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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130화 (130/324)

130화

영천후의 몸을 지배한 남자, 사하르는 그의 몸에 깃들어 그의 자택에 도착했을 때부터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놈의 아내나 마찬가지인 여자의 행동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놈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녀에게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걸 생각해보자면 기면증이 시작된 뒤부터 사하르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을 사용해 염파를 보내고, 온몸을 지배하는 시도를 하는 동안 그녀가 보인 행동은 명백히 이상했다.

"……."

죽고 못 살 것처럼 이놈의 몸에 딱 달라붙다가도 사하르의 활동이 시작되기 직전. 그러니까 기면증이 시작되기 직전이 되면 귀신같이 자리를 피했다. 그러다가 그가 의식을 되찾기 직전에 찾아와 눈을 뜨면 정확히 다시 같은 모습을 취하곤 했다.

자리를 피했다곤 하지만,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신체접촉은 완전히 피하고 의식이 끊겨 잠들어버린 그의 앞에서 그녀는 눈을 빤히 뜨고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맑은 눈으로 잠들어버린 그의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을 뿐.

그때마다 사하르는 그녀에게 미증유의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사하르가 그의 몸을 지배하는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뇌 일부에는 깃들었지만 몇몇 마법적인 안배가 되어있는 걸 피하거나 해석해야 했고 처음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몸 자체는 어떻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시간에도 한계가 있어서 몇 시간에 한 번씩 시도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밤에 그가 완전히 잠들어 악몽을 꾸고 있을 땐 전혀 활동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빠짐 없이 의식을 잃은 천후의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마치 그 몸속에 깃든 자신이 보이는 것처럼.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외부로 마법적인 오오라가 발현된 것도 아니고, 기면증 외의 증상을 일으킨 적도 없었다. 그러니 현재 몸에 영혼이 들어왔다기보단 뭄바이에 있었던 일의 후유증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일반적인 생각이 아닌가?

영천후 본인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뭔가?

애초부터 자신의 존재를 확정 짓고서 행동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지난 며칠간은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단지 감이 좋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정확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오감이란 것은 만능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초감각. 제6감도 마찬가지다. 그게 그렇게 용한 거였다면 진작에 마법사들이 죄다 그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겠는가?

"대체 네년은 뭐냐?"

사하르는 과거. 냉전 이전 시기에 이미 세계의 변혁을 꿈꿨던 남자 중 하나였지만, 그럼에도 미증유의 존재에게 느끼는 본능적인 두려움은 떨쳐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그 물음에 희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 표정없는 얼굴의 양 눈을 깜빡이며 전혀 다른 말을 내놓았다.

"…주인님의 몸을 돌려주시지요. S랭크 마법사. 유그드라실 7원로 아비드 사하르."

"뭣!?"

어느새 정체까지 알아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는 '감옥'에 갇힌 지 50년은 넘은 자였다. 저 여자의 나이는 10대 후반, 많이 잡아도 20이 간신히 되어 보이는데 자신을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가 무슨 대통령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천후의 몸에 깃든 이 상황에서는 더더욱!

"뭐냐! 대체 넌 뭐하는 년이야!"

영천후의 기억 속에서 뒤져본 그녀는 그저 그의 서포터였다. 재주는 많았지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초자연적 능력은 마도병장을 다루는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마주 보고 있는 이 여자는 전혀 다른 인간이었다.

경계심이 그 형태를 살의로 바꾸어 나갔다. 어차피 살육을 벌일 작정이었던 이상, 이 정체 모를 여자 역시 죽여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사하르는 그렇게 마음먹으며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그때.

희주의 입이 다시 한 번 열렸다.

"사막……. 프로젝트?”

"네년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이번에야말로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공격하고자 하는 욕구마저도 끊겼다.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희주는 천천히 그에게 접근해갔다. 남자는 몸을 떨며 몇 걸음 물러났다.

그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가능성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인간은 정말로 손에 꼽았다. 심지어 7원로 중에서도. 그런데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니. 잠깐. 설마 네년…."

문득 한 가지에 생각이 닿은 남자는 뒷걸음질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엔 이제 공포가 아니라 경이가 서려 있었다.

"완성했단 말인가?"

"…주인님을 돌려주시지요."

"주인님…. 주인님…. 아. 그렇군. 그렇게 된 건가? 하하하하! 과연!"

전모를 파악한 사하르는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 눈에서는 너무 웃어서 눈물마저 흘러내리고 있었다.

"과연. 과연 그렇군. 괴물의 반려는 괴물이라 이건가?"

"주인님은 괴물이 아닙니다."

"너에겐 그렇겠지. 세상에서 오로지 네년에게만은. 흐하하하! 놀랍군."

껄껄 웃은 남자는 신형을 날려 문 앞에 섰다. 하지만 희주는 더는 검편을 날리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사하르는 웃음 지었다.

"그 정안精眼을 보았을 때부터 알아보았어야 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떠올리질 못했군."

"……."

"네년관 어떻게 엮여도 내가 원하는 바는 이루기 힘들지. 잘 있어라!"

당당하게 문을 열고 뛰쳐나가는 그를 희주는 막지 않았다. 막으려고 해도 막지 못한단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차고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페라리 FF가 시동을 걸고 집에서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들으면서도 희주는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지금까지 공허하던 그녀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그 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가능성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주인님이 말씀하려 하신 것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희주는 그게 누구인지 능히 짐작했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난장판이 된 거실에서 안방으로 들어간 그녀는 자신의 핸드폰을 찾아 단축키를 입력했다.

