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자. 어떻게 하면 최완이 그럴만한 마음이 들게 할 수 있을까?"
차를 몰고 거리를 나온 사하르는 웃었다. 이 도시는 꽤 마음에 든다. 마음만 먹으면, 어느 쪽을 날려버리던 대량살상이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정말 어쩔 수 없이 유그드라실이 나설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어차피 할 거라면 쇼크가 가장 큰 곳이 좋으리라. 정치권력의 정점이 있는 자리. 청와대를 떠올린 남자는 진로를 그쪽으로 정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콰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달리던 도로의 옆길에 구멍이 뚫렸다. 마치 거대한 주먹에라도 맞은 같았다. 하지만 옆길에서 달리던 자동차들은 그것을 쉽사리 피해 가면서 이상 현상이 일어났음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호오…. 꽤 강수를 뒀군."
사하르가 휘파람을 불었다. 차랑 하나가 통째로 빠질 수 있을만한 구덩이가 삽시간에 생겨났으면 한 명이라도 구경을 하거나 사진으로 찍으려고 시도할만한데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
사하르는 순간 유그드라실을 나섰단 걸 알았다. 이건 일정 지역의 모든 인간에게 환각으로 구덩이를 다른 것으로 인지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운전자들 눈엔 그냥 도로 공사 중 표지판이 떡 서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지간히 급했군."
인간의 정신에 직접 개입하다니. 금기 중의 금기였다. 아마 사용하고 있는 마법사들도 굉장히 괴로워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사하르는 그 필요성을 아주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이러기를 권장하던 쪽이랄까? 그리고 저들에게는 이렇게 하더라도 충분히 수습할만한 능력도 있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차량을 이용하기가 조금 힘들어지는데….
쾅! 콰쾅! 폭음이 한 번 울릴 때마다 페라리 차체가 점점 망가져 갔다. 일부러 차량에 직접 공격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더 피곤하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대교 중 하나에 접어든 사하르는 쓰게 웃었다.
“사전 예고는 너무 과했나?”
기껏 얻은 몸이다. 조금은 즐기고 싶은 마음에 최완에게 미리 고지를 했지만 그게 문제가 되었다. 이미 유그드라실의 마법사들이 주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그가 사고를 쳐도 수습할 수 있게끔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
차를 탄 상태로는 완전히 그들이 원하는 곳까지 어거지로 끌려가게 생겼다. 조금은 엔터테인먼트를 생각해서 멋지게 경복궁 코앞까지 가서 일을 저지르려고 했던 사하르는 혀를 찼다.
"이거 이대로는 청와대로 향하는 건 힘들겠군."
이 다리를 넘어야만 한강을 건너 종로로 향할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한 사하르는 결국 목적지를 바꾸기로 했다.
요는 큰 피해를 주기만 하면 된다. 이놈의 이름으로. 최대한 눈에 띄게. 어차피 멀리 가지 못할 것 같다면 근처에서 후보지를 찾아야 했다.
문득 인근의 다른 다리 아래를 내려 본 사하르의 눈에 다리와 연결된 꽤 큰 섬이 하나가 들어왔다. 어차피 멀리 가지 못한다면 저기도 괜찮을 것 같았다. 유그드라실이 원하는 장소로 순순히 끌려가 줄 필요는 전혀 없지. 결정을 내린 사하르는 다리의 마지막 차선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흠. 스펠 세이브를 좀 해두었군. 이걸 해제해볼까?"
화륵! 순간 그의 몸에서 흑염이 타올랐다. 그리고 그 직후.
터엉! 다리 전체에 충격이 전달될 정도로 강하게 땅을 박찬 그의 신형이 한강 위의 섬. 노들섬으로 쏘아져 갔다.
*
희주의 월하홍취로 인해 난장판으로 변해버린 천후의 자택 거실. 반쯤 망가져 버린 소파에 걸터앉은 강호의 표정은 심란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가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조부의 이야기. 희주의 이야기. 그리고….
"자네의 본업이 필요할 때네."
"……."
"최강의 메이지 슬레이어가 필요해."
사고 소식을 듣기 직전 걸려온 전화로 들은 최완의 이야기까지. 강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네. 천후가 매지션 레이지에 걸렸어. 국내에서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이네."
"최완 씨. 오랜만에 연락해 왔다 생각했더니…."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말에 강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최완과는 아직 그녀가 트란제비야에 취직하기 전 유그드라실 직속 일리미네이터이던 시절부터 안면이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한국 지부장이었으니까.
최완이 일거리를 중계해주면 강호가 해결하는 관계였고, 그 일들의 절대다수는 디제스터 퇴치가 아니라 폭주한 마법사들의 처리였다.
그때부터 이미 진리구현자의 특성이 발휘되고 있던 그녀에겐 가장 최적의 일이었고, 그녀 역시 거절하지 않았다.
