되겠지."

"미리 경고하지 않아도 괜찮은 겁니까?"

"우리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만인에게 알릴 순 없으니까."

패트릭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엔 괴로움이 가득 차 있었다. 이 순박한 남자에게 타인을 대할 때 본심을 숨기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허나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를 판별할 근거가 필요해. 그러니 조금은 더 지켜보세. 그가 과연…. 마법사들의 적인지 어떤지."

"정말 빌어먹을 일입니다. 이런 적이 생길 줄이야."

"그렇지."

그 말엔 동감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안소니는 패트릭과 독주를 나눴다.

*

파티 참가가 끝나고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낸 천후와 희주는 한국으로 귀국할 준비를 했다. 다행히도 올 때처럼 비행기를 준비해주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올 땐 단둘이었지만, 돌아갈 땐 셋이라는 점 정도일까?

"한국에 대한 공부, 많이 했습니다!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말도 배웠습니다! '김취! 마시써요!'"

"으으으음…."

마지막엔 한국어로 마무리하는 라즈베리의 말에 천후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 말 하면 아줌마들이 환장하긴 하지. 이렇게까지 들떠있는 걸 보니 덩달아 기분이 업되긴 한다. 하지만 천후는 라즈베리를 진정시키고, 그녀를 배웅 나온 이들에게 다가갔다.

패트릭과 알자드였다.

"원랜 라이징 선이나 우리 공격대에 들어오려 했던 아이를 맡기니 좀 떠넘기는 것 같아 미안한걸."

"뭘요. 뭐. 귀엽고 좋네요."

몸은 이미 다 큰 아가씨가 이렇게 활기차게 구는 걸 보는 건 처음이라 천후에겐 나름 신선했다. 그 말에 같이 웃은 패트릭은 그러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할 걸세."

"응? 뭘 말입니까?"

"라즈베리는 그…. 심하거든. 조금."

"?"

"심각해. 중증 와패니즈야."

와패니즈? 그게 뭐지? 천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병 이름인가요? 일단 돌아가서 진료를 받아보죠, 그럼."

"응? 아니. 와패니즈 모르나? 병 이름이 아니라…. 에이. 뭐 겪어보면 알겠지."

설명하는 걸 집어치운 패트릭은 씩 웃으며 천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천후는 그 손을 꽉 맞잡았다.

"앞으론 경쟁자가 되는 겁니다."

"후후. 꼭 열심히 활동해주게. 그리고 미국 쪽 이야기. 잊지 말고."

그 말에 천후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것을 씁쓸하게 바라보고 있던 패트릭은 그러다, 그의 어깨를 콱 잡고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엘모세와트'를 기억해두게. 꼭."

"네?"

무슨 소린가 싶어 되물었던 천후였지만 패트릭은 가볍게 웃으며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천후는 순간 이것이 지금까지 나눈 어떤 대화보다도 중요한 키워드라는 느낌을 받았다. 머릿속으로 그 명칭을 기억해두었다.

그리고 그즈음. 뒤에서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알자드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더 초췌한 기색을 하고서 다가왔다.

"아…. 라즈베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딱히 가리는 음식도 없고 사람도 잘 따르는 편이니 기르긴 편할 겁니다."

"네? 아아. 네."

사람을 대상으로 '기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다니. 특이한 어휘였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는지, 시꺼멓게 변색된 눈꺼풀을 끔뻑이며 말을 이었다.

"좀 과도하게 달라붙고, 밤에 잠을 잘 안 자고, TV 시청이 지나친 면이 있긴 하죠. 빌어먹을 계집…. 아니 이게 아니라. 하여간 잘 써주십쇼."

"네. 아아. 맞아. 그녀의 양친이 거주하는 주소라도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한 번 찾아뵙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미성년자다. 괴물 잡는 일을 시킬 거면 부모와 한번 대면 정도는 해서 안심시켜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알자드는 그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순간 천후는 그의 기색이 뭐라 말로 형언하기 힘들게, 이상하게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굳이 따지자면 뭐라 말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한 듯한? 그러면서도 비웃는 듯한 기색. 하지만 그 기색은 금세 사라졌다. 한차례 눈을 가늘게 떴던 알자드는 표정을 되돌리곤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럴 건 없습니다. 출가하면 외인이니까. 허가는 확실히 받았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고 데려가세요."

"아니. 그래도…."

"세계엔 각 지방의 관습이 있는 법입니다. 이쪽에선 이미 끝난 일 취급하고 있어서, 괜히 찾아오면 아마 그렇게 좋은 소리는 못들을 겁니다."

"……."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그가 이 화제를 빠르게 마치고 싶어한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것 역시 머리에 담아둔 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후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뵙죠."

그 말에 한번 검미를 꿈틀거린 알자드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에…. 아마 당신관 한 번쯤 다시 만날 것 같군요."

그렇게 천후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말이 현실이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한 채.

*

노블레스 클럽의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잠시 의자에 앉아있던 라즈베리는 어느 정도 안정권에 이르자 안전띠를 풀고선 천후에게 다가왔다.

"미스터 영! 질문이 있습니다!"

"응? 뭐죠?"

"미스터 영은 조국이 Korea지 않습니까?"