화면에는 이강호의 이름이 떠올라있었다.

*

거주하고 있던 사무실 건물이 박격포를 맞고 날아 가버린 이후, 강호는 친란의 협조를 받아 엔체스터 호텔에서 아이들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엔체스터 호텔에서 천후의 자택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집을 찾아갈 땐 지하철을 이용하곤 했다. 차량에 대한 공포가 남아있는 아이들은 버스는 힘들어했지만, 사람이 아주 많은 지하철은 그래도 타고 다닐 수 있었다.

"후. 빨리 집을 알아봐야 하는데."

드래곤 레이드 성공 후 그녀에게 분배된 돈 역시 천문학적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집 정도는 쉽게 구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부동산 등을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불편해하고 있었다.

사실은 지금도 호텔에 돌아올 때마다 이목이 쏠리는 것 같아 눈치가 보이곤 했다. 그래서 잠깐 희주나 셀레나에게 대신 알아봐 달라고 해볼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녀는 곧 마음을 바꿨다.

뭐라고 해야 할까? 천후나 그의 여자들에게 더 신세를 져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섭섭하게 대하지 않지만, 강호는 그들에게서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호텔 전화기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가문에서.

수화기 너머에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호의 표정이 굳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이 너머의 사람은 현대 문물을 지극히도 싫어했다. 요즘 세상에 핸드폰은커녕 집 전화 조차 안채에는 두지 않을 정도로. 그 때문에 강호는 상당히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긴장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두려웠으니까. 굳이 직접 통화까지 해오면서 말이다.

노인이 말했다.

<네 남자가 제법 대단하더구나.>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 전화기를 통해 들으니 한층 더 섬찟하다. 하지만 강호는 그것을 무시하며 내용에 집중했다.

“용건을 말씀하시지요.”

<흐흐. 위세를 등에 업더니 제법 건방져졌구나.>

“…….”

그녀의 입이 다물어졌다. 조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극히 힘들었다. 강호는 어릴 때부터 그를 따랐고, 그의 조손으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사람이다. 성인이 되어서부터 반항하기 시작했다지만, 직접 상대할 때 강하게 나서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뭐 됐다. 어차피 남자에게 안겨버렸다면, 그래. 여자가 되든 어찌하든 마음대로 해라.>

“!”

놀라운 이야기에 강호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다.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그럼…!”

<더는 너에게 여자를 붙이려고 하지 않으마. 네 멋대로 살 거라.>

“감사합니다. 조부!”

강호는 진심을 담아 말하며 기뻐했다. 하지만 그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껄껄껄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단.>

“…….”

<알고 있겠지? 마지막 비전을 받을 생각은 버려라.>

“조부….”

강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숨이 거세졌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눈에 실핏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너에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지.>

“…….”

까드득. 강호의 입에서 이빨이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것을 들은 걸까? 노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굳이 바란다면…. 조건을 바꿔주도록 하마. 이건 네가 가장 잘하는 일이지.>

“무슨….”

<네 남자를 베어라.>

“!”

강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흐읍하고 숨을 들이켜며 그 이상의 호흡이 나오지 않았다.

쇠 긁는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네가 항상 해왔던 일이 아니냐?>

“조부!”

쿵. 쿵. 너무나 격해진 심장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강렬한 두통이 찾아오는 것을 느낀 강호는 순간 수화기를 크게 치켜들었다가 간신히 그것을 다시 입가에 가져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물기마저 묻어있었다. 하지만….

<흐흐흐…. 남자에게 마음이 빼앗겼어도 너의 본질은 숨길 수 없는 것이지.>

“조부.”

<기다리고 있겠다.>

달칵.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한참 동안 움직일 줄 모르던 강호는 한참이 지나서야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

무거운 발걸음을 침대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강호야….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조부의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하지 마라. 생각하지 마라.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

초점 잃은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그곳엔 자기 멋대로 쥐었다 펴졌다 하는 손아귀가 보였다. 그녀의 머릿속이 점점 어지러워졌다.

몇 년 전부터 강호의 검술은 발전이 멈춰 버렸다. 마치 이곳이 종착역이라는 것처럼. 그런 상황에서 조부가 약속하는 가문의 마지막 비전은 이 앞을 보게 해줄 가능성이 있는 몇 안 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조부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약점을 잡아서 강호를 몰아 붙여왔는데,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는 여자를 포기하라는 내용이었지만, 이젠 구체적으로 사람 하나를 지정해서 베라는 것으로 바꿔버렸다. 어느 것이고 제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약속했었다. 그날에.

다음에 날을 잡아보자고.

“……무슨 생각을.”

멍청한. 나는 멍청한 것이다. 무엇에 흔들리고 있단 말인가? 간신히 눈동자에 빛을 되돌린 강호는 침대를 몇 번이나 주먹으로 내려쳤다. 생각해선 안 될 일이다.

기대는 한다. 하지만 약속을 지킨다 하더라도 그것이 생사를 가르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 안 그래도 주체를 못 하고 과해질까 봐 미루고 있던 것이 아닌가? 때가 되고, 마음이 정해진다면 그가 먼저 말해줄 것이다. 그러니!

흔들리던 마음이 간신히 잡혔다. 강호는 지금 자기 손에 검이 쥐어져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또 다른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호텔 전화기가 아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화에서 들려온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간신히 다잡아놓은 마음이 흐려져 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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