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타앗! 사람의 몸이 검은 선이 되어 쏘아져 나간다. 상대와의 거리는 겨우 5미터. 이 속도로 달려든다면 눈 깜짝하기도 전에 이미 닿아버릴 거리.
그러나 5미터. 그래도 5미터.
"하핫!"
웃음소리와 함께, 그보다 더 빠른 검격. 그것이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다. 어깨가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도 않는다. 노모션. 하지만 날아올 것 자체는 예상하고 있었기에, 섬광이 눈에 보인다 싶은 그 순간 몸을 숙인다.
사칵! 이마의 피부가 갈라지고 머리카락이 거칠게 잘라 흩어졌다. 하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파고든다. 그러기로 결정했다. 뭐? 피부?
겨우 그걸로 끝났다고? 그렇다면 싸지!
하지만 거리는 쉬이 좁혀지지 않는다. 검격을 날리는 그 시간 동안 멈춰야 했을 몸이 어느샌가 뒤로 그리고 측면으로 물러나고 있다. 이 기기묘묘한 움직임에 지금까지는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흡!"
아무리 강호라도 천후가 움직이는 동안 완전히 검을 다 거둬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파고들 수 있다. 그리고 이 거리는….
'손이 닿는 거리!'
후웅! 처음으로 천후의 왼 주먹이 내질러졌다. 목표는 완전히 안면. 상대가 여자고 뭐고 그런 건 생각조차 안 하는 폭력적인 공격. 톤파를 낀 이상 잽으로 끝나지 않는 펀치가 날아갔다.
피잉! 종이 한 장 차이로 그것을 피해낸 그녀의 귀밑머리가 흩날렸다. 그 눈에는 놀람도, 감탄도 없었다. 그저 그다음 행동을 준비하는 귀신의 기척이 있을 뿐.
카앙!
주먹을 거둬들이는 사이에 아주 잠깐 벌어진 겨드랑이로 날아드는 공격이 막힌다. 그와 동시에 라이트.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페인트라는 것을 즉시 파악하고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직후 날아오는 레프트를 검으로 막고 그 즉시 다시 반격. 힘을 빼고 쳤었던 레프트로 다시 방어 후 재공격.
단 한 번이라도 맞으면 사람이 죽어버릴 만한 공격들을 지근거리에서 날린다. 킥? 그런 건 생각할 수도 없다. 지금 당장 두 다리를 전부 사용해 그녀를 쫓지 않으면 그 순간 죽는다. 이 거리에 들어온 이상 그것은 필연이었다.
천후에게 주어진 것은 단 두 개의 주포. 양 주먹만 믿고서 압도적인 육체 스펙을 살려서 오로지 공세만을 반복한다.
강호도 마찬가지였다. 더는 일방적인 공세는 없었다. 서로 때리고 서로 피한다. 그런 거리로 그가 밀고 들어와 버렸다. 그럼에도 자신이 더 유리한 거리. 동귀어진조차 제대로 노리기 힘든 거리이지만…. 여긴 그래도 막아내야 하고 그가 공격하면 손도 닿는다.
"하하하하."
그래서 웃는다. 지금 상황 역시 결코 대등하지 않다. 여기에서마저 그녀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달려들어 버렸다. 덕분에 드디어.
주고받을 수 있다.
찔러 들어간다. 안 맞는다. 주먹이 날아온다. 맞아줄 리가 없다. 거기에서 옆으로 꺾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톤파 활용. 고려해두고 있었다.
크게 움직인 대가로 복부를 베어 간다. 그대로 크게 턴하며 공격을 피해내고, 벌려진 거리를 거칠게 달려와 좁히려 든다.
여기서 다시 목을 노리는 찌르기. 제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검은 이미 피하고 사라져있다. 그와 동시에 복부로 날아오는 톤파 턴.
피해내니 더블 턴으로 변화하여 턱을 노려온다. 자세는 회복했다. 쳐내면서 반격. 그것을 피해내며 이번엔 라이트. 이 거리에선 무리한 시도다. 맞아줄 것 같은가?