그 인연으로 트란제비야에 온 이후로도 몇 건의 비슷한 일을 처리한 적이 있었지만, 천후가 오고 나선 완전히 손을 뗐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강호의 입에선 싸늘한 대답이 나왔다.
"천후가 레이지에 걸릴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 누구보다도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매지션 레이지란 인생 최초로 마법을 사용한 자들이 광증에 휩싸여 미쳐버리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날이면 날마다 마법을 사용하는 일리미네이터가 매지션 레이지라니. 말도 안 된다.
아무리 둔하고, 눈치 없는 그녀라도 최완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겁니까? 제게도 판단 근거는 주시지요."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서 하는 말이 아끼는 후배를, 자기 양자를 ‘처리’해달라니.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최완의 입에선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교전하게 된다면…. 죽여야 할 거네."
"최완 씨."
"어쩌면 원래부터 이런 운명인 걸지도 모르지."
"최완 씨!"
버럭. 소리 지르는 외침에 최완의 말이 멎었다. 강호는 순간 수화기 너머의 숨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강호의 표정이 굳었다.
이 정도까지 밀어붙였는데 아무런 이야기를 해주지 못한단 것은 무슨 뜻이란 말인가? 살인을 사주하고 있으면서 그래야 하는 이유조차 말해주지 못하는 이유란 건 대체 뭐지?
"설마. 금제를 당하신 겁니까?"
"…천후는 매지션 레이지에 걸렸네."
강호는 머릿속이 암담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 누가 있어 그에게 금제, 마법적인 금제를 걸었단 말인가?
최완은 세상에 신분이 밝혀진 몇 안 되는 S랭크 마법사 중 하나였다. 게다가 캐스팅 숙련법을 천후에게 처음 가르쳤을 정도로 기량 역시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금제를 걸 수 있는 사람이라면 SA이거나, 아니면 그가 자발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밖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양자로 삼은 아들을 죽여야 하는 이유조차 말하지 못하는 금제를 스스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단 거다.
“레이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폭주한 건 사실이야. 자네가 필요하네. 마음이 정해지면 와주게.”
“최완 씨!”
그 말을 끝으로 일방적인 통화는 끝났다.
'도대체….'
의문이 머릿속에서 증폭되어 갔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해답은 도저히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놈을 베어라.'
순간. 조금 전 통화한 조부의 목소리가 뇌리 속에서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을 떠올린 강호는 자신에게 몸서리쳤다.
왜? 왜 지금 와서 그런 걸 떠올리는 거지?
'네가 가장 잘하는 것이 아니냐?'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면 그곳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짙은.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피 냄새.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의식에 남아있는 쇠 냄새가 깊게 잠재워두었던 그녀의 감각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광기.
좀 더 높은 무를 이루고 싶다는 무인의 광기를.
그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자 이번엔 희주의 연락이 있었고, 강호는 다급히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천후의 집에 도착한 강호는 완전히 멎어버린 인형을 볼 수 있었다.
당장에라도 균형을 잃고 쓰러질 것 같은 여자를.
간신히 그녀를 진정시키고 자리에 앉혀서 사건의 경과를 들고 자신의 정보도 공유한 강호는 최완이 한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강호의 머릿속이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그때. 힘겹게 몸을 일으킨 희주가 그녀의 앞에 서서 목소리를 냈다.
"레이지인지, 아닌지보다…. 주인님이 자신의 의사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인님께선….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아버님과 강호 씨를 떠올리셨습니다."
"희주야."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주인님을 막아주세요."
“…….”
아름답다 생각한 흑발이 허리를 숙임에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강호의 표정이 여러 번 변했다.
지금 그녀가 어떤 마음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평소에도 그리고 지금 이런 순간에도 쉬이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여자였기 때문에 더욱. 하지만 지난 몇 달을 함께 하면서 강호는 그녀가 사실은 보이는 것보다 풍부한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을 끝까지 안쪽으로 갈무리하며,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을 부탁하고 있었다. 자신의 남자를 구해달라고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희주였다면 견딜 수 있을까?'
강호는 자신을 희주의 입장에 가져다 놓아보았다. 그 순간,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 같은 감정에 강호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머릿속이 타들어 가 버릴 것 같았다.
그의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 강호는 호텔에서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하물며 그가 다른 사람에게 지배당해버리는 그 순간을 직접 봐버린 그녀의 마음이란….
‘아아. 안 된다, 희주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강호의 손은 떨렸다. 떨리고 있었다.
‘이 이상 내 등을 떠밀지 마라. 이러면….’
그녀에게 공감하는 여자로서의 자신이 있다. 그것은 막 개화한 꽃과 같은 자신. 아름다운 자신.
그러나―
그 뒤로는.
피 냄새에 익숙한. 검에 미친. 무에 평생을 바친 자신이 함께 경청하고 있었다.
