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127화 (127/324)

127화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것은 언제나 사이하게 그에게 다가왔다.

그에게 '자기'라는 것이 구성되기 전부터 항상 귓가에 함께하던 소리. 그것은 제대로 된 음절이나 단어를 형성하지 못했다.

언어를 배우지 못한 갓난아기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노이즈였다. 너머에서 어떤 말을 해도 듣고 있는 천후의 수신상태가 너무나 좋지 않아 그것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괴롭다. 그것만으로도 상대의 목적이 결코 그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방적인 통신. 일방적인 시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어가며 그것에 대응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외면하면 된다. 철저하게.

그것에서 눈을 돌리면 또렷한 경우도 있는 '목소리'가 '잡음'으로 변하고, '잡음' 곧 '묵음'이 되었다.

그러나….

마법을 쓰면. 강력한 마법을 쓰면 그것은 다시 찾아오곤 했다.

어릴 땐 항상 함께하던 목소리와 잡음이 이제는 마법을 사용해야만 찾아오는 것은 상당한 호전이라고. 고인규는 말했다.

천후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는 인간으로서 인정받아갔으니까….

-치. 치지지직.

-끼. 이이이이이. 끼이이이.

고막을 직접 뜯어내 손가락으로 긁어대면 이럴까? 지속적으로 듣고 있다 보면 그의 정신이 점점 갉아 먹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

그는 그것에 귀 기울였다. 듣고 있다 보면 어째서인지 집중해버리곤 했다.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그의 이지를 상실하게 하는 주원인인 이 잡음. 이 속삭임에게서.

다행히 오늘 와서는 '신위'를 발동하지 않으면 신경 쓸 것까진 없는 소리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는 다른 소음까지 섞여서.

<너의 몸을 내놔라!>

그것은 평소 듣던 잡음보다 훨씬 더 명확하고.

훨씬 더 노골적인 욕망을 외쳐대고 있었다.

"으… 으으아아아아아!"

팟. 파밧. 파앗! 그의 몸에서 무색의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 강의 흐름과 같은 악령 무리가 그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다니며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신체가 그의 제어를 잘 따르지 않았다. 머리를 양손으로 틀어막는 것 정도로는 의미가 없다.

"꺼져!"

아무리 유령, 악령이라 해도 살아있는 사람의 육신을 점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특별히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온전히 자기 몸 가진 인간의 정신력은 혼령의 그것을 너끈하게 넘어선다.

하지만 그 수가 수백, 수천에 이르면 이야기가 다르다. 기껏해야 속삭이는 정도밖에 못 하는 것들이 모이고 모이면 외침이 되고, 명령이 되어 정신에 영향을 끼쳤다.

"후우. 후우!!"

그러나 천후는 버텼다. 몸에서 오오라가 튀어나왔다가 지워지고,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와중에도 자신의 자아를 확고하게 지켰다. 그때마다 그를 함락시키지 못한 악령들은 다시 혼불이 되어서 허공을 맴돌다가 꺼져갔다.

하지만 그때.

<제법 강건하구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후의 눈이 커졌다. 원래 사람 눈에 평소에 안 보이는 게 유령이다. 그게 형상을 갖출 정도면 이미 상당히 강력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완전히 격이 다르다. 명확한 의사소통을 나누다니?

생전 기억을 저장할 공간, 뇌가 없는 유령들에겐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순간 천후는 이놈이 악령들의 주동자 격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놈과 비슷한 것 다섯이 머릿속에서 왱왱거렸다.

<과연. 그대가 말한 대로 그도 만능은 아니군.>

<일부러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겠지만. 이러지 않으면 정신이 발전하지 않으니.>

<하긴. 그대로였다면 박약아인 채로 평생을 살았을 터.>

"아으으으으!"

너무 강력하다. 순식간에 의식이 육체에서 정신이 유리되어버릴 것 같다. 어떻게든 버티려 해도 다른 악령들까지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충격이 합쳐져 금세 한계가 찾아왔다.

"네놈들은…뭐냐!"

그 와중에도 간신히 자신을 유지한 천후가 입술을 깨물며 묻자, 머릿속에서 웃음들이 터졌다.

<흐하하하! 정말로 최완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나 보군.>

"무, 슨…."

어떻게 이런 악령 놈들이 아저씨를 알고 있지? 천후는 놀랐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놈들 중 하나가 지껄였다.