종이 한 장.
가죽 한 꺼풀.
그 작은 차이로 서로의 공격이 이 지근거리에서 모조리 빗나가며 미친 것처럼 원과 곡선을 그리며 땅 위를 내달린다.
"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이 거리에 와서야 그 자리에서 못 박혀있는 것 같았던 그녀의 어깨가 움직이고, 사전 동작 따위 없어 보이던 그녀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후는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진정한 스타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괴물이다. 괴물이야! 이 미친 여자! 아아. 정말. 신 나 미치겠군. 데려다 줘. 날 좀 더 높은 곳으로. 가자고. 눈앞에 보일 것만 같잖아!
푸확! 미처 피해 내지 못한 검격이 가슴을 가르며 외피를 찢어버렸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 아니야! 살아는 있으니까!
공방에 도취해 그 쾌감이 절정에 달해간다. 그리고 쾌감을 느끼는 것은 천후만이 아니었다.
'아아.'
즐겁다. 진심으로 즐거워. 이렇게 싸워본 게 도대체 얼마 만일까? 처음으로 조부를 꺾었을 때 이후로 처음이 아닐까?
보통 때라면 보이지 않을 움직임이 보인다. 취할 수 없는 움직임이 취해진다. 고양감이 나를 그 길로 이끌어. 아아. 굉장하구나. 천후야. 너는 정말로 굉장해.
상처를 마다치 않고 들어오는 움직임. 그 찰나가 이제는 정지 화면처럼 보인다. 나도 마찬가지로 느려 터졌지.
그래서일까? 이러고 있다 보면, 그 어느 때보다 너를 유심히 볼 수 있게 된다. 너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어버려.
찰나. 순간에도 너를 눈에서 놓치지 않게 되어버린다. 너와 항상. 이렇게 함께 하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되어버려.
아아. 천후야.
너를 처음 보았던 그 날은 기뻤다. 몸을 보인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만, 후배가 생긴 것이 기뻤다. 이런 나에게도 함께 할 수 있는 인간이 생겼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 아느냐?
나는 언제나 네가 부러웠다. 나도 너처럼 태어났으면 하고. 몇 번이나 생각하곤 했다.
수년 전 그날 이후로 내 검의 발전은 완전히 멎어버렸다. 희주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 뒤는 나의 이 알량한 몸으로 열 수 있는 문이 아니었으니까.
그럴 때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를 보아왔는지 아느냐?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나란 바보는 네가 나를 여자로 봐주는 것이 기뻤다. 처음 네가 나를 안으려다가 그만뒀던 그 술에 취했던 날.
본가로 함께 들어가 잠자리를 함께했던 날.
조부에게서 나를 구해줬던 날.
기뻤다. 너무 기뻐서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몇 번이나 안기고 싶단 생각을 할 정도로. 스스로 여자로 태어나서 기쁘다고 생각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연심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은 가지고 태어났다고 느낀 것이 기뻤다.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이제는 정말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아아. 하지만 천후야.
*
서로의 공격과 공격이 멎질 않았다. 이제는 스태미나의 싸움. 그렇다면 유리하다고 천후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강호의 기세가 다시 한 번 일변했다. 그 눈의 동공이 수축하며, 검을 바로잡았다. 순간 천후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건!'
그리고 느끼기도 전에.
소름이 돋기도 전에.
그의 왼 어깨에서 피가 치솟아 올랐다.
'무 박자!'
여기까지 와서. 이 거리까지 파고들었는데도 사전 동작을 지우고 공격해올 수 있단 말인가?
어째서 강한 거냐?
거리가 있을 때 이 공격에서 대비할 수 있었던 건 최초 동작은 안 보여도 그 다음 동작의 시작점은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게 지속하면 끝장날까 봐 목숨을 걸고 동귀어진 비슷한 거라도 시도할 수 있는 거리까지 들어왔다.