절절한 그녀의 마음을 곡해하고 자신에 마음에 맞게 걸러 듣는 검귀劍鬼가.
마주 봐오는 희주의 눈동자에서 광점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나. 바라는 게냐?
강호의 눈빛이 바뀌었다. 한 남자에게 홀려버린 여자의 눈에서, 평생을 검에 바친 무인의 것으로.
"그를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
입에서 나온 말에는 지금까지 보이던 망설임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이른 새벽, 바닥에 가라앉은 찬 공기와 같이 변해있었다. 그것이 타고 올라 허락을 유도한다.
그것에 휘감긴 희주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아주 잠시 말을 망설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주 잠시.
"주인님을…. 부탁드립니다."
"……."
그렇게 말한 희주는 처연히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마치 금방이라도 멈춰버릴 것 같은 태엽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태엽을 감아줄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가엾은 태엽 인형.
아아. 가련한 아이. 가엾은 희주야.
아무리 너라도 천후에 관해선 판단력이 흐려지나 보구나.
확신컨대 이것은 최악의 선택이다.
너는 내가 그를 구할 수 있다고. 중간에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는. 그리고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족속이 아니다. 한번 불이 붙으면 멈출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야.
하지만….
그래. 확신은 할 수 없지. 그러니. 굳이 이렇게 말하마.
"노력하마."
살인의 재가를 얻은 검귀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답했다. 그녀가 지금껏 냈었던 그 어떤 것보다도 감미롭고 자애로운 목소리로….
*
노들섬. 한강대교 한가운데에 위치한 이곳은 대부분 모래와 갈대숲으로 이루어진 별로 볼 것 없는 섬이었다. 이전에는 테니스장이 있다가 사라졌고, 오페라 하우스 건설 계획 등도 있었지만 취소되고서 텃밭만이 남아있는 한강 한가운데의 자연농원이 있는 곳이 바로 노들섬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노들섬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제1진, 제2진 붕괴!>
<아직 외부에 영향을 끼치고 있진 않습니다!>
“흐음.”
천후의 몸에 깃든 남자. 사하르는 흑염을 두른 채로 팔짱을 꼈다. 그가 바란 대로 유그드라실은 나섰다. 하지만 수백에 이르는 마법사가 나선 덕에 그는 현재까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뭔가 파괴적인 행동을 하려고 하면 그들이 펼친 결계가 전부 막았다. 사하르 자신도 생전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천후의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기에 컨트롤하기 힘들어하는 측면도 있었다. 방출마법의 위력이 그렇게 높지 않았기 때문에 강화마법으로 직접 날뛰려니 더욱 그랬다.
“흐흐. 뭐. 나도 여기까진 예상한 바였다.”
이 정도 수가 모이자 아무리 A랭크 마법을 두르고 있어서 결계를 깨고 나갈 수도, 밖에서 알아채게 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사하르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에 차를 탄 것이나, 이 섬에 와서 지금까지 어울려 준 건 그저 장난질에 지나지 않았다. 현대 마법사들의 실력을 조금 보고 싶었을 뿐. 진짜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보자. 일단 출력은 문제가 없었으니 연사가 문제겠군. 그럼…. 빗장을 좀 벗겨볼까?”
사하르의 눈에는 보이는 일부러 만들어놓은 문이 보였다. 이것을 만들어놓은 것이 그 남자인지, 아니면 천후 자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건드려도 상관없는 문.
그렇다면 다룰 수 있는 한계까지 열어젖힌다. 하나. 그리고 둘…. 셋!
‘으…. 음. 이게 대체.’
“아아. 이런. 깨어나 버렸나?”
지금까지 저 깊은 곳에 가라앉혀 놓았던 원주인의 의식이 떠오르자 사하르는 경망스럽게 어깨를 으쓱댔다. 그 잠깐 사이에 자신이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터졌다는 것을 깨달은 천후는 소리쳤다.
‘결국 내 몸을 빼앗았나!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몸은 사하르의 통제하에 있었지만, 시각정보는 공유되고 있었다. 천후는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마법사들에게, 그중에서도 유그드라실의 마법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들섬 전체에 둘러쳐진 저 거대한 보호막. 결계는 방출계 마법사가 대부분인 일리미네이터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사하르는 의식 저편에서 외쳐오는 소리에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어차피 네놈이 알 것 없는 이야기다. 나. 그리고 네놈은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 게다.”
‘무, 무슨!’
“그걸 위해서 우리 동족들이 조금 희생되는 것은 아쉽지만…. 대의를 의한 희생이지.”
거기까지 말한 남자는 불바다가 된 노들섬 한가운데서 영창을 읊기 시작했다. 아주 불길하고.
“나. 별의 적자의 몸을 취한 자로서 고한다….”
사이한 영창을.
============================ 작품 후기 ============================
술렁술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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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가 있어 좀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