<어디 보자…. 이놈.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 못 하고 있군.>

<흐음. A랭크까지 열었나. 하지만 아직도 가능성을 잠가두고 있군?>

<이것은 그 남자의 솜씨겠지. 자아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까지만 문을 열 수 있도록 해두었군.>

<하지만 걸쇠가 풀리기 직전인걸?>

<쓰고자 한다면 그것까지는 풀어야겠지. 지금 상태론 한계가 너무 크니까.>

"제기랄! 네놈들은 뭐야! 알아먹지도 못할 소리를!"

천후의 눈동자가 떨렸다. 공포로 떨렸다. 이놈들은 거리낌이 없었다. 사람의 머릿속에 파고들어서 그 내용을 확인하는 것을 당연하단 듯이 하고 있다.

마치 그에겐 해도 되는 것처럼.

이 태도. 이 방침. 겪어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아주 초창기….

아직. 미연과 만나기 전. 먼먼 옛날.

10년 전.

"당신들…. 유그드라실의…."

떨리는 목소리를 내면서 머릿속으로는 확신했다. 그것이 전해졌는가? 다섯이 웃었다.

<깨닫는 게 늦구나. 별의 적자여.>

<네 녀석이 결국 지상으로 내려오게 한 것이 불찰이었다. 인간도 아닌 것.>

<네놈에게 무슨 자격이 있다고 영웅 놀이를 하고 있느냐? 미물 같은 놈.>

으직. 심장이 으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알았다. 이들이야말로…. 그를 사람으로 취급할 필요조차 없다고 주장해온 그 주체들이라는 사실을.

천후에 대한 대우가 개선될만하면 그때마다 방해해서 최완이 매번 사과의 말을 꺼내게 한 자들이라는 것을. 왜 이런 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후의 눈에 실핏줄이 섰다.

"웃기지 마! 당신들이야말로 뭐야! 뭔데 내 삶을 쥐고 흔들어! 난, 나로서 세상을 살아갈 권리가 있어!"

절규가 황무지를 뒤흔들었다. 그 흔들림만큼이나 머릿속이 울린다.

<흐하하하하! 권리!>

<사람흉내를 아주 잘 내게 되었군. 세상에.>

<이것도 그 남자의 솜씨인가? 구역질이 나는군.>

그들의 감정이 정신에 직접 전사된다. 그것은 머리를 어지럽게 하고, 코를 시큰하게 하고, 토악질이 나오는 것들이었다. 대체 자신을 보고 왜 이렇게까지 격한 감정을 느낀단 말인가?

"뭐야! 대체 뭐냐고! 내가 제3 인류라서? 이 빌어먹을! 당신들도 마법사잖아! 지금 이렇게 유령이 되어서도 그 힘을 휘두르는 괴물들 주제에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마법사 중 다섯이 있다는 SA랭크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몸을 숨기고 있는 S랭크만 해도 전 세계에 수십 명이 넘는다. 이 머릿속에 틀어박힌 놈들 중 몇은 그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런 놈들이 자신을 핍박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 다른 형태의 마법사일 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생각을 읽은 그들의 입에선 전혀 다른 소리가 나왔다.

<제3 인류. 흐흐흐흐….>

<그런 식의 이야기였지. 잠시 잊고 있었다. 최완이 네놈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긴 했군.>

"무…슨…."

천후의 되물음을 그들은 단호하게 끊었다.

<네놈이 알 것 없는 이야기다. 별의 적자여.>

<네 녀석은 얌전히 우리에게 몸을 넘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마법은 지워져 버리는데 이놈들은 자기들에게 허용된 초자연적인 힘을 마음껏 휘두르고 있었으니.

분하다. 만전의 상태라면 대항할 수 있는 것들인데. 천후는 이성이 흩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붙잡으며 물었다.

"대체 내 몸으로 뭘 할 생각이지?"

다행일까.

아니면 불행일까.

그것에 대한 답은 돌아왔다.

<너와 인간. 그리고 마법사는 도저히 병립할 수 없다.>

<더는 네놈이 이 세상에 살아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우리는 너의 몸을 지배하여 너를 죽일 것이다. 별의 적자여.>

그들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좀 더 확실하게 그의 정신을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다섯의 괴물과 수천의 악령이 그란 인간을 망가뜨려 갔다.

천후는 그들이 내뱉은 이야기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때까지는. 전혀.

하지만 단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있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는 것 하나만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렇기에 그는 마지막까지 비명을 질러가며 그 고통에 저항해나갈 뿐이었다.

*

비명이 들렸다. 그렇게 느낀 순간 강호는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잠에 취해있던 몸을 최상의 상태로 끌어올렸다.

그 덕분에 그녀는 바로 자신의 옆자리가 비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천후야?"