어째서 이렇게 강한 거냐?
그런데 이 거리에서까지 가능하다고? 사람인가? 여기까지 들어오면 동작이 커져도 제대로 읽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가만히 서 있던 그녀의 상체가 갑자기 기울여지면서 공격이 날아온다. 천변. 만변하며!
"크으으윽!"
지고 싶지 않다.
이 강한 남자를 꺾고 이기고 싶다.
어떻게 이겨야 하지?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어?
간단해. 간단하다.
조부가 떠올리게 해주지 않았던가?
내가 어떤 식으로 강해져 왔지? 떠올려라. 떠올려라, 이강호.
벤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벤다.
다시는 나에게 돌아오지 못할 것을.
벤다.
그 아픔에 내가 소름 끼쳐 모든 것을 손에서 놔버릴 수 있도록!
검밖에 남지 않도록!
그것이 내가 강해진 방식. 나를 강하게 해준 방식.
진심이냐? 진심이냐, 이강호?
정말로 벨 테냐?
네가 사랑하는 남자다. 그를 사랑하는 여자들도 있다. 그들도 전부 베어낼 테냐?
가슴속. 어딘가에 남아있던 인간의 마음. 어머니가 심어놓은 여자의 마음이 애타게 애원해온다.
그것이 가슴에 가득 차며 숨을 막히게 한다. 그들이 나에게 주었던 가장 소중한 것. 그러나….
그것을 베어낸 지가 대체 언제던가.
아아. 아버님. 어머님 죄송합니다. 못난 딸의 몸에선 이제 피 냄새가 납니다.
아아. 미안하다, 천후야. 하지만. 정말.
정말이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이렇게. 이렇게나 사랑하는 너를 베면 나는 얼마나 강해질까? 검을 손에 쥔 날부터 원했던 그 끝을 볼 수 있을까?
어린 내가 물어온다.
'베어도 되는 걸까?'
검귀가 답한다.
'알 수 있다. 끝을 알 수 있다.'
조부가 속삭인다.
'이강호. 너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냐?'
주어진 명제는 너무나 간단하다. 우스울 정도로 간단한 해답.
그것을 위해 지금껏 모든 것을 버려왔다. 베어 왔다.
가족? 아이들? 여자? 연인? 아니. 아니지. 아니야, 이강호. 알고 있을 터! 답은 하나!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검!
화악! 순간적으로 그녀의 몸에서 터져 나온 살기에 반응한 천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안 된다. 방법이 없다. 보전 따위는 완전히 머리에서 지우지 않으면 상대할 수 없는 무신이 눈앞에 있다. 순간 천후는 진정한 최종 국면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
함께 동공을 좁힌 천후의 몸이 인간이라기보단 짐승에 가깝게 웅크려들었다. 그녀의 살기는 어느샌가 그녀의 조부의 것과 비상히 닮아있었다. 그것에 반응하여 그의 오감은 극한 그 너머의 영역에 닿았다.
아주 조금. 따지고 보자면 1밀리미터도 되지 않을 아주 작은 떨림이 그녀의 어깨에 보였다. 카아아아아앙!! 순간적으로 몸을 앞으로 퉁기듯 움직인 그의 왼손에서 다시 한 번 피가 터지며 톤파가 하늘을 날았다.
그러나 이미 그런 것엔 둘 다 아랑곳하지 않는다.
후욱! 완전히 무장해제당했음에도 앞으로 더 파고든 그는 순식간에 그녀의 팔 안쪽까지 들어왔다. 공방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잡은 거리. 팔을 구부려서 쳐도 닿을 거리. 준비는 되었다! 이제는!
"…헷."
순간. 무장 해제를 끝내고 거의 허리를 뒤틀어 짜듯이 돌려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눈은 완전히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본 천후의 입가에 미소가 솟아올랐다. 희열이 지워진 상냥한 웃음. 그 웃음 그대로.