"네."

"북쪽입니까, 남쪽입니까?"

"……."

잠시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은 느낌을 받은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짚었다. 기본적인 한국어까지 배워왔길래 한국 문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가만. 혹시….'

그 순간 묘한 느낌을 받은 천후는 침을 꿀꺽 삼키곤 물었다.

"라즈베리. 혹시 대한민국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네! 물론입니다! 황해랑 일본해 사이에 있습니다!"

"……."

황해에 일본해라. 얘를 이대로 한국에서 굴렸다간 난리가 나도 크게 나겠군. 자기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린 천후는 희주가 대화를 들으며 그 사이에 가져온 세계 지도가 간략하게 그려진 안내 책자를 펼쳤다.

이야기를 좀 해본 결과, 라즈베리는 어디까지나 영천후란 인간 개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거라, 한국이란 나라 자체에 대해선 공부가 상당히 미진했다.

보통 해당 국가에 대한 관심 형성 과정이란 'A라는 계기로 해당 국가의 문화를 접함 -> 이에 대해 알아보는 와중에 해당 국가에 대한 정보도 같이 알아감 -> 전체적인 문화를 접하면서 언어도 함께 배워보려 시도'의 단계를 밟는다.

하지만 라즈베리의 경우 '영천후에게 관심이 생김 -> 거기에 한없이 파고 듬 -> 거기에 자신의 망상을 섞어서 생각함 -> 마침 만날 계기가 생기니까 그제야 한국에 대한 몇 가지 키워드만 주워담음'의 상태였다.

덕분에 인터넷으로 몇 개 주워담은 정보만 조금 알 뿐이고, 그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전형적으로 코리아 하면 노스 코리아를 떠올리는 서양인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일단 라즈베리. 제가 대한민국에 대한 기본 상식을 좀 알려줄게요."

"네? 정말입니까? 스승이 돼주시는 겁니까?"

천후는 반짝반짝하고 쏘는 빔에 으윽 하고 힘겨워하면서도 답했다.

"상식선이에요."

"괜찮습니다. 영광입니다, 스승님!"

찰싹. 왼편에 와서 완전히 몸을 밀착하는 그 행동에 천후는 신음성을 내쉬었다. 스킨십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제 슬슬 여자에 익숙해진 천후도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냥 여자면 어떻게든 하겠는데 라즈베리는 몸은 다 컸지만, 미성년자. 그러면서 행동은 이러니까 그도 사람인 이상 당황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하고 싶지만, 오른편에 앉은 키퍼 담당은 담담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게 과연 천후가 미성년자에게 아무런 생각도 안 가질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아마 후자겠지.'

그녀와 함께 지낸 지도 꽤 지났다. 절대 전자일 리가 없다. 자기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린 천후는 필사적으로 자기 통제를 하면서 그녀에게 한국에서 주의해야 할 기본적인 사항들을 주입시켰다.

"오! 그럼 미스터 영은 핵쟁이 나라 출신이 아닌 겁니까?"

"……."

일단 북한사람이 아니란 거부터 말이다.

*

한편. 천후가 비행기를 타고 떠난 국제공항의 한편.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피곤한 인상의 남자가 울려온 전화를 받았다.

"떠났나?"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나이가 좀 있는 남성의 목소리 같았다. 그 목소리를 들은 알자드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 ‘레졔나’쪽에서 잘 해주더군. 1년 정돈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관리만 잘했다면 라이징 선에 이미 들어갔을 거야."

낮은 목소리에 슬쩍 질타가 섞였다.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고. ‘재패니즈 몽키’가 그렇게 발정 낼 줄 내가 어떻게 알았단 말야? 그렇게 치자면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은 게 문제니까 조정 탓이라고 이미 결론을 냈을 텐데."

짜증스럽게 말을 쏟아부은 알자드는 대답이 없자 혀를 찼다. 목소리는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들려왔다.

"그래. 그 건은 그만하지. 노블레스 클럽 쪽은 어떻던가?"

"낌새를 어느 정도 잡은 것 같았지. 잘됐어. 계속 얼굴을 비칠 여건이 아니었으니. 어서 미국에서 나가야지. 몸이 근질거려 죽겠어."

큭큭 하고 웃은 남자는 남은 손을 꿈틀거리며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마치 육식 동물이 숨을 고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짐승 같은 놈이로군."

"칭찬 감사하군. 아. 세 명쯤 들어왔단 모양인데. 어떻게 해줄까?"

"나이는?"

"전부 어려."

"전부 보내라."

"크크큭. 짐승이 대체 누구지?"

목소리는 답하지 않았다. 알자드도 답을 바라지 않았다.

"뭐. 누가 짐승이건 상관없어. 난 돈만 있으면 되니까."

"확실하게 넘겨주지."

"좋아. 이번에도 거래 성립이군. 그럼 물건으로 이야기하자고."

웃음 지으며 통화를 끝낸 알자드는 단말기에 연결되어있던 장치를 떼어내고는 출입국 게이트를 넘어 발걸음을 옮겼다.

"흐흐흐…. 드디어 나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겠군."

터키. 인세에 출현한 지옥과 맞닿아 있는 곳 중 하나로….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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