비명은 남자의 것이었다. 익숙한 목소리. 그것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눈을 치켜뜬 강호의 손에는 어느샌가 검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악시스 문디의 속성, 문명 이기를 망가뜨리는 점에 대응하기 위해 평소에 사용하던 난향, 난화는 가져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스테인리스강으로 공장에서 찍어낸 검 한 자루를 들고왔다.

다행히도 그것은 아직 상해있지 않았다. 그 사이에 검격劍格이 조금 헐렁해져 있긴 했지만, 이 정도면 굉장히 양호하다.

무기의 상태 파악을 마친 강호의 몸이 순식간에 밖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아, 아으…. 으아아아악!"

거대하고 거대한. 세계수 악시스 문디 가 밝히는 빛 아래에.

그것과 같은 빛깔 띤 수많은 호롱불들. 혼불들이 한 남자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수십, 수백 마리의 반딧불이 사람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때마다 그의 머리와 몸에 파고들었다 빠져나와 흩어져나갔다.

그의 정수리 위로는 악시스 문디의 빛이 고리처럼 흘러내려 꽂혀있었는데, 머리에 쏟아 부어진 그것은 바닥에 흘러 퍼져 다시 악시스 문디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찌 보자면 아름다운 광경. 하지만 저 앞에서 들리는 남자의 비명에서 이것이 사이한 시도임을 강호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 남자의 모습이 자세히 들어왔다.

"천후야!"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강호는 서서히 그가 내지르는 소리가 잦아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위험하다!'

순간 강호는 천후의 양아버지, 최완이 자신을 이곳에 같이 보낸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 제대로 말해주지 않아서!'

원망이 입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입 밖으로 낼 여유조차 없었다. 눈을 치켜뜬 그녀는 -검을. 뽑았다.

스릉.

낮은 발검음이 아름다운 현악기의 연주처럼 황무지에 퍼져나갔다. 그 순간….

-구우우우우우우웅…….

마치 거대한 생명체가 잔뜩 주었던 힘을 푸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악시스 문디의 빛이 서서히 꺼졌다.

뿌리 끝에서 저 하늘 위의 가지, 잎사귀까지 세세히 퍼져있던 빛무리가 사라져 갔다.

털썩.

그리고 그것에 연결된 빛무리에 속박당해있던 천후도 그 자리에서 뒤로 쓰러져버렸다. 그의 몸을 맴돌던 혼불들은 거짓말처럼 모두 흩어져버렸다.

"천후야!"

그가 넘어지는 것을 본 강호는 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천후야! 천후야!"

놀란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입술을 한 번 악 깨물었다.

마음을 굳힌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그의 턱을 들어 기도를 확보하더니, 그대로 허리를 굽혀 얼굴을 마주 대갔다.

바로 그때.

"…선배. 뭐해요."

"햐, 햐앗!"

팔짝!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뜬 강호는 천후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자 깜짝 놀라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러고 보니 맥박이고 호흡이고 확인도 안 하고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할 말이 궁해진 강호는 손가락을 비비 꼬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천후야. 괜찮은 거냐? 혼령들이 너에게 몰려든 거 같았다만."

"아…. 음. 네. 괜찮아요. …아마도."

방금까지 말도 안 되는 수의 악령들이 몸을 훑고 지나가 미쳐버리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신기하게도 머리가 개운했다. 이것도 그녀의 힘인가?

"선배. 이거 계속 유지할 수 있어요? 저 아무래도."

"걱정 마라. 끄는 게 어렵지. 유지하는 건 일도 아니니까."

오히려 유지하는 게 그녀에게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상태였다. 힘들게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그녀의 부축을 받고서 텐트로 들어갔다. 간신히 침낭 안으로 몸을 밀어 넣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그의 숨이 고르게 바뀐 것을 확인한 강호는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의 언동을 보니 그리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단 생각에 그녀는 잠들지 않고 그의 옆을 지켰다.

“…….”

잠든 사이에. 그의 손을 잡고서.

다음날. 어려운 길을 다시 돌아온 둘만의 여행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약간의 헤프닝은 있었지만, 무사하게.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넷이 당했군. 나 하나 남았나?

과연 진리 구현자. 악시스 문디의 마력으로 영체를 유지하고 있던 이들은 모두 흩어져버렸는가. 하지만…. 이미 육신에 깃들어버린 영까지는 완전히 흩을 수 없는 법이지.

별의 적자여.

네놈은 아직 너 자신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군.

어쩌면 그게 편할지도 모르지.

내가 너에게 주는 최대한의 정이다.

그것을 깨닫기 전에….

죽을 수 있게 해주마.

============================ 작품 후기 ============================

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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