그녀의 관자놀이를 향해 일격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훅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
푸우우우우욱!
그의 가슴을 난정이 관통했다. 검 날 끝까지 완벽하게.
하지만, 찌른 강호는 힘없이 뒤로 물러나며 검 자루에서 손을 뗐다.
그녀의 목에서 허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졌다.
이 마지막 공방에서 그녀의 대응은 아주 조금 늦었다. 정상적이었다면 그의 훅이 그녀의 머리를 먼저 강타하고, 그 뒤 그의 몸을 찔렀으리라.
하지만 그의 주먹은 완벽하게 그녀의 옆얼굴 앞에 멈춰 있었다. 칼에 찔려서 멈춘 거라면 적어도 그녀에게 닿기라도 했을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의도적인 것.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말에 천후는 쿨럭하고 피를 뱉으며 답했다.
"흐…. 선배가, 치사한 거야. 이럴 때…. 우는 게 어디 있어."
"아…!"
강호의 떨리는 손이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멀쩡하다고 생각했던 시야는 사실은 희뿌예져 있었다. 그 자리에는 뜨거운 액체가 집혔다.
"아. 아아."
"잘…됐어, 차라리. 선배한테 죽으면…. 괜찮겠지, 아마."
머릿속에서 시가르타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은 천후는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쉽게 죽어서는 안 돼! 이런 빌어먹을! 빌어먹을 진리구현자 년! 이 괴물 놈이 날뛰게 해서 우리들의 위대함을 세계에 알려야 하거늘! 으, 으아아아아아!>
그의 몸에 붙어있던 망령인 시가르타는 진리구현자의 검이 직접 신체에 치명상을 입히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흩어져 갔다. 하지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박아 넣은 검은 빠르게 그의 생명력을 소진시켜 나갔다.
그가 큰 상처를 받으면 응당 나타나곤 했던 검은 세 자매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천후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앞에는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크게 뜨고 몸만 떨고 있는 여자가.
힘겹게. 간신히 한걸음 옮겨 그녀에게 기댔다.
몸에 박힌 칼자루가 그녀의 몸에 닿아 더 깊이 파고들어 왔지만, 이젠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차가워진 팔을 움직여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은 천후는 간신히 고개를 낮춰 그녀의 입에 입술을 겹쳤다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동안…. 너무 놀려서 미안해, 선배."
"천, 천후야?"
"희주랑…. 다른 사람들. 부탁할게. 선배라면……."
"천후야! 천후야!"
스륵. 말을 마친 천후는 그대로 미끄러져 땅에 쓰러졌다. 감긴 그의 눈은 그 뒤론 다신 떠지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입술에 남겨준 감촉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강호는 알았다.
알고 말았다.
"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틀렸다. 완전히 틀렸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검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베었다 생각한 감정들은 베어낸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친구를 가지고 싶다는 소망들은 피멍이 든 채 아쉬움과 원망이 되어 가슴 뒤에서 숨어있었을 뿐이었다.
마주하기 무서웠으니까. 대항하기 힘들었으니까. 떠올리기 싫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숨긴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슬퍼하고 싶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죄송하다 하고 싶었다. 당신들이 바란 모습이 되지 못한 못난 딸이 되었다고.
이 모습을 보이면 너무나 부끄럽기에 시선을 돌리고 있었을 뿐이다하지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그렇게 눈을 돌려왔던 결과가 이거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 그는 멈췄고. 나는 멈추지 못했다.
그는 타인에게 지배당하는 와중에도 마지막 의지를 짜내고 짜내어 나를 지켜냈다.
하지만 나는 뭔가?
누군가에게 지배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환영에 눈이 멀어, 자신의 마음조차 등한시하고서 날뛰었다. 싸움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서 그를 구해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었다.
이제 와서. 그가 쓰러진 이제 와서 후회하며 소리 지르고 있다.
아아.
틀렸다.
이제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
멍청이. 멍청한 년. 넌…. 최악이다…!
"천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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